萍 - 저장소 ㅁ ~ ㅇ/이건희의 세계 1위 방정식

5 마쓰시타의 VTR 제품을 사서 분해해 본 뒤 깜짝 놀라다

浮萍草 2015. 11. 15. 09:51
    개혁과 도전
    젊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건희의 개혁의 초점은 비서실의 기능이 회장의 상의 하달과 관리에 치중해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삼성을 병들게 했으므로 그걸 개혁하자는 것. 당시 삼성의 주력기업이었던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 등에서는 전년보다 물건을 얼마나 더 많이 생산해서 판매했는가가 주관심이었다. 당시는 설탕이나 양복지 등이 만들면 팔리던 시절이었으므로, 양으로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물건의 질보다는 양 위주의 물량적 사고방식이 팽배해있다는 것도 삼성 조직의 문제점으로 파악되었다. 계수가 늘어나는 것은 뭐든지 좋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고가 50년간 삼성을 암암리에 지배해오고 있었다. 88년에 회장에 취임하면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지만 <제2의 창업>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삼성은 근본 적으로 고쳐야 할 문제점을 수도 없이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91년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건희 회장은 일본의 마쓰시다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쓰시다 VTR 생산라인을 둘러본 후 이건희 회장은 마쓰시다의 VTR신제품을 하나 구해서 그걸 분해보았다. 분해해본 결과 마쓰시다 즉 내셔날의 VTR제품은 화질,선명도 및 화면 해상도,스타트 시간 등이 삼성전자의 제품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품질은 우수한데 부품수는 오히려 삼성제품보다 30%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그 즉시 이수빈 그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일간의 기술격차가 이렇게 큰 상황에서 향후 유통시장 개방시 소니,마쓰시다 제품이 상륙할 경우 그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는가를 물었다. 비서실 입장에선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다. 이건희는 ‘지난 81년부터 내가 계열사 및 비서실에 지시한 내용을 모두 취합하고 그 지시사항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행되었는지 각사별로 종합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룹 비서실에서 파악한 81년 이후의 지시사항은 무려 284페이지나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시사항이 이행되지 않고 상당부분 실종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실망이 컸다. 91년 12월 5일의 사장단 회의에서는 이런 내용도 나왔다. ‘기술을 강조했더니 효율은 무시한 채 사람 머릿수와 연구개발비를 무턱대고 늘리고 개발과제도 지나치게 방만하게 펼쳐 외형적이고 전시적인 기술중시에 치우치고 있다.’ 이건희 회장 자신이 엔지니어 이상으로 기술을 잘 알다보니 지시사항은 쌓이고 기술부서에서는 그 지시 사항을 이행하느라 태스크 포스팀을 자꾸 신설하게 되고,그럴 듯하게 겉포장만 흉내내는 일들이 빈발해지자 사장단을 질책한 것이다. 연구원 수는 많이 늘어났는데도 막상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고, 새로 만든 기술도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들 이었다. 그러다보니 비용부담만 늘어나고, 회사 자체의 수익구조가 나빠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90년도에는 2500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던 삼성이 91년도에는 매출은 늘어나는데도 순익은 감소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90년, 91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건희가 회장으로 취임한 88년 이후 계속 반복되어 오고있는 현상이었다.
            홍하상 작가 hasangstory@naver.com

    草浮
    印萍

    "삼성전자는 암 2기, 삼성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
    다가 사원들의 의식구조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시대는 국제화로 가고 있는데 사원들의 의식은 아직도 국내시장 1등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컨대 사원을 해외에 파견할 때도 유능한 사원을 시장잠재력이 큰 후진국에 파견해야 하는데 실제로 유능한 사원은 이미 시장의 기반이 다 잡힌 선진국으로 파견
    되고, 후진국에는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사원이 파견되는 등 인사의 난맥상도 있었다. 
    <제2창업> 시기 5년간 이건희의 눈에 비친 삼성은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병철은 <집권조직>의 상징이었으나, 세상은 <분권조직>의 시대로 가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1920년대에 그것이 이루어졌고, 일본은 70년대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1980년대 후반, 세상은 컴퓨터의 급속보급으로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한국의 기업문화는 철저한 톱다운 방식,즉 집권조직의 시대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11명이 뛰는 축구에서 전원이 다 잘 뛰어야 게임을 이길 수 있는데 감독만 혼자서 잘 뛰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삼성의 문제점이었다.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지시하는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ㆍ인재 중시에서 품질 중시
    93년1월부터 삼성은 <바꾸자 경영>을 선언한다. 93년 1월 한달동안 그는 <바꾸자 경영>을 위한 자신의 생각을 신년사를 비롯한 사장단 회의 등에서 쏟아냈다. 그해 1월4일에 있었던 신년사의 내용. 그를 위해 이건희 회장은 ‘일석오조의 경영정신으로 21세기에 꼭 해야될 사업과 안해도 될 사업을 구분해서 사업구조를 정비하고 자립경영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87년에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5년이 걸려 삼성의 진면목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성전자는 암2기.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으로 타고 날때부터 잘못 태어난 회사. 물산은 전자와 종합화학을 합쳐서 나눈 정도의 병> 그가 파격적인 수사를 구사하면서 본 삼성계열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두 중병에 걸려있는 셈이다. 그 중병을 고치기 위해 그가 선언한 것이 제 2의 창업이다. 그런만큼 93년의 이건희 회장은 아주 바빴다. 해외 출장만 68일.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마누라와 자식빼고는 다 바꾸자>, 파격적인 수사의 <신경영선언>이다. 그 신경영의 핵심 어휘는 <나부터 변하자>였다. 이른바 <바꾸자 경영>이라 불리우는 신경영의 선언은 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에서 있었다. 이미 그는 그해 2월부터 세계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해외지사 사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에 나섰다. 2월에 로스엔젤레스 회의,3월에 도쿄회의,오사카 회의,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두번의 회의가 있었다. 회의 중간중간에 세계에 산재해있는 삼성지사를 68일간 돌면서 1800명의 임직원을 상대로 직접 강연을 했다. 그중에 캠핀스키 호텔에서 발언해서 일약 주목을 받았던 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캠핀스키 호텔은 세계의 대도시에 체인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현대식 호텔. 거기서 그는 삼성의 임직원 60명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홍하상 작가 hasangstory@naver.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