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이건희의 세계 1위 방정식

4 이병철과 이건희의 같은점과 다른점

浮萍草 2015. 11. 9. 11:01
    이병철 삼성 설립자. /조선일보 DB
    1987년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38년 대구에서 과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삼성상회로 출발해서 1987년 작고할 때까지 37개 기업을 거느린 삼성그룹을 50년 가깝게 경영해온 경영의 달인이 세상을 뜬 것이다. 그가 50년간 기업경영 일선에서 얻은 교훈은 남의 말을 잘 듣는 경청과 목계였다. 이병철은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했다. 창업 49년후인 1987년 삼성그룹은 자본금 6310억원에 수출은 11억2500만불,총매출액은 17조4000억원이었다. 경상이익 2668억원에 종업원 16만 596명으로 키운 삼성그룹의 바톤을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넘겼다. 이건희는 이병철 스쿨의 수제자이다. 이병철은 살아 생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기업인들을 길렀다. 그는‘인재제일’이라는 그의 기업관에 의해서 20-30년간에 걸쳐서 인재를 길렀고 그들을 활용했다. 이병철과 이건희는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점도 많았다. 공통점.이병철 회장은 한 번 연구해야할 사안이라고 생각하면 아예 끝장을 낼 정도로 지독한 편집증이 있었다.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전 그는 반도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연구해야할 사안이 발생하면 우선 관련서적을 최대한 수집해서 꼼꼼하게 읽어본다. 해당 사안에 대해 정통하고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기자나 교수들을 식사에 초대하여 얘기를 나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따로 만나서 연구사안에 대한 사정을 소상히 파악했다. 그후 해당분야 사업가를 만나 실제 사정을 들은 후 나름대로 사업구상을 하고나서 구체적인 검토 내용을 비서실에 지시했다. 그는 입안(立案)에서부터 실시까지 그 과정을 지시하고 점검했으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에버랜드를 만들 때도 세계 일류의 테마파크를 모조리 조사시켜서 그걸 검토해본 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제일모직이 와이셔츠를 만들 때도 전세계 명품 와이셔츠를 150장이나 구해서 매일 하나씩 입어본 사람이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이 진출한 모든 신규사업은 철저한 검토와 검증 끝에 이루진 것들이었다. 이건희도 연구라면 부친과 막상막하이다. 그도 취미가 연구인 사람이다.
    자동차,VTR,핸드폰 등 기계 뜯어보기에서부터 금융실명제 연구 등 기업경영과 기술에 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개 기르기,골프장 조성,자동차 수집,승마,비단 잉어,히노키(檜)나무,일본역사 등 연구범위가 다양하다. 그것도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라 모두 끝장을 보는 타입이다. 이병철, 이건희 두사람 모두 어떤 사안에 대해서 대충대충 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이병철과 이건희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인재제일과 품질제일이다. 이병철은 기업도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인재를 제일로 쳤다. 그러나 이건희는 인재보다는 품질을 제일로 친다. 인재도 결국은 좋은 품질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이병철 회장이 카리스마가 강하고 정확하며, 현실을 중시하는 스타일인데 비해 이건희는 사고가 유연하며, 융통성이 있고 미래지향적이다. 87년12월1일, 호암 아트홀에선 삼성그룹 신임회장의 취임식이 있었다. 관객석을 1천3백여 삼성의 임직원들이 가득 메웠고 신임 회장인 이건희는 복도중앙을 걸어나가 단상에 올랐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지 20일이 갓 지났을 때였다. 이건희는 사장단의 추대형식으로 삼성그룹의 승계를 인정받았다. 단상에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과 그룹 사장단 전원이 배석한 가운데 이건희는 거기서 입사 최고참인 삼성중공업의 최관식 사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사기(社旗)를 물려받음으로써 경영의 대권을 쥐었다. 부친을 여윈지 며칠되지 않아서 취임사를 읽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렸고 때로 울먹이기까지 했다.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었으며 숙연하기 까지 했다.
            홍하상 작가 hasangsto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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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병해 비서실장을 해임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다
    46세. 젊은 총수의 취임이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사장단과의 식사가 있은 후 이건희와 사장단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08-1의 고 이병철 회장의 자택으로 가서 고인의 상청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그후 1년2개월간 시간이 날 때마다 국내 재계의 선배들은 물론 미국 제네럴 일랙트릭의 잭 웰치 회장 등 전세계의 대기업 회장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바쁘게 87년 12월 한달이 지나고 88년이 되었다. 88년은 그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삼성이란 대그룹을 직접 경영해본 첫 해이다. 또 1988년은 삼성의 창립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3월 이건희는 <제2의 창업>을 선언한다. 그는 제2의 창업으로 신규사업 추진과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고 발표했다. 신규사업 추진이란 우주항구,월면기지,화성기지 건설 등을 현실화하기 위한 우주항공 산업으로의 진출과 유전공학,고분자 화학 등의 진출을 말한다. 사업구조 개편은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전자와 반도체,통신을 하나로 합병하는 것이다.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바로 이때의 구조 개편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가전,반도체,정보통신 메이커로서 자리잡게 된 시초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이건희 체제 하의 삼성의 구조개편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우선 벽이 두터웠다.
    총수를 물려받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회장으로 취임한 이듬해 제2창업을 선언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 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이 너무도 단단했다.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당시 그의 고백 중의 하나이다. 그가 여기서 얘기한 <굳어진 체질>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 때문에 당시 한국 제일의 기업 삼성이 ‘사그러질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당시 삼성은 선대의 이병철 회장이 거의 50년간에 걸쳐 경영해오면서 나름대로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성취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이건희의 눈으로 볼 때 삼성은 국내에서 최고라는 안일함에 빠져 자만감에 도취해있던 기업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시대에는 모든 지시가 회장실로부터 내려왔고 그걸 각 계열사가 실천하는 전형적인 상의하달식의 경영이었다. 또 사장단에 대한 문책도 이병철 회장 자신이 직접 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작고한 이병철 회장은 대단한 메모광이었다. 그의 메모 수첩에는 그날 해야할 일,어제까지 미결된 일,알아보아야 할 사항, 재확인 해야 할 사항,점심식사를 같이 해야 할 사람,전화해야 할 곳,방문할 곳,구입할 물건,상을 줄 사람,벌을 줄 사람,구입해야 할 책의 제목,TV와 신문에서 본 자료 요약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는 사람과의 면담시간을 사전에 정해놓고 꼭 그 시간만큼만 면담을 했다. 스위스 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평생을 산 기업가가 이병철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스타일이었던 그는 자신의 경영을 돕기위한 분신으로 비서실이라는 대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삼성의 비서실은 80-90년대 한국 최강의 정보분석조직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도 잘했지만, 그만큼 권한도 강했다. 그러나 이건희는 그룹 비서실의 개혁없이는 삼성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 비서실의 책임자는 소병해였다. 소병해는 이건희와 동갑으로 이병철 회장 시대에 그를 12년간이나 보필해온 최고의 가신. 이건희는 3년 탈상 시점인 90년12월 소병해 비서실장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격적으로 전출시키고 신임 비서실장에 사대부고 4년 선배이자 제일제당,제일 합섬,삼성생명의 사장을 지낸 이수빈씨를 기용한다. 이른바 친정체제의 구축을 시작한 것이다.
            홍하상 작가 hasangsto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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