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뿌리 깊은 땅 성주와 한개마을 이수인

浮萍草 2015. 10. 21. 09:30
    王子들 태실엔 조선왕실 悲劇이… 한개마을엔 양반가 자존심이
    세종대왕 18왕자 胎 묻은 성주 땅 수양대군 권력 찬탈 흔적 곳곳에 성산 이씨 집성촌, 뿌리 깊은 한개마을 성밖숲 안개 속 오백 살 왕버들 59그루… 그 뿌리 지키려 낙향한 50대 사내도 "뿌리를 지켜야 세상이 보이는 법" 실에 아들이 태어나면 조선 왕조는 전국 길지(吉地)를 골라 그 태(胎)를 묻었다. 왕실 뿌리를 굳건히 하고 대대손손 발복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길지를 선점해 다른 가문의 발복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도 다분했다. 자식 복이 많은 성군(聖君) 세종대왕은 18남 4녀를 두었다. 세종은 그 아들들 태를 모아 한곳에 묻었으니 그곳이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다. 송림 한가운데 있는 이 터는 본래 성주 이씨 중시조인 이장경이 묻힌 명당이었으나 왕명으로 묘를 이장시키고 태실을 썼다. 이장을 반대한 후손 이정녕은 관직을 박탈당했다. 사적 제444호다. 성산(星山) 이씨 이우는 태실지를 찾으러 지관과 함께 내려온 사람이다.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는 지관이 짚어준 땅에 마을을 짓고 성주 땅에 입향했다. 마을 앞에 작은 개울 백천(白川)이 있었고, 큰 나루터가 있었다. 큰 나루터를 순 우리말로 하면 '한개'다. 마을 이름도 한개마을이 되었다. 이수인은 이우의 후손 북비공(北扉公) 이석문(1713~1773)의 8세손이다. 이수인은 이석문이 살던 그 집에서 1958년 태어나, 지금 그 마을에 산다. ㆍ한개마을과 이수인
    고향 한개마을을 지키는
    사내 이수인.
    한개마을은 민속마을이다. 기와집,초가집 75채가 돌담길로 미로처럼 연결돼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북비공 이석문은 영조 때 사도세자 호위무사였다. 세자를 가둔 뒤주 위에 돌덩이를 올리라는 왕명에 반항했다가 곤장 50대를 맞고 관직을 박탈당했다. 만신창이로 낙향한 이석문은 사립문을 뜯어서 북쪽 담벼락에 내고 평생 바깥출입을 삼갔다. 문 이름은 북비(北扉)라고 했다. 북쪽 한양에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이다. ' 비(扉)'는 사립문이라는 뜻이다. 올해 쉰일곱 살인 이수인은 그 북비공이 살던 고택에서 태어났다. 북비공 8세손이다. 대구에서 사업을 하던 이수인은 2007년 한개마을이 민속마을로 지정되면서 사업을 접고 낙향했다. 이유는 명쾌했다. "뿌리를 지킨다." 민속마을 사무국장 따위 직함은 없어도 좋았다. 마을 상징인 돌담을 수선하고 안내판을 만들고 고향 땅을 방문객들에게 자랑하니 즐거웠다. 마을 길에 풀이 무성하면 허리 굽혀 뽑으면 되고,무료로 개방한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지면 돈 들여 채워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신발 신고 가정집 툇마루 올라가는 사람에겐"사람 사는 집"이라고 한마디 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자기 성씨도 모르고 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게 속이 상하다"고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자기네 조상 마을이라고 찾아오는 방문객과 얘기해보면 성산 이씨가 아니라 성주 이씨고,또 남의 마을에 놀러 왔노라고 하는 사람들과 따져보면 성산 이씨 문중이라는 것이다. ㆍ왕명으로 사라진 성씨들
    성주는 큰 고장이었다. 김천,고령 칠곡,무주,구미에 이르는 거대한 땅이 성주였다. 40개 고을마다 성씨가 생겨났다. 이씨 가운데 성주에 본(本)을 둔 성씨가 여섯 개다. 임진왜란 때 왕조실록 성주사고가 불타면서 성주는 세(勢)가 약화됐다. 급기야 숙종 대에 와서 왕이 짜증스러운 명을 내렸다. "이 좁은 땅에 무슨 이씨가 그리 많은가. 성주(星州) 이씨로 통합하라." 이후 여섯 개 이씨들은 성주 이씨를 성씨로 삼고 살았다.
    경북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오른쪽 아래는 훗날 세조가 된 둘째 아들 수양대군 태실이고 오른쪽 맨 위는 세종의 손자인 단종 태실이다.수양대군을 반대
    한 다섯 왕자 태실은 친(親)수양대군파들이 석물을 파괴해 버렸다
    렌즈=삼양옵틱스 14mm 1:2.8 ED AS IF UMC 셔터스피드=1/50초 조리개=f8 감도=ISO100 /박종인 기자

    성산 이씨들도 그러했다. 진짜 본관을 잊고 성주 이씨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호적에까지 성주 이씨로 기록됐으니 말 다 했다. 1980년대 중반, 한개마을에 사는 성산 이씨들이 집단으로 호적 변경 신청 소송을 냈다. 이수인을 포함해 한개마을 사람들은 결국 뿌리를 되찾았다. 세월이 흘러 이수인이 되찾은 뿌리를 지키려고 마을로 돌아왔더니, 자기 자신처럼 뿌리를 모르고 헷갈리며 평생을 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수인이 말했다. "한개마을을 성주 이씨 집성촌이라고 알고 있는 방문객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우리 마을은 엄연히 다른 집안,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이수인의 집에서 자기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거나 전혀 다른 뿌리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억울해하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한다. 마을은 돌담길로 유명하다. 흙과 기와와 돌을 적절하게 교차해 쌓은 돌담이 모든 집을 감싼다. 집들은 방위와 상관없이 여자들 공간인 안채를 가장 안쪽으로 배치해 설계했다. 안동 하회마을만큼 크지도 않고 세련미도 없지만,그 넉넉한 공간에 적절히 배치된 가옥 구조는 외가에 놀러 온 것처럼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든다.
    마을 초입 이수인이 사는 집에는 커피나무가 자란다. 이수인이 말했다. "7년 전 필리핀 커피농장에 갔다가 커피 열매 한 톨을 가져와 심었더니 그게 벌써 200주로 불어났다. 이걸로 한국 기후에 맞는 커피나무 2000주를 길러 나눠줄까 한다." 아니, 종갓집 장손이 어인 커피나무? "어느 종가나 고민을 한다. 먹고살아야 하고,전통을 지켜야 하는 모순적인 고민.두루마리 휴지 하나도 돈이다. 민속마을이 자생적으로 발전하려면 경제력은 필수다. 커피가 뭐 어때서.전통은 계승을 하면서 발전시켜야 한다. 토종만 고집하면 어떻게 전통을 발전시키나저기를 봐라. "'저기'에 있는 감나무에는 탐스러운 대봉감이 셀 수 없이 열려 있었다. "저게 일제가 개량한 감이다. 토종만 된다면 저 감나무도 뽑아야겠지?" 그래서 이수인의 집에서는 드립커피를 판다. 무인판매를 했더니 세상이 생각보다는 비양심적이라 포기했다. 이수인은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말솜씨로 마을 유래와 구조에 대해 풀어놓는다. ㆍ태실의 수수께끼와 비극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 맏아들인 문종을 뺀 나머지 열일곱 왕자와 손자인 단종 태실이 있다. 원칙적으로 태실은 열여덟 개라야 옳은데, 실제로는 열아홉 개다. '塘(당)'이라고 이름만 적힌 표석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성주 태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미스터리다. 두 번째 미스터리는 역사 그 자체다.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더니 조카 단종과 쿠데타를 반대한 형제 다섯 명을 유배 보내고 사약 먹여 죽여 버린 것이다. 세조가 왕위를 지키는 동안 다섯 동생 태가 묻힌 태실 석물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새 임금에 충성하려는 자들은 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한남군과 영풍군 다섯 왕자 태실 위에 있던 석물을 계곡 아래로 팽개치고 파묻어버렸다. 뿌리 자체를 지워버린 것이다. 지금도 다섯 왕자 태실은 석물 자리가 비어 있다.
    한개마을 북비고택에 있는 작은 문 북비(北扉). 사도세자 호위무사였던 북비공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며 북쪽으로 만든 문이다.
    렌즈=캐논 EF 24-70mm 1:2.8 LUSM 셔터스피드=1/60초 조리개=f2.8 감도=ISO100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이 되자 신하들이 주청했다. "관례에 따라 주상 전하의 태실은 별도로 태봉을 만들어 모셔야 하나이다." 이 너그러운 권력자는 "형제가 태를 같이하였는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불허했다. 실록은 이렇게 찬미가를 읊었다. " 주상 전하의 총명, 예지하시고 겸손,검약한 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조선 억만년의 무강한 기초가 더욱 길이 아름다울 것을 또한 점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양대군 태실에는 거북이가 큰 비석을 지고 서 있다. 그 반대편 끝에는 세조가 사약을 내린 조카 단종 태실이 앉아 있다. 길지를 섭렵하며 팔도에 만든 조선 왕실 태실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모두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됐다. 태실들은 날 일(日)자 형태 배치됐다가 문화재청에 의해 그 배치 형태가 해체됐다. 태실에 얽힌 역사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ㆍ성밖숲에 자라는 뿌리 깊은 나무
    성주에 가면 이른 아침에 성밖숲에 꼭 가봐야 한다. 천연기념물 제403호인 이 숲에는 오백 살 먹은 왕버들 쉰아홉 그루가 산다. 밑동 지름이 1m가 넘는 나무들이다. 그 옛날 성주 성 바깥 마을에서 어린 소년들이 죽어나가자 풍수가들이 이를 막겠다고 밤나무를 심었다. 임진왜란 이후 밤나무 숲을 갈아엎고 왕버들을 심었다. 그 왕버들 가운데 쉰아홉 그루가 지금도 굳세게 뿌리를 박고 있다. 반드시 안개 낀 아침에 가야 한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아무런 감흥 없는 동네 공원이지만,안개에 들어가면 세상이 바뀐다. 조금씩 잎을 떨구는 거목들이 실루엣처럼 안개 속에 떠 있다. 단순한 식목(植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뿌리 깊은 역사만이 덧씌울 수 있는 선경(仙境)이다. 이 가을날, 성주에 가면 생명의 탄생과 기구한 역사와,뿌리를 지키려는 사내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가을이 깊다. 태실도 한개마을도 성밖숲도, 깊다. ㆍ성주 여행수첩
    가볼 곳(내비게이션 검색어도 동일) 1.세종대왕자태실 : 입장료 무료. 소나무숲 돌계단이 운치 있다. 조선 초기 정치 투쟁을 목격한다. 안내판에 적힌 찬미가를 볼 것. 2.한개마을 : 주민 사정에 따라 문 연 집도 있고 닫은 집도 있다. 초입 정면에 보이는 이수인씨 집에서 설명을 들을 것. 성주 역사가 흥미진진하다. 고택 체험도 청할 수 있다. (054)933-2124, 010-8272-5050 3.성밖숲〈사진〉: 한낮보다는 이른 아침, 안개 낀 날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 먹을 곳 1.가야사나래 : 퓨전 한식. 건해삼볶음정식 추천. 중식과 한식을 융합시킨 독특한 돌솥밥. 1만5000원. 성밖숲길 149, (054)933-9344 2.올리브 그린 : 포천계곡 안에 있는 커피숍. 계곡 풍경을 통유리 밖으로 감상하면서 즐기는 커피와 케이크. 성주군 포천계곡로 386, (054)933-4748 잠잘 곳 가야호텔 : 가야산 너머 합천 해인사 가는 길에 있다. 온돌, 침대방.호텔 내 식당 밥도 맛있다. 객실은 본관 추천, 별관은 방이 작다. ☞ (054)931-3500 ☜
    ☞ 성주군 관광정보 : (054)933-0021 ☜
    Premium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