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25 서민들 방한용품이었던 '토시'… 더위 쫓는 패션 소품으로 부활

浮萍草 2015. 11. 5. 09:16
    1971년 '5·25 총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여당 총재 자격으로 지원 유세를 했다. 
    충북 음성을 찾은 박 총재는 군중 앞에서 "나는 지지리도 못사는 농촌에서 태어나 가난에 쪼들렸다"며 근대화 추진을 위해 여당 후보를 뽑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박 총재가 자신의 가난했던 시절을 묘사하며 첫 번째로 언급한 건"보통학교 다닐 때 겨울 내의가 없어 토시를 끼고 다녔다"는 사실이었다.
    토시란 이처럼 가난한 이들의 물건이었다. 
    윗옷 좌우 소매 쪽만 뚝 잘라 놓은 듯한 모양이고, 양쪽에 흔히 고무줄을 넣어 조였다. 
    엄동설한에 이렇다 할 방한복을 갖춰 입지 못했던 서민들은 두 팔에 토시라도 끼고 소맷자락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막았다. 
    손이 시리면 토시를 내려 장갑처럼 손등을 덮기도 했다. 
    조선시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야금모행(夜禁冒行)'에도 토시를 끼고 있는 한복 차림 여성 모습이 나온다. 
    어느 원로 의사는"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조선의 서민들은 사시사철 무명옷을 걸치고 겨울이면 토시나 속옷으로 방한을 해가며 겨울을 지냈다"고 회고했다
    (매일경제 1970년 8월 15일자).
    신윤복의 풍속화 ‘야금모행(夜禁冒行)’ 속 토시를 낀 여성(왼쪽)과 더위를 쫓아준다는 오늘의 ‘쿨토시’.

    토시의 용도는 다양했다. 새 옷의 소매 끝이 더러워지거나 닳지 않도록 끼우기도 했다. 한복 입고 음식 차리는 새댁이나,흰 교복의 여학생,흰 와이셔츠의 사무원이 소매에 때가 타지 않게 하려고 토시를 애용했다. 방한용이든 더러움 방지용이든,예전의 토시란 모두 '절약'을 위한 물건이었다. 새 옷도 아끼고 세탁비도 아껴야 했던 시절 서민들은 옷 맵시를 다소 희생하면서도 헐렁한 토시를 양팔에 꼈다. 우리 살림이 나아지면서 무언가를 아끼려고 토시를 끼는 일은 드물어졌다. 1983년 에너지 파동 때 겨울용 토시가 유행했지만, 입은 옷이 부실해 어쩔 수 없이 끼었던 옛 토시와는 달랐다. 그것은 패션 소품에 가까웠다(조선일보 1983년 12월 10일자). 장식용으로 명맥을 이어 가던 토시에 최근 들어 기능이 다시 부여되고 있다. '자외선 차단 토시'에 이어, 더위를 쫓는다는 이른바 '쿨(cool)토시'도 시중에 나와 있다. 조선 시대에도 등나무를 엮어 팔에 끼움으로써 소맷자락 안으로 바람이 통하게 만든 여름용 토시가 있기는 했다. 오늘의 쿨토시는 팔뚝 맨살에 밀착하게 끼운 뒤 땀이 배면 즉각 증발하면서 열을 흡수하는'쿨링 테크놀로지'까지 적용됐다고 한다(조선일보 2014년 5월 21일자). 추위를 막으려고 무명옷에 끼우던 남루한 토시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으로 더위를 쫓는 신개념 토시가 등장했다. 토시 역사의 아이로니컬한 반전(反轉)이다.
    Chosun ☜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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