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23 日帝 땐 걸인들까지 찼던 '완장'… 격동 역사 속 신분 과시 수단 돼

浮萍草 2015. 10. 15. 09:19
    1939년 경기도 일대에서'고물상 위장 절도'가 잇따랐다. 
    폐품을 사들인다며 남의 집을 방문한 뒤 주인이 한눈파는 사이에 값진 물건을 훔치는 수법이다. 
    신종 범죄에 대한 경찰의 대책은'순실(純實)한(참된)'폐품 수집상들 팔뚝에 '완장(腕章)'을 차게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걸인이나 넝마주이에게도 완장을 채웠다(조선일보 1939년 7월 22일자, 10월 24일자). 
    일제강점기에 완장이란 경찰, 헌병 등 위세를 부리는 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팔에 두르는 표장(標章)'일 뿐이었다. 
    어깨띠란 캠페인 벌일 때나 제격이고 머리띠는'결사투쟁' 하는 시위대용(用)이라면 완장은 크기도 알맞고 팔에 착 감겨 거추장스럽지도 않았다. 
    한때 버스 안내원도, 유원지의 사진사도 완장을 둘렀다.
    차장’완장을 찬 1961년 서울의 남자 버스 안내원(왼쪽)과 팔 소매에 완장 모양의 장식을 덧댄 오늘의 암밴드 셔츠.

    하지만 현대사 고비마다 우리에게 깊은 기억을 남긴 완장은 힘 있다고 으스댄 자들의 완장이었다. 정치적·이념적 대립 속에서 '내 편' '네 편'이 갈라질 때마다 완장 찬 무리들이 등장했다. 6·25 때 인민군 점령지마다 설치던 머슴·소작인들은 붉은 완장을 찼고 1966년 8월 중국 문화혁명 때 광기(狂氣)의 시대를 이끈 홍위병의 상징도 붉은 완장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 때 서울에 진주한 군인들은'혁명군'이라고 적힌 완장을 찼다(조선일보 1961년 5월 19일자). 윤흥길은 소설'완장'에"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처럼,완장이란 실력자의 것이 아니라 실력자들이 부하들에게 채워 주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땐 여당의 열성 추종자들이 선거 때면 무더기로 완장을 차고 투표장에 몰려나와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줬다. 4·19를 촉발시킨 1960년 3·15 부정선거 때의 대표적 불법 행위가 '완장 부대' 동원이었다. 결국 완장은 1990년대 들어 슬그머니 퇴출되기 시작했다. 학교의'주번'완장이나'목에 힘주던'규율부원들의'선도'완장들이 가슴 표찰 등으로 바뀌어 갔다. 1993년 포항제철도'신(新)포스코 창조'를 외치며 경영 혁신을 추진할 때 사내 직위를 표시하는 완장부터 없앴다(매일경제 1993년 8월 9일자). 주차 단속원들도 한때 완장을 찼지만 요즘은 조끼나 모자로 대체하는 일이 많다. 반대로, 완장의 역사에 둔감한 젊은이들 사이에선 팔뚝에 완장 무늬를 덧댄'암밴드(armband·완장) 셔츠'가 유행한다. 완장의 씁쓸한 기억은 국어사전에 포함된'완장문화: 권위 의식이 만연해 있는 사회의 문화'라는 항목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Chosun ☜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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