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명인들 건강장수비결

86 고산 윤선도 3

浮萍草 2015. 11. 4. 12:19
    음악과 시에 일가견이 있었던 고산
    산은 일생토록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음악과 더불어 지냈기에 귀양살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산이 남긴 작품은 매우 많은데, 특히 불후의 시조들을 남겼습니다. 
    조선의 문학에서 장가, 즉 긴 문장은 송강 정철이요, 
    단가,즉 짧은 문장은 고산이 제일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산의 시조를 보면 자연 속에서 안락과 평화를 느꼈던 것으로 생각되고 정치무대에서의 비인간적인 투쟁과 욕망 등으로부터 자연에로 해방된 속 시원함을 즐겼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 생활을 노래한 연시조입니다. 
    고산이 65세 때(1651년) 가을에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각 10수씩 40수로 되었고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전해옵니다. 
    그리고 오우가(五友歌)는 물,바위,소나무,대나무,달을 노래한 시입니다. 
    물의 맑음과 끊임없는 흐름,바위의 변치 않음,소나무의 늘 푸르름과 뿌리 곧음,대나무의 곧음,달의 보고도 말 아니함 등을 신의,절개,기개,관용,침묵 등의 인간의 
    미덕과 연결한 것이죠. 
    이 두 작품은 고산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연시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보길도 전경 /정지천

    고산은 음악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나? 고산은 남달리 깊은 시심(詩心)을 가진 데다 음악을 사랑했고 조예가 깊었던 풍류인이었습니다. 특히 가야금을 좋아해서 늘 가까이 두었는데, 당시 거문고의 명수인 권해(權海)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음악을 감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곡과 연주도 했습니다. 고산에게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였던 것이죠 고산은 가무를 하는 이유가 단지 그게 즐겁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고산의 글에 보면 “<예기(禮記)>에는 ‘13살에 음악을 배운다’ 했고 <소학(小學)>의 제사(題辭)에는 ‘읊조리며 노래하고 춤춘다’ 했고 정이천(程伊川) 선생도 또한 ‘ 가르치기를 가무로써 하면 어린애들이 배운다’ 했으니,모두 옛 성인들의 음악에 담긴 그 속뜻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 된 후에야 음악을 할 수 있다면 성인이 어찌 음악에서 이루어진다고 이르겠습니까”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언급을 보면 고산이 음악을 하는 이유에는‘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이라는 동양의 유교적 예술철학인 <예기, 악기(禮記, 樂記)>의 예악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가,무가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산에게 있어서 노랫소리와 춤의 자태는 시와 서로 같은 것이었으며 그것은 마음을 닦고 시정을 더욱 깊고 오묘 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죠. 이는“하루도 즐겁게 놀지 않으면 심성을 수양하며 세상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草浮
    印萍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음악을 생활화하다
    가야금 연주 /조선일보 DB
    “음악이 기쁨을 돕는 소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산은 음악으로부터"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속(末俗)에서는 음악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고, 단지 기쁨을 돕는 것인 줄만을 알고 있어서 음란하고 방탕하고 번거로운 소리만을 즐겨듣고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루한 사람들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병통인 것입니다”라고 하여 우려를 나타내었죠. 음란하고 방탕한 음악만 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산은“소리라는 것은 천기의 유동에서 나온 것이며…만일 주흥으로 노래하고 항상 춤추어서 방일에 빠져 돌아오기를 잊는다는 것 때문에 경계하느라 없애버린다고 한다면, 거의 목이 메인다고 밥을 먹지 않고 국이 뜨겁다고 나물을 불어 먹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희음을 고요히 듣고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생각함으로써 즐거우나 방일하지 아니하고 서러우나 마음 다치지 아니하며 서두르지도 아니하고 게으르지도 아니하는 뜻을 얻는다면 그 배우는 이에게 유익함은 예나 이제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음악을 생활화했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죠. ㆍ고산이 남긴 음악에 관련된 유물
    고산선생이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이 뒷날 노래 부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불러지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산유물관에는 아속가사(雅俗歌詞),회명정측(晦暝霆側),낭옹신보(浪翁新譜),고산유금(孤山遺琴) 등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선생이 거문고로 직접 작곡하고 연주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아속가사는 우리나라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아악과 속악의 가사를 모아 엮어 놓은 책입니다. 회명정측은 거문고의 제작과 사용방법을 수록해 놓은 책입니다. 낭옹신보는 거문고의 명수인 김성기의 거문고 가락을 채보한 악보로서, 김성기의 아들과 그의 제자 들이 제작한 것이죠. 고산유금은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거문고인데, 거문고에 쓰인 글씨는 고산의 4세손인 윤덕희가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