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명인들 건강장수비결

85 고산 윤선도 2

浮萍草 2015. 10. 29. 11:34
    정적의 중병을 고쳐준 윤선도
    한약 /조선일보 DB
    년에 북쪽과 남쪽의 그 힘든 곳에서 오랜 기간 귀양살이를 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서 여생을 보낸 고산의 건강비결에는 무엇보다 선생이 뛰어난 한의사였다는 것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의학과 관련해서 고산의 기록이 최초로 실록에 나타난 시기는 인조 임금 때입니다. 인조, 효종, 현종 때 중궁전과 대비전의 의약을 위해 고산을 불러들인 것으로 볼 때 대단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궁중의 내의원에는 당대 최고의 명의들이 있었지만 치료가 되지 못했기에 고산을 불렀던 것이죠. ㆍ정적의 중병을 고쳐준 뛰어난 의술
    치열하게 당파싸움을 벌였던 정적인 원두표(元斗杓)의 중병을 낫게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원두표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된 인물로서 고산의 반대당인 서인(西人)의 우두머리였죠. 고산이 원두표의 부당한 처신에 대하여 효종께 상소를 올려 강하게 비판하였기에 철천지원수가 되었던 것이죠. “평원부원군 원두표는 재주는 많으나 덕이 적고, 이득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활하며, 포학 하게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으므로,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고, 원대한 안목이 있는 사람은 잘 죽기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은 옛날의 밝은 임금이 공신을 보전한 덕이고 이러한 사람을 먼 변방 으로 내치는 것은 옛날 성인이 망설이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친 도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원두표를 먼 지방에서 한가히 살도록 명하여 연말까지 한가롭게 놀게 하다가 나라의 형세가 굳어지고 조정이 안정된 뒤에 그가 새로워지거든 다시 등용하소서.그러면 종사에는 실로 억만년 끝없는 복이 되고 원두표에게도 억만년토록 얻기 어려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소를 올렸지만 원두표는 효종의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실세였던 지라 오히려 고산이 벼슬에서 파직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이였던 원두표가 위독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고산의 처방을 쓰면 나을 수도 있겠다고 했습니다. 정적이고 뭐고 가릴 지경이 아니었기에 아들 원민석이 고산을 찾아가 처방을 내려줄 것을 청했던 것이죠. 그러자 고산은 두말 않고 처방을 내어 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원두표의 측근 중에는 철천지원수가 지어준 약이니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원두표는 고산을 알기에 그 약을 먹었던 것이죠.
    결국 병석에서 일어난 뒤에 “윤선도와 원수를 맺지 말아라. 그는 나의 은인이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고산의 뛰어난 의술이 더욱 인정받았던 것이죠.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草浮
    印萍

    고산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이유
    산은 양아버지에게 직접 배우다가 임진왜란 중에는 산속의 절에 들어가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과거 공부도 했지만 역사,역학,산수,풍수,지리,복서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고 의약도 공부하여 의학적인 배경지식까지 갖춘 만능지식인이었죠. 집안이 대체로 
    시서화에 능하고 유학과 경제,지리,의학,음악 등에도 재능을 발휘했는데,엄격한 양반사회에서 잡학이라고 천시하는 의학,천문학, 점성학 등을 대대로 공부했던 점은 
    특이합니다. 
    고산이 특히 한의학 공부를 많이 하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그가 공조참의라는 벼슬을 사직하려고 올린 <사공조참의소(辭工曹參議疏)>라는 글을 보면 경위가 나옵니다.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하였으나, 
    지식이 얕아서 남들이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하여 부모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한의학을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습니다.
    고산의 이런 말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였던 정이천(程伊川) 선생이 말한,병들어서 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을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을 불효에 비교하니,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또한 의술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도 그러했습니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항상 약장을 비치해 놓고 살았을 정도로 의약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녹우당에는 약을 조제하기 위해 썼던 약장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의약에 통달한 고산은 집안에서 약포(藥鋪)를 직접 운영하여 인근에 사는 병든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의학을 일종의 천한 기술로 여기던 당대의 시류와는 달리 직접 진료하고 처방전을 내려 약을 지어주었던 것이죠.
    중형 한약장 /정지천
    ㆍ고산이 남긴 한의학에 관한 자료
    고산의 ‘약화제(藥和劑)’에 의하면 오선주방(五仙酒方 : 건강 약술), 선창약(癬瘡藥 : 버짐을 없애는 약),회충약(蛔蟲藥),해수약(咳嗽藥 : 기침,가래 치료약), 복학 신방(腹虐神方 : 어린애들의 자라배를 다스리는 약),우역신방(牛疫神方 : 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처방) 등이 있습니다. 다양하고 신기한 처치법이 남아 있어 의술의 깊이를 짐작케 하는데, 우역신방을 활용하면 광우병 같은 것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