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내려올 때 보인다

8 박지원

浮萍草 2015. 10. 27. 08:00
    >미국 교포사회에서 '전경환의 오른팔'로 알려졌던 박지원
    
    1988년 2월 5공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6공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국내 여론은 곧바로 5공 비리 수사를 요구했고 첫 번째로 전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지목했다. 
    3월 중순 전씨가 돌연 외국으로 출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급진전됐다. 
    곧이어 전씨가 미국 뉴욕 뉴저지 일대에 거액의 부동산을 은닉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5공 비리 추적하다 알게 된 이름
    당시 뉴욕지사에서 근무하던 나는 전씨 재산 추적에 나섰다. 전씨와 가까웠던 교포들은 이구동성으로 A씨를 ‘전경환의 오른팔’로 거명했다. 그는 1970년대 초 이민 와서 사업가로 성공했고 뉴욕 한인회장으로 있던 1981년 전 대통령의 방미환영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뉴욕 평통자문위 회장도 맡고 정계 진출도 모색했다는 것이다. 즉시 수소문했으나 이미 한국에 가고 없었다. 결국 롱아일랜드·뉴저지·필라델피아·보스턴까지 차를 몰고 가 전씨 지인들을 만났지만 한결같이 전씨와의 관계에 대해 ‘모르쇠’로 나왔다. 급기야 뉴저지의 주도(州都) 트렌턴의 주지사 사무실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난감한 표정의 주지사 보좌관은 나를 기자실로 안내했다. 턱수염이 북실북실한 뉴욕타임스 기자가 설명해 주었다. “미국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나라여서 개인의 신상정보를 일절 공개할 수 없다. 대신 방법을 하나 알려 주겠다. 뉴저지에는 21개 카운티(우리의 군과 유사)가 있는데 카운티마다 등기소가 있다. 거기 가면 부동산 소유권 대장(deed)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뒤져 보라.”
    1988년 3월 31일 오전 수갑을 차고 수사관의 양팔을 낀채 검찰청사를 나서는 전경환씨. /조선일보 DB

    한국식으로 말하면 등기부 등본을 열람하라는 소리다. 나는 회사 일이 끝나면 카운티 등기소를 찾아다니며 일일이 열람했다. 10여 일쯤 지났을까. 여섯 번째로 찾아간 에섹스 카운티에서 전씨 부인과 장남 명의의 집을 발견했다. 대지 300평, 건평 45평의 중산층 주택으로 유학 온 전씨 아들과 딸이 살고 있었다. 한국 신문들이 연일 전씨 해외재산 은닉설을 대서특필해 왔지만 물증이 확인된 것은 이것이 유일무이했다. 기사가 나간 뒤 대검 중앙수사부 간부의 전화가 왔다. “함 기자가 검찰 체면을 살려 주었소. 전씨를 외화 도피 혐의로 추가 기소할 겁니다.” 집권 뒤 옛일 캐묻자 “그땐 의전상…”
    몇 년 뒤인 1992년 대선 때 김영삼(YS)과 김대중(DJ) 간 격돌이 벌어졌다. 이때 DJ의 대변인으로 ‘박지원’이란 사람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A씨였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DJ를 만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1987년 귀국 후 평민당에 입당했던 것이다. 이후 다시 세월이 흘렀다. 박씨는 승승장구해 동교동계 가신들을 제치고 DJ의 ‘No.1 맨’으로 자리를 굳혔다. 나와의 첫 대면은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홍콩을 방문했을 때였다. 홍콩특파원이던 나는 막간을 이용해 청와대 대변인이던 박씨에게 다가가“전경환을 압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얼버무리며 얼른 내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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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영준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한국문화포럼 이사장(現) jmedi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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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 같은 정몽주 보다 상인 감각을 지닌 이방원 편에 설 인물
    
    두 번째 만남은 2001년 6월 이뤄졌다. 
    당시는 DJ 정권과 보수 언론이 ‘전쟁’을 벌일 때였다. 
    해외에 있던 나 역시 갑자기 불려 들어와 사회부장을 맡게 됐다. 
    국세청은 6월 20일 조선일보 등 6개 언론사를 탈세로 고발했다. 
    곧 검찰 수사와 사주 구속 등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바로 이날 청와대 정책수석을 맡고 있던 박씨가 시내 한정식 집으로 중앙 일간지 사회부장단을 초대했다. 
    곧 술판이 벌어졌다. 
    폭탄주가 돌고 농담이 오고 갔다. 
    박씨의 다소 호기 어린 모습에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나는 13년 전 뉴욕 이야기를 꺼냈다.
    “박 수석, 뉴욕서 전경환과 그렇게 친했다면서?”
    그 말에 박지원은 그날 처음으로 굳어진 표정을 보여 주었다.
    “아…, 뉴욕 한인회장을 하다 보면 의전상 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매우 가까웠다고 하던데…. 
    전경환의 ‘가방모찌’(어떤 사람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노릇을 했다며?”
    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좀 거칠게 말을 했다. 
    어차피 권력과 언론 간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번진 판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날 이후 그는 내게 잘 대했다.
     내가 전화를 걸면 즉각 받았고 어떤 사건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면 적당히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누구와도 손잡고 굽힐 줄 아는 인물
    그는 여러 얼굴의 사나이다. 스스로 고백했듯 ‘좌익의 아들’이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고 ‘전경환의 오른팔’을 거쳐 ‘DJ의 충신’이 됐다. 
    그런 전력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과 칭찬 역시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세상에 굴신(屈身)할 줄 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굽히고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인물 같다. 
    그를 보면 이방원과 정몽주의 고사(古事)가 떠오른다. 
    박지원의 이력을 돌아보면 그는 정몽주보다 이방원 편에 설 인물이다. 
    정치적 스승인 DJ가 정치인의 덕목으로 강조한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 중 그는 철저히 후자 쪽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정치인 박지원의 존재 이유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박지원은 DJ의 충신이 되기까지 평생 주변인(outsider)으로 맴돌았고 끊임없이 권력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후 자신의 연고인 호남 세력에 편입된 뒤에도 DJ 적손인 민주화 동지들로부터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떠난 후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DJ 사후 최고위원, 당 원내대표를 거치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 나라 정치인의 삶을 몸으로 통렬히 체험한 그이기에 도리어 속 좁고 척박한 한국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념(理念)으로 포장된 이권(利權),개혁(改革)으로 위장한 개악(改惡),명분(名分)으로 치장한 명리(名利)와 더불어 혈연·학연·지연 등 온갖 연고(緣故)가 판치는 이 위선적 정치판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좌우를 넘나들며 ‘솔직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2014년 봄 영·호남 출신의원 20여 명이 전남 하의도 DJ 생가와 경북 구미 박정희 생가를 차례로 방문하고 사진을 찍었을 때 박지원은 그 한가운데서 환하게 웃었다. 지역갈등 해소와 여야 화합을 다짐하는 모임을 주도한 그의 역할이야말로 그다운 행동이요,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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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영준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한국문화포럼 이사장(現) jmedi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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