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내려올 때 보인다

5 김영삼

浮萍草 2015. 10. 7. 07:30
    산은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어렵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4000억원이 시중은행에 100억원짜리 40개 계좌로 분산 예치돼 있다.”
    1995년 10월19일 박계동(민주당) 의원의 폭탄 발언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의 차명계좌 3개가 증거로 제시됐다.
    이제 칼은 YS에게 넘어갔다. 불과 3개월 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12·12와 5·18에 면죄부를 주었는데….
    그러나 YS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 이를 정면 돌파키로 했다.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해 전면 수사를 지시하는 한편 12·12와 5·18을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규정하고‘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돌입했다.
    이후 1년반 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국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블랙홀’이 됐다.
    그러나 나는 과연 이 일을 YS가 주도한다는 게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바로 3당 합당을 통해 사실상 전·노와 손잡고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더구나 그 역시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ㆍ민주계 출신들 한보서 엄청난 정치자금
    1993년 봄 YS 정권의 출발은 좋았다. 하나회 척결,공직자 재산공개 등 개혁 정책으로 지지율이 90%나 되기도 했다. 그러나 2년 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선 참패를 했다. 세간에선 YS의 차남 김현철이 사조직을 운영하며 국정에 개입하고 인사 농단을 부린다는 풍설이 파다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열을 받는 모습. /조선일보 DB

    1995년 8월 나는 ‘모래시계 검사’로 불리던 홍준표 검사(현 경남지사)를 만났다. 그는 대뜸 현철씨가 동창관계로 얽힌 사업가들로부터 돈을 얻어 쓰면서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K고 동문인 W그룹 C회장, H그룹 P회장과, K대 동문인 J그룹 J회장, K그룹 후계자인 L씨 등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2년 뒤 IMF 사태를 전후해 도산했다.) 홍 검사는 특히 YS측근들이 한보그룹과도 밀착돼 있다고 전했다. 한보그룹은 불과 4년 전(1991년) ‘수서 비리’사건으로 정태수 회장이 구속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는데 최근 재기했다는 것이다. 내가 홍콩특파원 발령을 받고 현지에 도착한 지 며칠 안된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은 무려 5조원의 부채를 지고 도산했다. 외국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93년 6000억원이던 한보철강 부채가 1996년말 4조원을 넘어섰고, 부채비율은 자기자본(2000억여원)의 무려 20배를 초과했다. 이런 터무니 없는 대출이나 재무 상태는 사상 유례가 없었다. 국제 금융계와 언론은 불과 2년전 전직 대통령 2명을 구속시킨 현직 대통령 하에서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진 사실에 주목했다. 이후 한국 경제와 정치는 전 세계에 거의 ’엉망‘ 수준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다음날인 1997년 7월2일부터 동남아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이런 세계적 위기에도 한국은 오불관언이었다. YS는 아들 현철씨가 구속된 이후 사실상 ‘식물 대통령’이 돼 있었고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여론은 이회창 아들 병역문제와 대선에 올인하고 있었다. 10월 말 한국 주가는 결국 500선이 붕괴됐으나 우리 정부는 전혀 대응을 못했다. 결국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고 증시가 붕괴 상황에 이른 11월 21일 저녁,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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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영준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한국문화포럼 이사장(現) jmedia21@naver.com

    草浮
    印萍

    '하늘은 자기편'이라는 자신감을 가졌던 대통령
    
    ㆍ‘하늘은 내편’이라는 자신감이 독
    
    1997년 후반기는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가장 위험했던 시간들이었다. 
    한국인들이 피땀 흘려 쌓아온 ‘한강의 기적’이 일순간 거덜 나게 됐는 데도 통치자는 무지했고,그런 징후를 보고한 부하도 없었다. 
    나라는 표류하고 있었다.
    YS는 20대 의원 시절부터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의리와 정이 있었고, 국민의 마음을 읽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야당 투사였다. 
    그런 그가 왜 대통령 후반기 때 그런 실정(失政)을 하며 추락하게 됐는가.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선 안되지만 외환 위기에 관한 한 YS의 책임은 크다. 
    그는 측근들과 한보 사이의 유착을 제어하지 못했고, 세계화’란 명목 하에 세심한 고려 없이 자본시장을 덜컥 개방해버렸을 뿐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엄청난 국력을 소모했다. 
    그 와중에 한국 경제가 곪고 썩어 들어가는 것을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다.

    사실 야당투사로서 비판과,대통령으로서 국정운영은 전혀 다른 세계다. 박정희가 그 어려운 시절“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며 시대적 악역을 자처하고 좁은 길을 헤쳐 나갔던 것과 달리,YS는 거칠 것이 없는 탄탄대로의 넓은 길(大道無門)을 걸어갔다. 누구보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은 DJ(김대중)지만 대통령이 된 뒤 꾹 참고 보복을 하지 않은 것과 달리 YS는 군사정권과 손을 잡고 집권하고서도 한 순간에 그들을 내쳐 버렸다. YS의 그 같은 과단성, 즉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처럼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나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다 됐고, 하늘은 항상 자기편이라고 자신(自信)했을 성 싶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결국 대통령이 된 뒤 국정 운영에는 독(毒)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마음 속에는 ‘국민을 섬기는’ 겸손보다 ‘내가 최고’라는 교만이 자리 잡아 위기를 위기로 보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반복된 것이 아닐까. 등산을 즐긴 YS는“산은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어렵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그는 대통령이란 인생 최고 목표를 이루고 하산하다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인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의 말이 생각난다.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하고 영웅이 됐지만 평생 후진국 네팔에서 봉사하다가 타계한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첫 인간이라는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등정을 통해 겸손과 관용을 배웠다는 점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YS가 저 힐러리경(卿)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또 우리 각자의 인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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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영준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한국문화포럼 이사장(現) jmedi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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