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과학 이야기

47 1901년 노벨상 수상업적에 이미 등장하는 일본 학자들

浮萍草 2015. 10. 23. 11:31
    노벨 물리학상의 가지타 다카아키와
    생리의학상의 오무라 사토시를 그린
    그림. /이덕환
    벨 과학상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기대가 이제는 과학계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변하고 있다. 작년에 3명의 물리학 수상자를 배출했던 일본이 올해도 생리의학상과 물리학상을 받았다. 일본과의 ‘21대 0’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도 모자라서 이제는 중국과 터키까지 수상자를 배출했다. 외환위기와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왔고,노벨상 수상에 필요하다는 기초과학연구원까지 만들었지만 여전히 노벨 과학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도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더욱 확대하고,과학자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해달라고 칭얼대고 있는 것이 우리 과학계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ㆍ노벨상 강국으로 우뚝 선 일본
    일본은 이제 미국(269명)·독일(87명)·영국(84명)·프랑스(39명)와 함께 세계 5위의 노벨 과학상 강국이다. 1949년부터 2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고,문학상과 평화상 수상자까지 포함하면 일본 출신 수상자는 24명이나 된다. 입자물리학·이론물리학·이론화학·의약화학·생리학·분자생물학 등 거의 모든 기초과학 분야에서 수상자를 배출했다. 특히 2008년 이후 무려 12명의 수상자를 쏟아냈다. 수상자의 구성·출신대학·소속기관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일본의 노벨 과학상 수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일본이 오래 전부터 기초과학에 유별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의 지속적·적극적 투자와 특유의 장인정신이 일본 노벨 상 성공의 열쇠라는 것이 우리 과학계와 언론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물론 틀림없는 사실이다.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RIKEN)를 설립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과학기술에 세계 최고 수준의 투자를 해왔다. 가미오칸데 폐광에 설치한 세계 최대의 중성미자 검출 시설에 2천억이 넘는 예산을 투입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든 가미오칸데에서의 연구로 2명의 물리학자가 노벨상을 받았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당당하고 끈질기게 고집하는 일본의 독특한 장인 정신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에밀 베링과 함께 디프테리아 혈청요법을 개발했지만 노벨상을 놓쳐버린 ‘일본 세균학의 아버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이덕환
    ㆍ일본 기초과학의 뿌리
    그러나 우리의 이런 분석은 표피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가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현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비겁한 변명일 수도 있다.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가 노벨상을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패배주의적 궤변이다. 주사터널현미경(STM),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그래핀, 힉스 보손의 경우처럼 과학적 업적이 곧바로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이 기초과학에 대해 우리와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과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일본의 기초과학을 미래의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나 노벨 과학상을 수상하기 위한 얕은 전략의 결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비뚤어진 역사 인식으로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초과학의 발전과 과학지식의 증진을 위한 노력까지 폄하할 이유는 없다. 일본은 19세기 말 서양과 함께 생리학·물리학·화학의 기반을 마련했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올해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오무라 사토시(大村智)가 평생을 보낸 기타사토대학(北里大學)이 그 증거다.기타사토 시바사브로(北里柴三郎)는 1901년 노벨 생 리학상의 수상 업적에 등장하는 일본 생리학의 아버지다. 일본은 당시 유럽의 정치적 환경 탓에 제1회 노벨 생리학상을 아깝게 놓쳐버린 셈이다. 1963년까지 공식적으로 수상 후보자로 추천된 일본 과학자는 무려 163명에 이르렀다.
    Premium Chosun        이덕환 서강대 교수 duckhwan@sogang.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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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물리학을 견학하러 가던 도중에 노벨상 소식 들은 아인슈타인
    해 저무는 여의도 증권가 전경. /조선일보 DB
    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가던 배 안에서 1922년 자신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1893년 유럽 유학을 떠났던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郎)는 훗날 양자역학의 대가가 된 닐스 보어,에른스트 러더퍼드,폴 디랙,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일본의 독자적인 현대 물리학 기반을 마련했다. 러더퍼드의 행성 모형보다 7년이나 앞서‘토성형 원자 모형’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일본의 이론물리학자들을 만나러 가던 중이었다. 이론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선구적인 전통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가지타 다카아키(梶田隆章)로 이어진 것이다. ㆍ다른 길을 선택했던 우리의 과학기술
    우리가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우리가 일본과 같은 기초과학의 오랜 전통과 독특한 장인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본보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노력을 소홀히 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일본과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인류 공영의 지식 증진이라는 거룩한 ‘명분’보다 당장 우리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경제성장이라는 ‘실리’가 우리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선택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세계가 놀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우리의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선택을 후회할 이유는 없다. 우리의 선택에 잘못이 있었다면 이제부터 과거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늦었다고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다. 기술 개발에 성공한 우리의 경험과 능력을 가진 우리가 지식 증진을 위한 기초과학에서 성공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일본의 성공 요인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기초과학에 대한 일본의 오랜 경험이나 역사적 행운을 부러워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장인정신을 배우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과학자의 자율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를 강요하는 정부 정책을 바로잡는다고 당장 노벨상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추격형의 패스트무버 사회를 선진·창조형의 퍼스트무버 사회로 바꾸자는 화려하지만 공허한 구호만으로 노벨 과학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창경궁 숭문당 현판. /문화재청 제공
    ㆍ학문숭상과 문화융성의 꿈을 실천해야
    이제 국가적으로 새로운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난 반세기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 바짝 다가서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렵게 올라선 고지(高地)에서 돌아본 우리의 모습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경제성장에만 집착해왔던 우리가 어느새 모든 것을 경제적 잣대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부끄러운 졸부(猝富)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 필요하다는 창조경제는 경제성장을 위한 창업만 강요하고 있다. 화려하게 내세우는 문화융성도 자극적·선정적인 한류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노벨 과학상은 영원히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후손에게 부끄러운 졸부의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확실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도 인류 공영을 위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선진국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을 숭상하고, 지식의 가치를 인정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기초과학과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에 대한 인식부터 확실하게 바꿔야 한다. 기초학문은 어렵고, 재미없고, 쓸모없는 것이고,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는 공연한 허세이고 낭비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무의미한 힐링을 앞세워 청년의 약한 마음을 뒤흔드는 길거리 인문학도 과감하게 버려야 하고 기초과학이 미래의 돈벌이 수단이라는 황당한 궤변도 포기해야 한다. 진정한 학문숭상과 문화융성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과학계도 변해야 한다. 노벨 과학상을 핑계로 더 많은 연구비와 예산을 받아내겠다는 얄팍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속이 뻔히 보이는 변명도 의미가 없다. 먹거리 창출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공영을 위한 지식 증진을 위한 진정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교육과 사회봉사에 대한 책임도 확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는 외면하고 무작정 연구비와 자율성을 보장해주고,사회적으로 우대해달라는 유치하고 이기적인 요구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과학계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Premium Chosun        이덕환 서강대 교수 duckhwan@sogang.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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