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27 성곡신민(聖谷愼旻)

浮萍草 2015. 10. 27. 00:00
    좌의정이 찬양하다
    虎眠于石 雲在于天 性吝聖也 見之者緣 余於上人 見耳垂肩 호랑이는 바위에서 졸고 구름은 하늘에 있다. 성(性)은 성(聖)이라 한다. 그것을 보는 것도 인연이니 우리 성곡당 신민스님은 귀가 어깨에 드리워졌다. 도사에 소장되어 있는 성곡신민(聖谷愼旻, 1835~1858 활동) 선사 진영에 실린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영찬이다. 찬자 이유원은 이항복의 후손으로 고종대에 정치가이자 문장가로 크게 이름이 떨쳤다. 이유원과 불교의 인연은 알려진 것이 없다. 출가수행자는 아니지만 “승려처럼 거처하며 차를 마신다”고 자신의 시에 남길 정도로 차를 매개로 불교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성곡스님의 영찬은 그가 좌의정을 역임하던 1864년에서 1865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다만 두 사람 간에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던지 찬문의 내용은 스님의 요체보다 피상적인 표현에 머무르고 있다. 스님의 삶과 사상은 이유원의 영찬보다 오히려 진영 뒷면에 기록된 화승(畵僧) 의우자우(意雲慈雨)의 기록을 통해 또렷하게 전달된다. 의우스님은 “1859년 기미 6월에 김해의 서림사와 말사의 모든 스님들이 그 도(道)를 사모하고 덕화에 젖어 우러러 감읍해 마지않았다. 이에 재물을 내놓아 진영을 제작하여 통도사 극락암 선사(先師) 진영 아래에 모신다 (咸豊九年己未六月日 金海西林寺揮寺諸僧慕其道涵其化瞻成不己出財造成移掛于通度寺極樂庵先師影愼下 畵師意雲堂慈友)” 진영 조성이 성곡스님의 수행과 덕화 에 감응했던 스님들의 진실된 마음에서 이루어졌음을 기록했다. 성곡스님 진영을 통도사 극락암 선사 진영 아래에 모셨다는 것은 의운스님이 1859년에 같이 조성한 호암체정(護巖體淨)과 용파도주(龍波道周) 스님의 진영과 나란히 봉안했음을 의미한다. 김해 서림사는 오늘날 은하사로 1835년에 성곡스님은 이곳의 대웅전 관음상 개금과 후불도 조성을 주도했다. 스님이 입적하자 평소 따르던 서림사와 말사 스님들은 재물을 내어 성곡스님 진영만이 아니라 통도사 극락암에 모셔진 낡은 호암체정과 용파도주 진영을 새로 그려 성곡스님의 법통을 내세우고 그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 불교신문 Vol 3138 ☜      
    제찬 해제=정안스님(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진영 설명=이용윤(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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