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20 침굉현변(枕肱懸辯)

浮萍草 2015. 10. 20. 00:00
    벽관수행 일가 이루다
    天眷有東 佛日晦塞 挺生異人 光紹厥卿 壁觀一宗 蔚然崱屴 遺像○儼 百世秢式 風淸月琅 庭艸薿薿 “하늘의 보살핌이 해동에 있었으나 불일이 어둡고 막혔다. 비범한 인물이 태어나 빛이 높이 솟고 벽관 수행으로 일가를 이루어 번성하게 하니 남겨진 모습의 의연함은 백세의 시작이다. 맑은 바람 아름다운 달 정원에 우거진 향기로운 풀.” 천 선암사에 모셔졌던 침굉현변(枕肱懸辯, 1616~1684) 선사 진영에 실린 예운혜근(猊雲惠勤, 19세기 말~20세기 전반 활동)의 영찬이다. 예운스님이 영찬을 쓴 시기인 흑룡(黑龍)은 1892년 임진년으로 생각된다. 이때 예운스님은 선암사 영각에 모셔진 진영 중 도선국사부터 대각의천, 소요태능, 침굉현변, 호암약휴 등 여러 선사들의 찬문을 지었다. 침굉스님은 어릴 때 불가를 일으킬 인물이란 점괘를 받았으며 은사인 보광스님은 그를 부처님이 보내준 인물이라 감탄했다. 13세에 소요스님에게 그 법기를 인정받아 서산휴정에서 소요태능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했다. 18세에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임을 깨닫고 일심(一心)을 주인으로 삼아 도를 크게 이루었다. 예운스님이 비범한 인물이 탄생하여 동방의 불교를 일으키고 달마의 면벽 수행처럼 벽관 수행으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찬문의 내용은 침굉스님이 이러한 삶과 무관하지 않다. 침굉스님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조선후기동안 소요문중이 주요 문중으로 활동하는데 토대를 마련했다. 스님은 입적 후 시신을 들판에 버려 동물에게 보시하라는 유계(遺戒)를 남겼다. 제자들은 유훈에 따라 다비하지 않는 대신 시신을 금화산 바위틈에 봉했다 한다. 이후 제자 계음호연(桂陰浩然),호암약휴(護巖若休) 등은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1696년에 스님의 유고를 모아 <침굉집(枕肱集)>을 간행해 스님을 추모했다. 유고집이 간행할 즈음 선암사에는 침굉스님의 승탑이 세워지고 진영이 봉안되었을 것이다. 온화한 성품과 흐르는 물과 같은 자태를 지닌 스승을 그리워하며 제자들이 조성했던 침굉스님의 진영은 현재 선암사를 떠나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 불교신문 Vol ☜      
    제찬 해제=정안스님(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진영 설명=이용윤(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