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17 半공개 손 편지 적던 '관제엽서'… 익명으로 비난·협박 때도 '애용'

浮萍草 2015. 9. 17. 12:00
    ▲  2002년 5월 조선일보의 월드컵 퀴즈에 응모한
    엽서 52만여 통에 파묻혀 추첨 중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이젠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조선일보 DB
    '관청에서 만들었다'는 뜻의 '관제(官製)'가 앞에 붙는 말치고 어감 좋은 단어가 별로 없다. '정부가 조작한 민의(民意)'라는 뜻의'관제 민의'를 비롯해'관제 데모''관제 캠페인'등 주로 권력이 저지르는 반 (反)민주적 행태를 표현한 단어들이다. 보기 드문 예외 하나가'관제엽서'다. 정부가 만들었기에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이다. '관제'라는 단어가 거슬렸는지 1992년 총무처는'관제엽서'가'국민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정 용어'라며'우편 엽서'로 순화하겠다고 했지만 일상 속에서 '관제엽서'는 아직도 살아 있다. 가로 14.8㎝, 세로 10.5㎝.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 5월 10일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관제엽서의 크기는 거의 변함없다. 용처는 무궁무진했다. 1920년대 전후부터 퀴즈나 각종 아이디어 공모 행사의 응모 수단으로 썼다. 봉투 뜯는 수고가 필요 없어 정리와 추첨에 편했다. 1970년대의 여러 현상 퀴즈 행사 때마다 30만~80만통에 이르는 관제엽서의 밀물이 신문사와 방송국에 밀려 왔다. 보내는 사연이 노출된다는 점은 단점처럼 보이지만 여러 사람에게 대놓고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는 사람에겐 엽서만큼 딱 맞는 것도 없었다. 벽보 붙이듯 요란하게 공개하는 게 아니라'주변 사람들 정도는 볼 테면 보라'는 반(半)공개 통신 수단이었다. 1927년 한 청년은 서울 관훈동 모 여학교 기숙사의 학생에게 며칠간'꿀 같은'러브 레터를 보란 듯 엽서에 적어 보냈다(조선일보 1927년 7월 3일자).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협박할 때도 일부러 관제엽서를 쓰는 일이 있었다. 3·15 부정선거 후 장면 부통령에게 날아든 여당 비판 투서도 엽서를 이용했다(조선일보 1960년 3월 26일자). 1969년 신민당 송원영 대변인은'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욕설'이 600자나 깨알같이 적힌 관제엽서를 받았다 (경향신문 1969년 8월 6일자). 1990년대에 비판적 기사를 많이 썼던 어느 기자 앞으로 온 익명의 관제엽서에는'개××'라는 단 세 글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우편엽서는 아직도 우체국에서 270원씩에 판매 중이지만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엽서의 기억은 깊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최근 개막한 '한글 편지 기획전'에 백남준 등 각계 인사들이 쓴 엽서를 선보이고 있다. '세계 책의 날'(4월 23일)을 맞아 한 대형 서점이 벌이고 있는'손 글쓰기 문화 확산 캠페인'행사 중에는 부모,스승,자녀들에게 사랑의 엽서 쓰기가 포함됐다. 실용의 영역에서 물러나고 있는 엽서는 아날로그 감성을 추억하는 소품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Chosun ☜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