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4 道家 ‘玄의 소통’

浮萍草 2015. 9. 6. 22:16
    美醜도 是非도 멀리서 보면 미미한 차이… 소통하려면 물러서라
      100여 년 전 서양의 근대교육이 뿌리내리기 전에 동아시아인은 천자문을 익히면서 교육을 시작했다.   천자문은 초등학생을 위한 입문서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한자 천자를 단순히 외우게 하는 교본이 아니다.   네 자씩으로 구성된 총 250개의 천자문 구절들은 우주 자연의 원리인 천도(天道),인간의 도리인 인도(人道),   치세의 원리인 치도(治道)를 제각각 말해준다.   지금의 자연과학(天道), 인문과학(人道), 사회과학(治道)을 총체적으로 학습하는 셈이다.   우리가 잘 아는 천자문 시작부인 천지현황(天地玄黃),즉 ‘하늘천 따지 가물현 누룰황’은 우주 자연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이는 하늘(天)은 현(玄)하고,땅(地)은 황(黃)하다는 말인데 이 내용은 동아시아 사상의 핵심에 해당한다.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늘을 한 번 올려다보자. 그러면 동쪽 하늘과 서쪽 하늘이 모두 똑같이 푸를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선 어떤 구분과 경계를 지을 수 없다. 북쪽 하늘과 남쪽 하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대상들 사이에 어떤 구분과 경계가 생겨나지 않으므로 옛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가물가물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구분과 경계의 소멸은 밤에도 나타난다. 밤이 되면 어둠으로 인해 대상들을 서로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모든 게 같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玄)의 의미가 ‘검을’ 현으로까지 확장된다. 반면 땅에선 모든 것들이 누렇게 드러난다. 산도 있고, 강도 있고, 구릉도 있고, 늪도 있다. 대상들 사이에 이런 구분과 경계가 생겨나므로 땅을 가리켜 황(黃)하다고 말한다. 그런데‘가물/검을 현(玄)’과‘드러날/누룰 황(黃)’은 하늘과 땅의 구분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전통적 사유의 두 축인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입장을 각기 대변 한다. 공맹(孔孟)으로 대표되는 유가사상이 황의 입장이라면 노장(老莊)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이 현의 입장이다. 유가의 주자학 이념에 따라 나라의 기틀을 세운 조선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으로 사람들을 구분한 게 좋은 예다. 선비(士)의 경우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나눈 뒤 옷 색깔마저 당상관은 붉은색으로,당하관은 푸른색으로 구분한다. 어쩌면 조선사회가 당쟁과 사화로 얼룩진 것도 서로의 입장 차이를 포용하기보다는 구분해서 드러내려고 했던 황의 관점 탓인지 모른다. 도가는 이런 식의 구분 짓기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도가는 사농공상도 하나로 통하고, 나아가 만물도 하나로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세상 만물과 만사는 돌고 돌아 결국 처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 만물의 경우 가까이서 볼 때 드러나는 크고 작은 차이들조차 멀리서 보면 의미 없는 차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세상만사의 경우에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차이도 큰 시각에서 보면 결국 소멸되고 마는 차이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삶과 죽음조차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큰 깨달음은 우주 자연의 원리인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도의 깨우침을 방해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눈, 코, 귀, 혀, 몸이라는 우리들의 오관(五官)이다. 이것들은 대상의 의미를 구분함으로써 외부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 즉 눈을 통해 모양의 아름다움과 추함을,귀를 통해 소리의 크고 작음을 구분한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보통의 눈으로 구분하는 게 부족하다고 여겨서인지 돋보기 같은 걸 들이대어 없는 구분을 만들어내는 데 집착한다. 조금 더 아름다워지려는 욕망마저 자극하여 성형외과 문턱을 들락거리는 데 돈과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 게 작금의 추세이다. 모두 헛된 욕망으로 보이는데 이는 비단 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현대문명이 이런 헛된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는 게 정확한 진단이다. 사회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로서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프랑스의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헛된 욕망을 꼬집어 ‘나는 (기호를)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현대인들이 제품 내용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브랜드라는 제품 기호를 소비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소비자들은 제품의 질이 좋더라도 이름 있는 브랜드가 아니면 좀체 구매하려고 들지 않는다. 이런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호들의 집합체인 광고가 첨병 역할을 한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광고를 가리켜 ‘제품 사이에 크지 않은 차이를 극대화하는 기제’라고 정의한 바 있다. 광고에서만 그러한 게 아니다. 우리들의 일상도 크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익숙하고, 또 골몰한다. 그런데 아름다움/추함의 차이구분은 옳음/그름의 차이구분에 비하면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아름다움/추함에선 논쟁이 생겨날 일이 별로 없지만 옳음/그름 사이에선 논쟁이 빈번하고 또 그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당파싸움도 옳음/그름을 놓고서 죽기 살기로 논쟁한 결과이지 아니한가? 그렇지만 옳음/그름조차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 그 차이란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 차이점 못지않게 공통점도 적지 않아서이다. 장자가 말하는 소통의 으뜸 원칙이 바로 이것이다. 아름다움/추함의 차이도 멀리서 보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옳음/그름도 한 발짝 뒤에서 보면 결국 소멸되고 마는 미미한 차이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연설에선 이런 식의 수사가 자주 등장한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애쓸 때 민주당원들에게 호소했던 연설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 민주당에는 두 그룹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라크전을 찬성했던 애국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전을 반대했던 애국자입니다.” 당시 민주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 참전 여부를 두고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양쪽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하는 후보자 처지에선 난처한 상황이다. 이에 오바마는 참전 여부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는 양쪽이 지닌 애국심에 호소했다. 즉 애국의 방법론만 다를 뿐 모두가 애국심의 발로였음을 강조한 것이다. 애국의 방법론이 ‘황’의 관점이라면 애국심은 ‘현’의 관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정치는 황(黃)의 관점에서 맴돈다. 여야관계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어서이다. 유권자들조차 정치의 장에서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우리의 정치인들이 소통을 위해서 한 발짝 뒤에 물러서려는 대국적인 자세보다는 불통이 될지언정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서 없는 의견 차이까지 만드는 데 골몰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유권자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다고 혹시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이에 장자는 세상 만물은 물론이고, 세상만사도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말고 멀리서 조망해야만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장자서는 이런 내용과 함께 시작한다. 북쪽바다(北冥)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산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일 정도로 매우 크다. 그런데 곤이 변하면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붕의 길이도 몇 천리일 정도로 매우 길다. 붕이 높이 날아오르면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큰 바람이 일면 붕은 그 바람을 타고 남쪽바다(南冥)로 날아간다. 남쪽바다가 곧 하늘의 호수(天池)이다.
    이 글이 유명한 대붕의 비상(飛上)을 말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소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장자’가 중국 고전들 중에 최고의 문학성을 자랑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예상과 크게 차이 나는 서술이다. 이 구절은 ‘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배운 바를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도덕경’의“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와 비교해도 너무나 색다르다. 물론 이어서 전개되는 글을 읽으면 대붕의 비상을 왜 언급했는지 납득이 가지만 이어진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땅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흙먼지가 날아다닌다. 아지랑이와 흙먼지는 생물들이 숨을 내쉬기에 생겨난다. 그런데 땅에서와 달리 하늘이 푸른 건 본래의 색깔일까? 아니면 너무 멀어서 끝이 없어서일까? 붕이 내려다보니 올려다볼 때처럼 똑같이 푸르다.
    이 글이 앞의 글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더욱 아리송하다. 그렇지만 이 대목을 이해해야만 장자의 소통사상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뭇사람들은 아지랑이와 흙먼지 등이 뒤섞인 땅의 색깔이 하나일 수 없다고 추측한다. 그런데 대붕이 하늘 높이 올라가 땅을 내려다보니 가까이서 볼 때와 달리 땅도 하늘처럼 마찬가지로 푸른 게 아닌가? 가까이서 보면 여러 가지 색으로 구분될는지 모르지만 멀리서 보면 푸른 색 하나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늘도 원래 푸른색이 아니라 멀리서 보니까 푸른 게 아닌가? 이처럼 멀리서 보면 모든 게 구분되지 않고 경계가 없는 하나의 색깔로 보일 뿐이다. 가까이서 보는 게 황(黃)의 관점이라면 멀리서 보는 게 현(玄)의 관점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대붕이 날아가는 곳은 하늘의 호수인 남명(南冥)이다. 이곳은 특정한 물리적 위치는 아닌 듯싶다. 물리적인 곳이라면 먼 곳을 빨리 날아가는 게 중요할 텐데 큰 날개의 훨훨 움직이는 모습에서 연상되듯 대붕의 날아감은 여유로움 그 자체이다. 이런 여유로움이란 가까이서 들여다볼 때 얻어지는 확실성이나 명료성,즉 황(黃)의 자세가 아니라 멀리서 바라다볼 때 느껴지는 불확실성과 추상성,즉 현(玄)의 자세이다. 장자는 이를 가깝고 먼‘거리’의 개념이 아니라 높고 낮은 ‘높이’의 개념으로 바꾸어서 설명한다. 그래야만 하늘의 호수(天池)인 남명(南冥)에 안착할 수 있다. 바로 그곳이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이 자리 잡아야 할 곳이다.
    Munhwa ☜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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