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3 通情의 소통미학

浮萍草 2015. 8. 30. 09:40
    광우병·메르스… 安全 하더라도 安心 못시키면 ‘不通’
    서양 커뮤니케이션은 合理 바탕 머리와 머리간의 연결을 중요시 동아시아인의 경우 通情에 따른 가슴과 가슴 연결이 진정한 소통 언어로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없어 행동도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 이러한 맥락에서 ‘言行一致’ 강조
      오늘날 소통은 우리 시대 담론의 중심에 있다.   미국산 수입쇠고기의 광우병 여부로 촉발된 2008년 여름의 촛불시위가 중요한 계기가 됐는데 그 후부터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소통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듯하다.   혹시 침묵을 깨고 입장을 밝히더라도 일반인의 생각과 정서에선 많이 벗어나 있어 마땅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커뮤니케이션학이 어째서 이 지경까지 추락하고 만 걸까?   필자는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 연구가 오랫동안 서구의 관점에만 매달린 탓이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  일러스트=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계적인 사회철학자 하버마스(J Habermas)는 공론장(公論場)을 통해 의사소통이론을 정립함으로써 서양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있어 큰 획을 그었는데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간 바 있다. 그는 언젠가 한국 사회 문제의 진단 및 처방에 대해 조언을 부탁받은 자리에서“명륜당(明倫堂)과 해인사(海印寺)에 이미 모든 답이 있는데 굳이 내 철학을 통해 한국 사회를 연구하려고 드느냐?”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전통사상에 이미 소통학의 DNA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인데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은 비단 필자만의 곤혹스러운 경험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주류 사회과학계는 서구 이론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짜맞추는 데 어떤 주저함이나 부끄러움 없이 오랜 시간을 소비해 왔다. 몇 해 전 교수신문이 한국의 인문사회 분야 학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외국 이론에 종속된 우리의 연구 풍토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진단에도 불구하고 서구 이론에 의한 학문적 종속 현상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을 듯싶다. 커뮤니케이션학도 이런 학문적 풍토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에선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커뮤니케이션학 연구가 이미 반세기를 훌쩍 넘어섰지만 토착이론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을 규명하려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노력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는 세계의 여타 지역에 비해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한다. 커뮤니케이션도 이런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고 본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인은 화자(話者)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보다 그 메시지 너머에 있는 화자의 진정성을 읽어야만 그 의미를 비로소 해석할 수 있다. 그런 탓인지 동아시아인에게는 어떤 위험으로부터 안전(安全)만 강조해선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를 제대로 구할 수 없다.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야,즉 안심(安心)을 시켜야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닌다. 이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소통’이 과학적 정보와 지식의 공유를 통해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광우병이나 원자력 안전,심지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 방지에 대해 안전만 호소하는 방식으로는 동아시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그다지 효과가 없어 보인다. 동아시아인에게는 자신들의 커뮤니케이션이 합리(合理)에 입각한 머리와 머리 간(brain-to-brain) 연결에서 머물러선 안 되고,통정(通情)에 따른 가슴과 가슴 간 (heart-to-heart) 연결로 이어져야만 소통으로 승화될 수 있다. 동아시아인 의식 속에 뿌리내린 이심전심(以心傳心)도 이런 성향에서 생겨난다고 본다. 이에 반해 서양인에게선 이심전심 식의 소통 방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서양에선 모든 의미가 객관화되고 명료화돼야 하기에 의미가 감성적이 되고 마는 이심전심의 방식을 허용하기 어렵다. 이처럼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언어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동아시아는 ‘의미를 언어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 결과 행동을 언어 못지않게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삼는다. 언어와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는 언행일치(言行一致)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에 반해 서구의 커뮤니케이션관은 ‘모든 의미는 언어로 대체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다. 그 결과 입으로 내뱉은 말, 글로 쓴 텍스트만을 이해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커뮤니케이션의 상당 부분을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법과 규칙 등이 담당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소쉬르(F d Saussure)에 의해 창안된 구조주의 기호학은 ‘모든 의미는 언어로 대체할 수 있다’는 철학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문이다. 구조주의 기호학은 이런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항대립(二項對立) 구조를 통해 의미를 나누고자 한다. 이항대립에 따른 의미 구분이란 선/악, 아름다움/추함 등처럼 네(yes)/아니오(no) 식으로 의미를 나누는 일이다. 그런데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의미의 이항대립 구분이 만연하면 우리는 상극(相剋)의 논리에 쉽게 빠진다. 이항대립 구조가 ‘either or’에 바탕을 두고 있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작금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좌우 이념논쟁, 성장과 분배에 따른 논쟁도 바로 이런 언어관에서 비롯된다. 반면 상생(相生)의 논리는 ‘both and’에 기초한다. 선/악, 아름다움/추함 등을 칼로 두부 자르듯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추함과 동거하고, 선은 악과 공존한다. 단지 아름다움과 추함 중에, 또 선과 악 중에 어느 것이 상대적으로 많은가, 적은가의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절대선과 절대악은 개념상으로 있을 뿐 실제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 사용하다 보니 실제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추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또 악이 있기에 선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이에 노자는“유무(有無)는 공생하고,난이(難易)는 조성하며,장단(長短)은 형성하고,고하(高下)는 서로 기울고,음성(音聲)은 조화하고,전후(前後)는 수반한다 (‘도덕경’ 2장)”고 말한다. 서양 사상가들 중에서도 동아시아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소중함을 깨닫는 학자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다. ‘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충격적인 주장으로 한때 서구 지성계를 뒤흔든 매클루언(M McLuhan),문자학으로 2000년 이상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형이상학을 뒤엎은 데리다(J. Derrida)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나는 기호를 소비한다,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소비사회의 위기를 알린 보드리야르(J Baudrillard), 마르크스식 하부 구조를 청산하고 이를 커뮤니케이션 으로 대체한 하버마스도 이들로부터 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인은 서구인에 비해 ‘소통’이라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오랫동안 해 왔고, 이를 지지하는 사상적 뿌리 내지 철학적 근거도 분명하다. 이런 점만으로도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서구 학자들 중에는 동아시아 소통 방식의 경쟁력에 대해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행태를 서구 이론으로 분석하고,이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으니 관련 연구자들에게 적지 않은 모순이 발견된다. 그런 탓인지 오늘날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은 급격히 서구화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선 서구인보다 더 서구화돼 가는 실정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인의 자랑이었던 소통의 미학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 한동안 커뮤니케이션학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도 이런 변화를 유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그런 결과인지 몰라도 ‘보다 빨리’ ‘보다 많이’ ‘보다 멀리’라는 전달의 효과만이 또 ‘보다 명료하게’ ‘보다 객관적으로’라는 커뮤니케이션 기능만이 우리의 주목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동아시아 전통적 방식의 커뮤니케이션과 점점 멀어지면서 소통은 우리 주위에서 맴돌 뿐 행동양식으로 굳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유가사상을 ‘낮의 사상’이라면 노장사상을 ‘밤의 사상’으로, 또 유가철학을 ‘경세의 철학’이라면 노장철학을 ‘휴식의 철학’으로 흔히들 말한다. 노장사상을 매력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사춘기적 취향에 기울어 있다고 폄하하는 것은 이런 식의 언급 탓이다. “가장 큰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거나 “그칠 줄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知止不殆)”는 ‘도덕경’ 인용구들은 분수를 지키는 겸손한 삶의 전범으로 자주 활용 되지만 이는 유가의 적극적인 현실 진단 내지 처방과 거리가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은 공맹지학(孔孟之學)에서 노장지학(老莊之學)으로의 전환을 현실에서 일하다가 지쳐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장자가 그리는 삶의 모습은 2000년 전 주장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이 세상에 희망을 지니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변적으로 깊이가 없거나,실천적으로 어려운 주문을 내놓지 않는다. 실제로 장자는 삶의 본질과 소외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통해 즉물과 피상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처방을 내린다. 이 처방을 따르면 몸과 마음에 전혀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 있다. 그러니 이론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천을 통해 구현토록 하는 게 장자의 목표다. ‘논어’ 제1장은“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다(學而時習之)”로 시작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장자는 ‘학(學)’이 아니라 ‘습(習)’, 즉 배움이 아니라 익힘에 더 방점을 둔다. 소통과 관련해선 이런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장자서 전반을 관통하는 맥은 ‘소통’이다. 특히 장자가 직접 썼다고 알려진 ‘내편’이 그러하다. 그리고 ‘장자’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내편’ 제물론(齊物論)을 소통의 관점에서 파악하면 실타래에 복잡하게 엉킨 실이 풀려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제물론은 장자서의 이론적인 틀에 해당한다. 동아시아의 많은 고전 중에 드물게 ‘논(論)’이란 제목을 사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제물론을 이해해야만 장자서 전편에 흐르는 소통의 철학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필자가 굳이 ‘장자’를 해독하겠다고 나선 것도 소통의 사상가로서 장자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함이다.
    Munhwa ☜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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