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2 天道·人道·治道의 상생작용

浮萍草 2015. 7. 10. 07:00
    人爲 배제한 無爲, 서양과학의 부족한 2%를 채우다
      서양학문은 크게 자연과학·인문과학·사회과학쯤으로 구분된다.   물리학·화학·수학 등은 자연과학,문학·철학·사학은 인문과학,정치학·사회학·경제학 등은 사회과학을 각각 대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동아시아에도 이런 학문적 구분이 있다.   천도(天道), 인도(人道), 치도(治道)의 구분이다.   여기서 하늘의 도인 천도가 자연과학, 사람의 도인 인도가 인문과학 조직 다스림의 도인 치도가 사회과학쯤에   각각 해당한다.   그런데 도(道)란 무엇일까?   신,진리,창조주처럼 특정한 존재를 지시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일까?   물론 그런 면도 있다. 노자 ‘도덕경(道德經)’에선 이런 경향이 강하다.   그렇지만 도는 형이상학적 의미뿐 아니라 걸어 다니는 길,흐르는 물,부는 바람처럼 형이하학적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장자’에선 이런 형이하학적 색채가 두드러진다.   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곰곰 생각하면 형이하학적 의미까지 지닐 수 있는지 쉽게 수긍이 간다.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고속도로처럼 쭉 뻗은 반듯한 길을 생각하지 말고 구릉이나 개천을 이리저리 피해 생겨난 구불구불한 길을 생각해보자. 여기엔 그 흔한 다리나 굴도 없다. 그래서 인간이 의도한 흔적, 즉 인위(人爲)의 흔적을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사람들이 다니다 보니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 인간의 측량과 설계 등의 인위로서 만들어진 길이 아니다. 산에 올라 저 멀리에 펼쳐진 구불구불한 길을 유심히 살펴보자. 그러면 이 길이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기까지 이르는 노력을 가장 절묘하게 조합해서 생겨난 이상적인 길임을 알 수 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도 바로 이러하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가 지닌 힘이다! 동아시아 사상의 최고 가치인 도(道)의 개념은 여기서 비롯된다. 이런 개념 설정은 무언가를 깨달으면 새롭게 만든 이름을 붙이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신,진리,창조주와 같은 개념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이런 개념들은 세상에 없는 것을 있는 것인 양 착각하게 한다. 이것이 인위에 입각한 언어구성이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 위인들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가장 쉬운 경험 중 하나인 걸어 다니는 길에서 따왔다. 이것이 무위에 입각한 언어구성이다. 이에 장자는‘길은 사람들이 다니다 보니 생겨나며(道行之而成)’‘사물은 이름을 붙이다 보니 그 이름이 된다(物謂之而然)’고 말한다. 그런데 언어에는 야누스적인 성격이 있다. 언어가 없으면 생각을 오감만으로 전달해야 하기에 당장 불편하다. 언어는 의미를 객관화하고 명료화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언어가 없으면 내 생각을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언어의 이런 기능이 뒷받침되어서이다. 그렇지만 의미를 객관화하고 명료화하는 데만 집착하면 음식물에 조미료를 넣어 맛을 내는 것처럼 의미에 조미료를 쏟아 과잉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 인공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은 음식이 우리 몸을 상하게 하듯 인공조미료를 너무 많이 쏟은 말도 우리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미더운 말은 꾸며 아름답지 않고 꾸민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 선한 사람은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善者不辯 辯者不善).” 우리가 사람을 혹하게 하려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말을 아름답게 꾸민다. 여기서 꾸민 아름다운 말이 소위 과잉기표이다. 과잉기표를 동원한 말치고 미더운 말은 없다. 또 헤어지는 사람의 경우 헤어지는 원인은 용서해도 헤어지면서 뱉었던 말은 상대가 용서할 수 없다. 이처럼 언어는 편리한 수단이지만 공격의 무기로 변하면 재래식 폭탄에서 원자폭탄으로 그 위력이 바뀐다. 잘못된 언어 사용은 이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다. 그러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건가? 이에 대한 답 역시 노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노자는 ‘도덕경’ 시작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연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어떤 대상의 이름이 개념화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가 지시하는 의미는 ‘도가 아니다(기의≠기표)’가 아니라‘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기의≒기표)’이다. 그것은 도라고 말하면 일반적으로는 도를 지시하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비상구(非常口)는 문이지만 ‘늘 그렇지 않은(非常)’ 문인 것처럼 비상도(非常道)도 도이지만 ‘늘 그렇지 않은(非常)’ 도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 이름이긴 하지만 늘 그러한 이름,즉 고정된 이름이 아니다. 그러니 대상에 붙인 이름은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항상 깔고 있어야 한다. 노자는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그것은 유무(有無)가 분리된 게 아니라 공존하고 있어서이다. 노자에 따르면 무는 세상의 시작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래서 무를 통해선 세상의 오묘함을 보고, 유를 통해선 세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본다. 이처럼 유와 무는 같은 데서 나왔지만 이름만 달리할 뿐이다. 그래서 이를 경계가 없이 가물가물한 그윽한 것으로 설명했으며, 노자는 이것을 현(玄)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노자는 유와 무는 서로 경계를 지을 수 없기에 이를 철저히 구분해서 객관화하고 명료화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만약 언어로 이를 구분하려고 하면 대체적인 구분은 이루어지겠지만 유와 무가 혹시 공존하는 부분에 있어선 정확한 구분이 곤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언어상의 구분만으론 전체의 실상을 보여주는데 2%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2%의 부족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바로 노자와 장자가 추구한 바다. 그렇다면 누가 2%의 부족을 무시한 채 세상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심지어 재단하는 오류를 범하는가? 불행히도 서양 근대과학이 이런 오류를 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근대과학은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에 입각해 있는데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이런 서양 근대과학의 정신이 오늘날 대학을 지배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으니 불행의 씨앗은 이미 뿌려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우주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팽창해 가고 있다. 그래서 빅뱅이론도 등장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언젠가는 이 우주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수축하게 될 텐데 이 경우 은하계는 물론이고 태양계조차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물론 이때 인간의 흔적이란 찾아볼 수 없다. 이것도 신의 의지라고 말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이런 사실을 서양 자연과학만으로 풀기엔 너무 어려운 내용과 주제가 아닌가? 그래서 동아시아 전통적 사유가 더욱 절실해진다. 예컨대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유는 인간의 몸을 우주의 축소판으로 생각하여 신체를 통해 우주의 신비를 풀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 지도 자연의 원리, 즉 천도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동아시아 전통적 사유는 사유 대상을 자연과학,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대신 천도(天道),인도(人道),치도(治道)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천도에서 비롯된 바를 인도에서 구현하고 또 인도에서 해결하지 못한 바를 천도에서 찾는다. 마찬가지로 천도에서 치도를 찾고 치도를 통해 인도를 생각한다. 예컨대 우주자연의 원리를 찾는데 부족한 2%를 인간의 신체 원리에서 찾고 또 나라와 가정 또 회사란 조직을 다스리는 기존 원리에서 부족한 2%를 우주자연의 원리에서 찾아 완벽과 완전을 지향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노장사상 전공자 중에선 노장사상을 밤의 철학,또는 은퇴 후에나 생각해 볼 만한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무위(無爲)는 천도, 인도, 치도를 서로 잇는 핵심이다. 무위란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고자 하는 바가 없이 이루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위(有爲)란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 하는 것이다. 유위의 대표적인 것이 인간이 행하는 인위(人爲)이다. 그리고 인위가 지나치면 작위(作爲)로 변한다. 서양이 근대에 유행시켰던 소위 이성의 기획이 그 대표적 작위에 속한다. 조직에서 이성의 기획을 구현하는 기획관리 업무는 노장의 시각에서 볼 때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이런 인위와 작위가 행해질 때 언어가 그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다. 즉 언어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원인의 핵심으로 작용한다. 객관화와 명료화의 명분으로 행해지는 숫자를 통한 조직원들에 대한 각종 평가들,0/1의 조합인 디지털언어의 확대 등이 단적인 예다. 이로 인해 조직이 지닌,또는 인간이 지닌 고유한 자연의 결이 얼마나 많이 또 크게 훼손되는가? 서양 현대 언어철학을 대표하는 비트겐슈타인조차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으로 놔두어야 한다는 선언적 주장을 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이 2%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 통찰력 있는 주장이지만 선언에서 그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침묵으로 놔두어야 하는 것을 혹시라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해서이다. 이에 반해 노자와 장자는 실마리를 넘어 방법론까지 제시한 사상가이다. 언어의 한계를 정확히 짚어냄으로써 방법론까지 제시할 수 있었다. 거기에 천도-인도-치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유도 이들에겐 큰 힘이 되었다. 노자와 장자의 텍스트를 보면 천도, 인도, 치도를 체계적으로 구분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이 통합적으로 연결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노자와 장자 텍스트의 또 다른 경쟁력이며, 서양 근대과학으로 풀 수 없는 부족분을 메워줄 동아시아의 ‘황금열쇠’이다
    Munhwa ☜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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