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1 왜 장자인가

浮萍草 2015. 6. 11. 06:00
    창의성 부족한 한국사회… ‘거닐며 놀아라’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진(秦)나라가 아니라 제(齊)나라였다면 그 후 중국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런 가정하에 쓴 책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마감하여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세운 인물은 진시황 즉 진(秦)나라 첫 번째(始) 황제(皇)   이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제나라가 진나라를 제치고 통일을 달성했다면 최초의 황제는 제시황(齊始皇)이 되었을 것   이다.   이런 상상이 나름 의미를 지니는 것은 진나라가 군사국가인 반면 제나라는 문화국가여서이다.   고대 그리스에다 비유하면 제나라는 아테네쯤에, 진나라는 스파르타쯤에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에선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무너뜨렸지만 고대 중국에선 진나라가 제나라를 멸함으로써 문화국가   대신 군사군가가 중국을 처음 통일한 것이다.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런데 진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상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춘추전국시대엔 백가쟁명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수많은 제자들과 백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공자와 맹자의 유가, 노자와 장자의 도가, 한비자의 법가, 손자의 병가 등이 그것이다. 진나라와 제나라가 선택한 것은 이 중에서 중상주의와 법치주의로 대표되는 실용주의이다. 두 나라는 이런 실용주의 사상을 채택했기에 마지막까지 패권을 두고 다툴 수 있었다. 물론 두 나라 실용주의 노선에 있어선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진나라가 ‘냉혹한’ 실용주의를, 제나라가 ‘뜨거운’ 실용주의를 운용했다는 점이다. 진나라 실용주의는 대표적 법가인 상앙(商앙)에 의해, 제나라 실용주의는 재상 관중(管仲)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같은 실용주의일지라도 진나라의 냉혹한 것이 제나라의 뜨거운 것을 이겼다. 물론 진나라도 얼마 가지 않아 곧 망하고 말았으니 실용주의 그 자체에 어떤 한계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달성하는데 실용주의 만한 게 없다. 특히 물질적 번영과 관련해선 실용주의는 높은 효율성을 자랑한다. 우리도 지난 반세기에 걸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실용주의를 잘 운용한 탓으로 본다. 문제는 이런 목표가 달성된 이후이다. 실용주의에 입각한 물질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갈수록 외면한다. 대신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생산과 소비의 관점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제나라가 향락과 부패로 망한 것도 또 진나라가 뒤이어 쉽게 무너진 것도 이런 이유였다고 본다. 이처럼 실용주의 노선만을 고집하다 무너진 제·진 두 나라의 운명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라를 운용하는 사상은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맞게끔 항상 바뀌어야 할 것이다. 진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가 유가를 국가의 본으로 삼은 것도, 조선이 국가이념으로 유학을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유가 만한 사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문화혁명 때 유학을 그토록 탄압했던 중국공산당 현 정부마저 지금은 정권의 명분으로서 유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유가는 공자가 살아 있을 당시엔 빛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망정 제자백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중국사상사의 영원한 승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는 유가를 앞세울 순 없다. 작금의 현실을 처방하고 치료하기엔 그 약효가 너무 떨어져서이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불필요한 소프트웨어와 바이러스가 너무 많이 들어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어서이다. 언젠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와 화제가 된 것도 이런 탓으로 본다. 그런데 공자로 대표되는 원시유가는 바이러스에 거의 오염되지 않았다. 바이러스에 오염돼 제대로 작동 못 하는 유가는 진리추구를 넘어 권력 헤게모니 싸움의 도구로 변질된 조선의 주자학이다. 게다가 그 주자학은 반대편 유학인 양명학을 반체제 학문쯤으로 여겨 일체의 논의를 금지시켜 박제화된 주자학이다. 그 결과 조선사회에선 사상적 균형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 ‘조선의 주자학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게 보다 객관적인 표현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를 모색하기에 앞서 지금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현재의 공간이 어떠한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우울함은 객관적 지표로도 잘 나타난다.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지 이미 오래다. 자살률과 이혼율도 세계 최고를 기록한다. 출산율·자살률·이혼율의 이런 지표들은 삶이 행복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일하는 환경은 또 어떠한가? 선진국과 비교할 때 노동시간은 가장 길뿐 아니라 비정규직 비율마저 최고 수준이다. 피로사회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래는 희망적일까? 물론 아니다. 독서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저인 데 반해 학습시간은 최고이다. 이런 식의 지식추구로는 다음 세대에게도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순 없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혹시 이성의 기획과 관리가 만들어낸 비극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성의 철저한 기획과 관리하에서 성공적인 압축성장을 이루어냈다. 과거 개발연대 시대엔 분명 그럴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외면의 성장’을 ‘내면의 성숙’으로 바꿔야 할 시기이다. 그래야만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했음에도 짧은 운명으로 끝나고만 진나라의 운명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외면의 성장이 과제였던 과거가 100m를 달리는 스프린터였다면 내면의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지금은 42.195㎞를 달리는 마라토너인 셈이다. 그럼에도 42.195㎞ 긴 거리를 100m 뛰듯 하면 부작용만 쌓일 것이다. 그 부작용이 지금 객관적 지표로 잘 대변되는 우리들의 암울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제 삶의 방식, 보다 구체적으로 삶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과거와는 다른 획기적인 변화, 즉 패러다임 전환과 같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봄 직하지 않은가. 과거에 비실용적이라고 치부해 왔던 사고방식이 지금은 오히려 더 실용적일 수 있지 않을까? 또 과거에 비합리적이라고 믿어왔던 가치관이 지금은 오히려 더 합리적일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실용적이라고 여겨 왔던 사고방식이 앞으론 덜 실용적이지 않을까? 또 지금까지 합리적이라고 믿어왔던 가치관이 앞으론 덜 합리적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동안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주류사상으로부터 멀리 내팽개쳐 왔던 노장사상, 그중에서도 장자사상을 새롭게 들추어서 만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장자사상인가? 그것은 필자에겐 장자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인 유(遊) 개념 때문이다. 총 31장으로 구성된 장자서 첫 장 제목도 소요유(逍遙遊)이다. 소요유란 소요(逍遙)를 통해 유(遊), 즉 유유자적하며 노닌다는 것이다. 소요는 방법이고, 유는 목표인 셈이다. 장자는 방황(彷徨)을 통해 유유자적하며 노닒까지도 언급한다. 방황은 거닐면서 노닌다는 뜻이기에 소요의 의미와는 큰 차이가 없다. 중국의 시선으로 불리는 이백도 어느 시에선가 낭만유(浪漫遊)라는 개념을 언급한 바 있다. 로맨틱(romantic)을 낭만으로 잘못한 번역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장자의 유유자적하며 노닌다는 유(遊)는 공자의 인(仁),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노자의 도(道)와 덕(德)과는 너무나 비교되지 않는가. 이들 개념에 비해 자유롭고,평화롭고,또 편안해서이다. 이런 여유로움을 가질 때 비로소 창의적이고,창조적인 마인드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뭔가 바쁘고, 허둥대면 살기에 급급해서인지 창의적이고,창조적인 생각을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마음마저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이라도 되면 더욱 그러한데 지금 이 사회가 우리들을 이런 식으로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결과의 효율성을 위해 경쟁을 부추기는 경쟁사회,삶의 가치가 시장논리에 종속된 시장중심사회,상식적 사유보다 신비로운 권위에 의지하는 신앙사회가 그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마인드를 기대하는 건 난망이다. 한마디로 여유로움이 없어서이다. 물론 경쟁,시장적 사고,종교적 믿음도 창의와 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순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더 심각한 문제를 잉태한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지배되는‘정글자본주의’,진지한 성찰 대신 대중문화와 맹목적인 믿음에 함몰된 ‘환각사회’ 등이 그것이다. 이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아니 제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일(work)이 아니라 유희(play)를 추구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게 최고가 아니라 즐기면서 하는 유희가 최선의 노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목표를 정해 놓고 일정 시간 내에 최대 생산량을 달성해야 하는 산업시대와는 다른 차원의 노동력을 지금 필요로 한다. 현 정부의 창조경제란 구호도 이런 이유에서 등장한 것으로 본다. 엄격함과 정밀함 등으로 구속받는 상황에서 벗어나 장자의 대붕(大鵬)처럼 훨훨 하고 자유롭고 여유롭게 멀리 날아갈 필요가 있다. 운동선수도 일이 아니라 플레이를 해야만 그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지 않은가. 스티브 잡스로 대표되는 오늘날 창조경제의 선구자들은 일이 아니라 분명 플레이를 했다. 참고로 잡스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한 공학도 이전에 그것과 함께 플레이하려고 했던 인문학도였다. 장자사상은 이런 것들을 구현하기 위해선 그야말로 ‘딱 좋은 사상’이다. 물론 독자들은 장자사상에 대해 낯설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장자사상은 우리들이 모르는 가운에 이미 생활 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익히 알려진 조삼모사 우화, 우물 안 개구리, 나비의 꿈(호접몽), 대붕의 비상 등이 모두 장자서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또 천주교의 추기경(樞機卿)도 제물론 도추(道樞)에서 나온 말이다. 또 기독교의 독(督)도 양생주의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즉‘순리에 따라 이루어진 중앙의 자연스러운 균형을 원칙으로 삼다’에서 비롯된다고 보인다. 원불교 창시자를 일컫는 대종사(大宗師)도‘장자’ 대종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대붕의 비상처럼 장자를 향해서 높이 날아가도록 하자.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서!
    ㆍ김정탁
    △ 1954년생 △ 1985년∼현재 성균관대 사회과학대 교수(소통학) △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미주리대 언론학 박사 △ 중앙일보 기자, 한국언론학회 회장 △ 禮와 藝:한국인의 의사소통사상을 찾아서, 玄:노장의 커뮤니케이션(저서)

    Munhwa ☜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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