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장자 이야기

6 메타포의 보고 ‘장자’

浮萍草 2015. 10. 29. 10:09
    ‘鯤이 大鵬으로’ 장자, 자유의 메타포… ‘승자·패자 없다’ 링컨, 통합의 메시지
    일러스트=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장자』는 『논어』 『맹자』 『도덕경』 등과 더불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서 중 하나다. 그렇지만 문학서로서는 ‘그중 하나’가 아니라 최고다. 그만큼 뛰어난 문학성을 자랑한다. 문학성은 좋은 메타포를 얼마나 많이 동원하느냐 여부에 있다. 알리는 자신의 권투를 가리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표현이 나온 지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이보다 더 간결하고 가슴에 와 닿는 메타포는 없다. 이 메타포로 인해 알리는 명예 문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장자』는 이런 메타포의 보고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호랑나비의 꿈’ ‘조삼모사’ ‘우물 안 개구리’ 등이다. 장자서 시작부인 ‘대붕의 비상(飛翔)’도 이런 메타포로 시작한다. 이 짧은 글에 많은 메타포가 동원된다는 사실은 메타포 상실로 인해 불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북쪽 바다(北冥)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산다. 그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크다. 그런데 곤이 변해 붕(鵬)이란 새가 된다. 붕의 길이도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길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그것으로 남쪽 바다(南冥)로 날아간다. 남쪽 바다가 곧 하늘의 연못(天池)이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좀체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다. 동원한 메타포가 상식을 크게 뛰어넘기 때문이다. 첫째, 물고기와 새를 왜 글의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하는 점이다. 『주역』에 따르면 ‘잠룡은 물용(勿用)’이므로 물속의 곤도 가능태일 뿐 완성태가 아니다. 한 존재로서 완성태가 되려면 물속에서 나와 하늘을 날아야 한다. 이 때문에 물에 얽매였던 물고기 곤은 존재의 변형을 통해 하늘을 훨훨 나는 자유로운 새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존재의 변형을 이루지 못하면 희로애락의 감정 등으로 찌든 부자연스러운 물속에서 평생 살아가야 하지만 존재의 변형을 이루면 비상함으로써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다. 따라서 장자는 부자유스러운 삶과 자유로운 삶의 대비를 위해 물고기와 새라는 메타포를 사용한 것이다. 둘째, 물고기가 새로 왜 변화해야(化)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 점은 사물은 고정된 게 아니라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동아시아 전통적 사유의 반영이라고 본다. 목·화·토·금·수의 변화와 관계로 세상의 원리를 파악하는 오행설이 단적인 예다. 그래서 사물이 항상 변화한다는 동아시아 사유 방식을 빌려 물고기가 새로 변한다고 무리하게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변화함은 영어의 ‘becoming’이다. ‘ becoming’의 반대는 ‘being’이다. ‘being’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고정된 의미를 지닌 존재(存在)다. 존재론을 중심으로 서구 철학이 발전해 왔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처럼 ‘becoming’과 ‘being’은 동아시아 사상과 서구 사상을 구분하는 분기점이다. 따라서 장자는 동아시아적 사유를 강조하기 위해 물고기가 새로 변한다는 메타포를 동원했다고 보인다. 셋째, 물고기가 새로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앞서 제시한 글에선 ‘어떻게’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장자가 자신의 글이 결코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고 증거로 제시한『제해(齊諧)』에선 ‘어떻게’가 설명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물고기 곤이 새 붕으로 변하는 계기는 회오리바람 탓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물고기가 새로 변하는 원인으로 왜 바람(風)을 들었던 걸까? 아마도 바람을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장사상의 키워드 중 하나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인 점을 감안하면 장자도 이런 변화조차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분명 고민했을 것이다. 따라서 바람은 자연스러움의 메타포에 해당한다. 앞으로 전개될 「제물론」도 바람이 모티브가 되면서 펼쳐지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넷째, 물고기 곤을 왜 이렇게 크게 설정했을까 하는 점이다. 커도 보통 큰 게 아니다. 몇 천 리나 되는 크기니 10리를 4㎞로 가정해도 400㎞가 넘는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다. 이런 크기의 물고기는 현실에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장자는 왜 이렇게 큰 물고기를 설정한 것일까? 아마도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 내는 마음의 무게가 엄청나게 무겁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자가 보기에 희로애락 등의 온갖 감정 변화를 통해 우리 마음에 쌓이는 짐의 무게가 수백 ㎞에 달하는 물고기의 무게보다 훨씬 무겁다. 그래서 큰 물고기는 기회가 되면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인간은 마음에 쌓인 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좀처럼 날 수 없음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물고기 곤의 엄청난 크기는 우리 마음의 짐을 상징하는 메타포인 셈이다. 다섯째, 새 붕이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는 표현을 왜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 표현이 군더더기로 보여서다. 큰 새가 하늘을 날면 날개는 당연히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그럼에도 이 표현을 한 것은 각론이 아니라 개론을,기학(器學) 내지 과학이 아니라 도학(道學)을 펼치겠다는 장자의 의지 표명으로 보인다. 각론과 기학은 펼치려는 내용이 좁지만 객관적이고 명료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반면 개론과 도학은 펼치려는 내용이 넓은 대신 주관적이고 추상적으로 접근할 따름 이다. 그러니 높이 날아 하늘에 드리운 구름처럼 된 새의 날개가 바다에 그림자를 만들면 희미하지만 넓게 퍼질 것이다. 이것은 장자가 도학을 하겠다는 메타포에 해당한다. 반면 낮게 날 경우 새의 날개 그림자는 분명 또렷하게 드러나는 대신 넓게 퍼지지는 못할 것이다. 여섯째, 새 붕이 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동쪽에서 서쪽, 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것에 익숙해 있다. 해 뜨는 곳이 동쪽이고, 해 지는 곳이 서쪽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장자는 왜 새 붕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도록 했을까? 아마도 북쪽은 겨울처럼 모든 존재의 시작을 의미하고,남쪽은 그 반대의 의미를 지녀서다. 이런 사실은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마찬가지다. 그러니 남쪽으로 날아감은 완성된 존재로서의 꿈을 펼친다는 메타포에 해당한다. 옥편에 ‘도남(圖南)’이란 말이 나오는데 직역하면 ‘남쪽을 그리다’이지만 의역하면 ‘큰 꿈을 펼치다’는 의미다. 통영시 남쪽에 해양리조트로 유명한 도남관광단지가 있다. 통영이 한반도 남쪽 끝 바닷가에 위치하고 또 그 통영의 남단이므로 도남동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남쪽 바다가 왜 하늘의 연못, 즉 천지(天池)일까 하는 점이다. 하늘의 연못은 하늘의 곳간인 천부(天府)쯤에 해당한다. 하늘의 곳간은 아무리 부어도 넘치지 않고,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사실 남쪽은 북쪽과 달리 모든 게 풍성하고 여유롭지 않은가? 인간 세상을 이끄는 정부(政府)도 이렇게 되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세수가 부족해서 쥐어짜는 일이 없을뿐더러 세수가 넘쳐서 흥청망청 예산을 집행하는 일도 없어서다. 그런데 천부는 정부와 달리 물질을 집행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집행하는 곳이다. 그래서 무언가 가득 차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빈 상태로 있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아무리 부어도 넘치지 않고, 또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 천지는 이런 빈 마음, 즉 허심(虛心)의 메타포인 셈이다. 지난여름 강정호 선수가 활약하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야구를 보고 오던 중 게티즈버그를 지나게 되어 그곳을 방문했다. 게티즈버그는 남북전쟁 시 가장 극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3일 동안 전투에서 1만8000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포함해 무려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이 무기로 사용된 이후 가장 참혹했던 전투로 기록된다. 또 전쟁 초의 예상과 달리 계속 밀리던 북군이 처음으로 승기를 잡은 전투다. 그러니 이 전투의 승전보는 링컨에게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진 소낙비와 같다. 그렇지만 링컨은 이곳에 그 흔한 전승비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여기에는 북군도 남군도 없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면서 모든 전사자들을 위한 국립묘지를 조성했다. 이 점이 링컨의 위대한 점이다. 링컨은 다른 지도자와 달리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숙지하고 있었다. 남쪽이 연방으로부터 탈퇴하면서 전쟁이 벌어졌기에 승리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이끄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다. 훌륭한 군인은 전쟁에서 이기면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훌륭한 정치인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에 더해 전쟁 후의 일까지 내다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에서도 잘 표현된다. 그렇지만 게티즈버그 연설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그가 사용한 수준 높은 메타포들 덕분이다. 이 메타포들은 승자든 패자든, 북쪽이든 남쪽이든 심지어 죽은 자든 산 자든 간에 모두를 감동시켰다. “ 세계는 여기서 쓰러진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싸웠던 그들이 지금까지 숭고하게 진전시켜 온 이 미완의 작업에 몸을 바쳐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살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그 위대한 과업이란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여기서 슬기롭게 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남겨진 그 위대한 과업이란 ‘이 나라’는 신의 보살핌 아래에서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가져야만 하고 그리고 인민 없이 존재할 수 없는(of the people), 인민의 여망과 함께하는(by the people),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for the people) ‘이 정부’는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Munhwa ☜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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