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1 :낭만적 테러리스트 김원봉

浮萍草 2015. 8. 22. 10:40
    일왕 생일날에 일장기를 처박고 보통학교를 자퇴한 13세 소년
    ▲  약산 김원봉의 사진이다. 해방 후 촬영한 것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그 말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暗殺)’을 관람한 직후입니다. 암살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지요. 김원봉(金元鳳·1898~1958)인데 그가 주인공들 못지않게 주목받은 것은 조승우라는 걸출한 배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타짜’ 1편에서 명연기를 보인 그가 김원봉 역할로 깜짝 출연하면서 인터넷 공간에서 때아닌 김원봉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잠깐 등장했지만 김원봉의 삶은 굴곡이 많았습니다. 무장투쟁의 선봉이자 사회주의에 경도(傾倒)돼 해방 후 북한으로 자진월북해 장관을 두차례 지내고 최고 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이런 경력 때문에 그를 보는 시각이 엇갈립니다. 젊은이들은 “일본을 총칼로 혼냈다”고 환호할 수 있겠지만 해방 전후의 혼란상을 목도한 연령층에서는 ‘김원봉=빨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며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제가 김원봉의 61년 삶을 짚어보니 그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첫째 그는 해외독립투사 가운데 가장 강력한 테러리즘을 구사했다. 둘째 그의 삶의 전성기는 20대로, 의열단과 함께 한 시기였다. 셋째 그의 인생은 정당(政黨)을 구성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넷째 그는 분명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물들어있는 인사였다. 다섯째 그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조국 독립의 방편이었지 진정한 ‘빨갱이’는 아니었다는 반론의 여지는 있다. 여섯째 그를 몰락시킨 것은 중국공산당과 북한 김일성과 해방 후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친 일본 경찰 출신과 미군정이었다. 일곱째 그의 6·25때 행적은 정확히 밝혀지지않고 있지만 조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김일성 일파의 구성원 이었음을 부인할 수없다. 여덟째 그의 사인(死因)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처형설-은퇴설-자살설이 있지만 처형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아홉째 김구선생과 그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백범은 항상 그를 포용했습니다. 열번째 그의 두번에 걸친 사랑은 또다른 소설 한편이 될만큼 극적이었습니다.
    ▲  김구선생은 김원봉과 라이벌 관계였으나 그를 포용했다

    그렇다면 그의 생애를 추적해볼까요? 김원봉에게는 별명이 많았습니다. 항상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름을 상황에 따라 썼는데 개중에는 다음과 같은 중국식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김약산(金若山)·최림(崔林)·진국빈(陣國斌)·이충(李沖)·김세량(金世樑)-왕세덕(王世德)·암일(岩一)·왕석(王石)·운봉(雲峰)·김국빈(金國斌)·진충(陣沖)·김약삼(金若三) 으로 불린 그는 김해 김씨 73세 참판공파 42세손으로 1898년 8월13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원봉의 할아버지는 역관(譯官)출신이고 아버지는 30여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중농(中農)이었습니다. 13살 때 김원봉의 조국은 사라졌습니다. 1910년 8월29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김원봉은 필생의 투쟁 파트너였던 친구 윤세주(尹世胄)와 함께 울면서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김원봉은 한식교육과 신식교육을 두루 받았습니다. 8세 때 서당에 다니다 11세 때 밀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는데 1911년 4월29일 일왕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때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아버린 뒤 김원봉과 윤세주는 학교를 자퇴합니다. 김원봉은 이후 밀양 읍내 동화(同和)중학 2학년에 편입했는데 원래 보통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허용되지않던 편입이 예외적으로 허락된 것은 그의 애국적인 행동이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그 학교에 유명한 교장이 있었습니다. 동화중학 전홍표(全鴻杓) 교장으로,그는 학생들에게 늘“우리가 목숨이 붙어있는한 일본과의 투쟁을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힘입어 김원봉과 윤세주는‘연무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체력단련에 힘썼다고 합니다. 뒷산을 오르내리고 한겨울에도 냉수욕을 하는가하면 공을 가지고 모래밭 뛰어다녔으며 씨름을 했는데 이것은 머지않아 그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체력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김원봉은 세계위인전과 한국 역사-지리와 중국 병법책도 즐겨 읽었습니다. 전홍표 교장의 발언과 연무단의 존재가 일제 경찰 정보망에 포착되면서 동화중학은 폐쇄됐습니다. 학교에 나가지 못하게 된 김원봉은 고향 밀양의 표충사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사명대사의 충혼이 살아있는 곳이며 고려시대 때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낸 그는 서울로 갑니다. 15세때 서울 중앙학교 2학년에 편입했는데 김원봉은 웅변으로 유명해졌습니다. ‘ 그의 서울행은 고모부 황상규(黃尙奎)의 조언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황상규는 훗날 김원봉이 의열단을 만드는데 버팀목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 집성학교를 졸업 후 창신학교와 밀양 고명학교를 설립했으며 대한광복회를 창설해 의군부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1931년 사망했습니다. 중앙학교에서 김원봉은 약산(若山)이런 호를 얻는데 이것은 ‘산처럼 우뚝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훗날 중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 친구 김두전은 물처럼 넓게 살라는 뜻에서 약수(若水), 이명건은 별처럼 되라고 여성(如星)이란 호를 얻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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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관리에 폭탄을 던진 뒤 자기 목을 칼로 찌른 의열단원
    1916년 10월, 김원봉은 중앙학교를 그만두고 중국 천진(天津)의 덕화(德華)학당에 입학합니다. 중국에선 독일을 ‘덕국(德國)’으로 표기합니다. 즉 이 학교는 독일계 학교인데 김원봉이 덕화학당에 입학한 이유는 군사학을 배워야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독일을 흠모해 중국에 간 뒤 1917년에는 단동에서 ‘청산리 대첩’의 명장 김좌진 장군 등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덕화학당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폐쇄되고 말아 김원봉의 뜻은 좌절됩니다. 김원봉은 1918년 9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친구 김약수-이여성과 함께 중국으로 갑니다. 남경(南京) 금릉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려는 즈음,1차 대전이 끝나고 저 유명한 윌슨 미국대통령이 종전(終戰) 14개조 평화원칙,우리가 흔히 민족자결주의로 알고 있는 윌슨 독트린이 선포됐습니다. 알다시피 당시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했는데 김원봉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사활이 걸린 큰 문제를 외국인에게 호소해 그들의 결정을 기다리나는 것은 결코 할 일이 아니다’고 생각했지요. 놀랍게도 김원봉은 이런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는데 그것은 조선의 현실을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 대표를 암살하려는 자객(刺客)이었습니다. 그 역할을 김원봉은 4년전 국내에서 무전여행할 때 부산에서 만난 김철성이란 인물에게 맡겼습니다. 김철성은 중국으로 건너와 오송동제대학에 다니며 김일(金一)이란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지요. 권총과 여권을 구해 파리로 가 거사하기전 김철봉은 놀라고 맙니다. 권총과 실탄이 사라진건데 당시 이런 짓을 한 사람은 동료였다고 합니다. 김원봉은 1920년 중국 길림의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합니다. 이 학교는 이시영(李始榮·초대 건국부통령) 형제가 만주 유하현에 세운 학교로 그해 8월까지 2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곳입니다. 거기서 김원봉은 무장투쟁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써 김원봉의 독립투쟁노선은 폭렬(爆烈)투쟁론으로 굳어집니다. 마침 봉천(奉天)에서 고모부 황상규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원봉은 이종암-이성우-서상락-강세우-김옥–한봉인-한봉근-신철휴 등 여덟 동지를 규합해 의열단을 만듭니다. 김원봉은 잠시 신흥무관학교에 석달간 다니는데 이것은 군인이 되기위해서가 아니라 폭탄제조법-총기류 취급법을 3개월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의열단은 머지않아 일제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이시영 형제. 만주로 떠난 이들 6형제중 살아서 광복을 맞은 이는 가운데 이시영 건국 부통령뿐이다.

    일본 외무대신이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하고 소요 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하겠다고 공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조선공산당은 1926년 소련(蘇聯)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에 제출한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중국에서 행하는) 민족혁명전선에서 직접 투쟁하는 단체는 의열단-신민부-통의부 밖에 없다.” 의열단이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 됐는지 웃지못할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좀도독들이 의열단을 자처하는가하면 경찰이 범인을 취조하다“나는 의열단”이란 말에 놀라 도망쳤다는 신문 보도도 있었습니다.
    ▲  김구 선생이 이끈 애국단도 의열단 못지않은 투쟁을 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장개석은 중국군 30만명도 못한 일을 했다고 감탄했다.

    의열단이 출범한 것은 1919년 11월10일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집에서였습니다. 그들은 구축왜노(驅逐倭奴-일본놈을 몰아내자),광복조국, 타파계급,평균지권(地權)을 내세우며 정의의 의(義),맹렬의 열(烈)에서 의열단이란 이름을 지었지요. 창단식에는 총 13명이 참가했는데 김원봉은 지도자로 지목됐지요. 특이한 것은 지도자의 명칭이 맏형이라는 뜻인 의백(義伯)이란 사실입니다. 이것은 의열단이 반(半) 혈연적인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중국 공산당의 발자취를 취재한 에드거 스노의 아내로 ‘아리랑’이란 책을 쓴 님 웨일즈(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는 의열단원을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라 부르며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일제경찰이 의열단에 대해 남긴 보고서도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도 치밀하여 오안부적(傲岸不適-어떤 상황에도 굴하지않음)의 기백을 가졌고 행동도 극히 경묘(輕妙)하여 신출 귀몰한 특기를 가졌다.” 김원봉은 중국 상해 영창리 190호에 살면서도 단원들에게조차 현 주소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영창리외에 5개소를 전전하며 잠을 잤는데 항상 일요일 오후면 상해 교외에 있는 사격장에서 권총 사격연습을 했다고합니다. 의열단은 먼저 조선총독부 폭파를 시도하지요. 곽재기-이성유-신철휴-김수득-한봉근-윤세주 등 여섯단원이 1920년 6월16일 인사동의 한 중국집에 모였는데 이 사실이 밀고돼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동아일보에‘조선총독부를 파괴하려는 폭발탄대(爆發彈隊)의 대(大)검거’ ‘암살파괴의 대음모사건’이란 기사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  동아일보에 보도된 김원봉 관련 기사. 김원봉은 일본 경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김원봉은 같은 해 9월 박재혁 단원을 밀양으로 보냅니다. 그는 폭탄 13개와 미제 육혈포(권총) 2정과 탄환 900발을 무사히 들여왔습니다.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古書)수집에 남달리 관심이 많다는걸 알았습니다. 그는 9월14일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한 뒤 서장 면회 요청을 합니다. 서장이 솔깃해 허락하자 그 앞에 고서적 보따리를 풀어놓지요. 정신없이 고서적을 구경하는 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재혁은 그에게 의열단의 전단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는 것이다.” 하시모토는 아마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사이도 없이 박재혁은 그의 면전(面前)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하시모토는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하고 말았지요.
    ▲  독립투사들은 중국인의 복장을 착용했다.

    중상을 당해 체포된 박재혁은 사형이 확정된 후 단식을 시작해 9일만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1921년 5월27일 대구형무소에서 일어난 순국(殉國)이었지요. 일제가 놀랄 틈도 없이 김원봉은 최수봉 단원을 보내 1920년 12월27일 밀양경찰서장이 경찰들을 모아놓고 훈시할 때를 기해 폭탄을 던지도록 합니다. 최단원은 두번째 폭탄을 던진 뒤 칼로 자기 목을 찔렀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역시 1921년 7월8일 28세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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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의 활동 자금은 어디서 나왔을까?
    ▲  중국 공산당의 농간에 빠져 주력부대를 잃은 김원봉은
    결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사진 가운데줄 위에서 두번째
    가 김원봉이다.
    열단의 다음 목표는 조선총독부로, 김익상 단원을 보낸 겁니다. 김익상은 권총 두자루를 들고 국내에 잠입하는 열차 안에서 곁에 앉은 일본 여자와 이야기도 나누고 아기를 안아주는 등 부부처럼 행세해 경관의 눈을 피했습니다.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한 김익상이 등장합니다. 청사에서 들어서자마자 폭탄을 던진 뒤 김익상은 소란한 틈을 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뒤 일본인 으로 위장해 북경으로 탈출했습니다. 그가 돌아온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5일만인 9월17일이었습니다. 일본경찰은 이듬해 김익상이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될 때 까지 대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이 누군지 몰랐다고 합니다. 체포돼 20년형을 받은 김익상 단원은 일본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출옥했습니다. 그런데 출옥 며칠 뒤 한 일본형사가 물어볼 것이 있다며 데리고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김원봉은 훗날 “20년이나 옥고를 치르고 나왔건만 왜놈들은 그를 그대로 버려둘수 없었던가보오. 김익상 동지는 저 악독한 놈들 손에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 것만 같구료.”라고 말했다지요. 이런 의열단의 활동자금은 어디서 마련한 것일까요? 여기서 김원봉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연관이 나타납니다. 1923년 4월7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일본 외무성 차관에게 보고한 기밀자료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의열단이 소련공산당에게서 자금을 받아 투쟁자금으로 충당했으며 고려공산당 계열과 연계돼있다. 김원봉은 광동 국민당 통보소에 머물며 소련대표와 접촉을 시도했다.” 소련공산당이란 국제공산주의 확산을 노리고 만든 ‘코민테른’을 말합니다. 반면 김원봉은 임시정부와는 거리를 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일정기간 조선을 열강의 위임통치로 두자는 안을 미국에 제안해 임정 요인들을 격분케 만든 일 때문입니다. 당시 임정에선 이승만을 성토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는데 김원봉도 여기 서명했지요. 임정과의 관계에서 유명한 것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과 빚은 갈등인데 이것에서 양측의 입장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도산은 1920년 5월 김원봉에게 “폭탄을 기율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말고 임정에 예속해 실력을 키운 뒤 상당한 때에 크게 일어날 것(大擧)이 어떠냐”고 권합니다. 즉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를 대대적으로 행동하는게 낫다는 충고였지요. 물론 김원봉은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김원봉과 도산이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일본 영사관은 김원봉이 북경에 있다는걸 알고 추적했는데 상해로 도망갈 자금이 없어 곤궁에 처한 김원봉에게 안창호는 손수 돈을 들고와 탈출을 도왔지요. 김원봉이 연관있는 고려공산당은 이동휘가 지도하는 단체였지요. 이동휘는 1920년 5월 레닌에게서 200만 루블을 지원받기로 하고 1차로 40만 루블을 받습니다. 이동휘는 이 돈을 임정 아닌 고려공산당 운영자금으로 쓰다 물의를 빚어 1921년 1월 임정 국무총리를 사임합니다.
    김원봉과 임정의 갈등은 이후 1922년 3월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해에 왔을 때도 빚어집니다. 의열단원 김익상-오성륜-이종암에게 처단 지시를 했지만 실패했는데 임정이“우리는 개입되지않다”고 밝힐뿐 아니라“조선독립은 과격주의로는 달성하기 어렵다”는 해명을 내놓아 동포들의 빈축을 산 것이지요. 의열단의 거사는 1924년 1월5일 김지섭이 도쿄 황궁(皇宮)앞 이중교(二重橋-니주바시)에 세발의 폭탄 터트렸지만 모두 불발한 사건을 끝으로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대신 김원봉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를 찾아 장개석의 입교(入校) 허락을 받고 그해 3월8일 제4기생으로 입교하지요.
    ▲  황포군관학교. 이곳을 나온 김원봉은 동문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김원봉은 1926년 10월5일 졸업한 뒤 본교 교관으로 임명됐습니다. 계급은 국민혁명군 소위였지요.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의 덕을 김원봉은 톡톡히 봅니다. 조선인으로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사람은 200명이나 됩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다니면서 1926년 겨울 의열단을 혁명정당으로 전환하려합니다. 의열단의 거사가 충격효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는 반성 때문이지요. 김원봉은 대신 노동-농민단체의 반합법대중운동의 흥기(興起)를 보며 정당을 꿈꿉니다. 이래서 만든 것이 ‘조선민족혁명당’인데 김원봉은 ‘최고지도자’로 추대되고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출신 11명이 중앙위원을 선임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김원봉의 삶은 중국대륙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갑니다. 즉 장개석의 북벌(北閥)→국공합작→국공합작 결렬→국민당 vs 공산당 내전,공산당 vs일본군 전투라는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된 것입니다. 김원봉은 국민당에 협력하고 때론 공산당을 지원하지만“어느 쪽과도 손을 잡지 않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1930년 4월 북경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열어 제1기(1930년 4월부터 9월) 2기(1930년 10월부터 31년 2월)생을 배출하고 한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사회 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서서히 물들어가고있었습니다.
    ▲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지도다. 만주와 중국 본토와 러시아까지 진출했다.

    김원봉의 마지막 전성기는 1938년 10월10일 조선의용대 창설이지요. 장개석의 지원으로 설립된 이 군사조직은 의용군으로 출범하려했지만 아무리 동맹이라도 자국에서 외국군대가 창설되는 것을 꺼린 중국 때문에 의용대로 격하 됩니다. 그럼에도 중국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조직 가운데 가장 최강의 군사조직이 만들어지자 긴장한 임시정부도 광복군 창군을 서두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지요. 중국공산당이 조선의용대의 주력을 화북(華北)지역으로 차출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만주(120만명)-화북(20만명)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려면 조선의용대가 일본군과 싸워야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많은 조선의용대원들도 국공내전보다 일본군과 싸우길 원했지요. 중국공산당은 김원봉의 합류는 거부합니다. 결국 병력없는 지휘관이 된 김원봉은 고심 끝에 1942년 4월20일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를 결정합니다. 임정은 그간 임정은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배척했지만 군사력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김원봉 입장에서는 임정 말고는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김원봉은 임정에서 군무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이 됐지만 허울 뿐인 것이었으며 실권은 없었습니다. 이후 광복이 돼 김원봉은 2진으로 1945년 12월2일 귀국합니다. 안타깝게도 광복 후 김원봉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  해방 후 귀국한 임정 요인들. 뒷줄 맨 오른쪽이 김원봉이다

    정권은 이승만-김구가 다투고있었지요. 김원봉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고 군사부장으로 취임하지만 미군은 이 조직을 부인합니다. 김원봉은 이후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이 돼 반탁(反託)에서 찬탁(贊託)으로 입장을 바꿉니다. 그 과정에서 전평이라는 노동조직이 일으킨 총파업을 배후에서 지도했다는 혐의로 1947년 3월22일 경찰에 체포됐는데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지요. 일제 때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라는 형사에게 사흘간 갖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것입니다. 김원봉은“내가 조국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며 사흘을 내리 울었다고 합니다. 김원봉이 이런 수모를 당한 배경에는 장택상이 있었습니다. 당시 수도경찰청장을 맡고있던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은 경북 칠곡의 대지주였는데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 처단당한 겁니다. 그때 앙심으로 김원봉을 저주해온 그는 노덕술에게 김원봉을 개-돼지처럼 다룰 것을 지시하지요. 김원봉은 결국 남한을 떠나 1948년 4월9일 가족과 함께 월북합니다. 그는 북행(北行)을 염려하는 이들에게 “북한이 그리 가고싶지 않은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매우 나쁘고 나를 위협해 살 수가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  김원봉과 그의 첫 아내 박차정. 박차정은 일본군과 싸우다 당한 부상으로 광복 1년을 앞두고 사망했다.

    이후 그는 1948년 9월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국가검열상이 됩니다. 군사행정을 전문적으로 관할하는 직책이었지요. 6·25이후인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됐다가 두달후인 7월에 노동상이 되고 1958년 9월9일 조소앙선생 장례식에 조문자 명단에 오른 것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집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국제간첩(장개석의 스파이)으로 몰려 숙청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김원봉은 두번 결혼했습니다. 첫 아내 박차정은 혁명동지로 1939년 일본군과 싸우다 중상을 입고 1944년 사망했지요.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습니다. 김원봉은 박차정의 피묻은 속적삼을 간직하다 밀양에 묻었지요. 두번째 아내는 자신의 비서로 있던 최동선으로 스무살 차이가 났습니다. 여기서 중근-철근 두 아들이 태어나지만 이들 역시 북한으로 간 후 생사를 알 길이 없습니다.
    ▲  아내 박차정의 관 앞에 선 김원봉. 관이 태극기로 쌓여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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