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0 황희와 태평성대의 道

浮萍草 2015. 8. 15. 11:20
    조선시대에 이미 출산휴가-육아휴가를 도입했던 명재상 황희
    애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임진왜란 극복 과정을 다룬 드라마‘징비록(懲毖錄)’이 최근 종영했습니다. 
    8월7일자 조선일보에 이한우 문화부장이 이와 관련해 ‘징비록을 읽고 그 드라마를 보니’라는 칼럼을 썼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앞으로도 조선 초의 하륜(河崙·1347~1416)이나 황희, 중기의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나 이원익,후기의 채제공(蔡濟恭·1720~1799) 등 ‘명재상’으로 
    존경받았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시대를 새롭게 비춘다면 그간 임금 중심의 상투적인 궁정 암투에 식상한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보여줄 수 있을 것
    이다….”
    이 지적은 정확한 것입니다. 제 짧은 식견으로 봐도 하륜-황희-이준경-이원익-채제공 선생은 명재상으로 꼽힐만한 분들입니다. 
    저 역시 훗날 ‘최고 총리는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한 ‘국무총리론(論)’을 염두에 두고 취재를 시작한 바 있었습니다. 
    저는 ‘문갑식의 기인이사’ 2편에서 ‘최고 총리의 모델을 보여준 류성룡’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기사를 쓰게된 계기는 이완구(李完九) 전 총리의 사퇴를 둘러싸고 여러 추문이 보도됐기에 재상의 자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지요.
     
    ▲ (左)황희 선생 기념관 한 켠에 서있는 동상이다. 그는 청백리일뿐 아니라 노련한 경세가요 행정가였다.▲ (右) 황희 정승의 초상화. /조선일보 DB

    류성룡 선생을 취재하던 중 오리 이원익(李元翼) 선생 또한 서애 못지않은 명재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문갑식의 기인이사’10편에서‘이원익이 보여주는 공직자의 도(道)’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기사는 이렇게 시대 흐름과 관련이 있지요. 그런데 류성룡-이원익 선생에 대해 보도하자 장수 황씨 대종회 관계자께서“왜 명재상의 1호격인 황희(黃喜·1363~1452) 선생에 대해서는 취재하지 않는가”라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취재를 시작했는데 그때가 하필 황교안 국무총리 청문회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즉각 보도했다면 황교안 총리와 비교가 됐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우려해 늦추다보니 기사를 쓸 시점을 못찾았는데 광복 70주년을 맞아 역대 대통령 못지않게 중요한 총리는 어떤 재목에,무슨 역할을 수행해야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 것입니다. 황희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남긴 일화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의 불편부당(不偏不黨), 즉 한쪽에 치우치지않고 공평을 기하는 태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제일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말도 옳고 네말도 옳다’입니다. 하루는 황희의 집안에서 종끼리 싸움이 났습니다. 황희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네 말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이걸 전해들은 다른 종은 주인 황희가 상대방을 편드는 줄 알고 변명을 늘어놓았지요. 황희는 이번에도 “네말도 옳다”고 맞장구쳤습니다. 이런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한마디했습니다. “대감께서는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야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이 그렇게 사리가 분명하지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황희는 다시 말했습니다. “맞소, 부인 말씀도 옳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요? 어찌보면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보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세심한 마음씨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릇 한 나라의 정승(政丞)된 사람은 강직한 것도 좋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앞서야겠지요. 실제로 황희는 자기 집 노비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평소“집에서 부리는 노복(奴僕)도 하늘에서 보낸 사람인데 어찌 무리하게 부리겠느냐”고 했으며 사후 (死後)에도 이런 자세를 견지할 것을 후손에게 권하는 유서(遺書)까지 만들었다고 하지요.
    ▲  황희선생은 젊을 때는 불의를 참지못했으나 나이들면서 세상의 어려운 이들을 살피고 관리들의 경솔함이 백성들에게 끼칠 해악을 염려했다.

    황희의 노비에 대한 관대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당대의 명필 이석형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루는 자기 집을 찾은 이석형에게 황희가 자기가 쓴 책의 표지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석형은 몇번 거절하다 정중한 황희의 청에 못이겨 제목을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노비의 자식 하나가 오줌을 싸고 말았습니다. 황희는 노여워하기는커녕 바닥의 오줌을 닦고 아이를 달래 보냈지요. 얼마 후 아이 엄마인 여종이 사색(死色)이 돼 찾아오자 황희는“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불편부당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비단 사람에 그친 것이 아니었는데 여러분도 들은 바 있는 ‘누렁소와 검정소’의 일화가 그것입니다. 어느날 황희가 황해도와 평안도를 암행(暗行)하는데 늙은 농부가 누렁소와 검정소를 데리고 쟁기질을 하고 있었지요. 황희가 말에서 내려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두마리 가운데 누가 더 일을 잘합니까?” 그 말에 농부는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농부는 황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누렁소는 시키는대로 곧잘 일을 하는데 검정소는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듭니다.” 어이가 없어진 황희가 말했습니다. “노인장,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된다고 여기까지 데려오신 겁니까?” 그 말에 노인이 대꾸했습니다. “짐승이라도 비교되는 것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황희가 “소들이 사람 말을 알아듣느냐”고 하자 노인은 말했지요. “저놈들이 설령 아무것도 모른다손치더라도 경솔히 대해서는 안됩니다. 저놈들은 ‘이랴’하면 가고 ‘워’하면 멈추며 ‘이리’하면 오른쪽으로 ‘저리’하면 왼쪽으로 갑니다. 어찌 저놈들이 사람 말을 못알아듣는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일 아까 이야기를 저놈들 근처에서 했더라면 다 들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애써 농사를 도와주는 저놈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이다.” 그제야 황희는 하늘을 보며 크게 반성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미물을 대할 때도 이러해야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소? 노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경박함을 면치 못할 뻔 했소. 앞으로 노인의 말을 약(藥)으로 삼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  황희선생 기념관 주변의 모습이다. 후손들이 유적을 잘 관리해놓았음을 알 수 있다.

    황희는 이렇게 구전(口傳)되는 불편부당만을 실천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희는 버릇없는 아이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한없이 어질고 너그럽게 대했으며 천인(賤人)과 노비와 죄수(罪囚)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그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천첩(賤妾) 소생에 대해“아버지가 양인(良人)일 때는 아버지를 따라 양민이 되어 부역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적서(嫡庶)차별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세종은 그의 주청을 가납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노비에게 출산이 임박한 달과 산후 100일 안에 부역을 시키지 못하도록 이미 입법했거니와 그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니 지금 부역 중인 사람의 처가 출산하면 그 남편은 출산 30일 후에 부역에 종사하게 하라.” 저는 이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것은 이미 당시에 지금 노동법에 규정된‘출산휴가’ 같은 제도가 있었다는 뜻이며,초보적인 ‘육아휴직’의 개념이 정립됐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종을 명군(名君)이라고 하지만 명재상의 뒷받침없는 명군은 없다는 이치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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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서가 꿀단지를 선물하자 황희는..
    ▲  조선 최고 명재상인 황희정승의 모습이
    기념관 앞에 서있다.
    차별받는 자에 대한 배려,약자에 대한 보살핌의 정신은 한발 더나아가 법치주의로 연결됐습니다. 황희는 법에 기초해 나라를 다스려야한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일관성없는 정치인들의 편의대로 정책을 바꾼다면 혼란이 가중돼 백성들의 신뢰를 잃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인들의 독단적인 결정이 빈번해지면 반드시 억울한 백성들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황희는 이런 어록을 남겼습니다. “임금이 백성들로부터 믿음을 얻으면 나라를 다스리기가 쉽고 믿음을 잃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러려면 반드시 법치(法治)를 해야한다. 한번 세워진 법이 고쳐지지않고 유지될 때 비로소 백성은 그 법을 믿고 안심하며 내일을 설계할 수 있게 되어 그제야 임금을 믿고 따르게 된다.” 어떻습니까,오늘날에도 보기 힘든 법치주의 원칙과 정책의 일관성을 주창한 재상이 500여년전에 우리나라에 있었다 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황희는 이런 주장을 말로만 하는데 그치지 않고‘경제속육전’같은 방대한 법전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죄수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된 계기는 집안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황희의 처, 양씨가 어느날 좋은 배(梨) 몇 개를 얻자 남편에게 먹이려고 현판 뒤에 숨겨둔 뒤 친정나들이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 후 황희가 퇴근했지요. 황희가 보니 쥐 한마리가 자꾸 현판 뒤를 들락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쥐는 배가 너무 커 혼자 가져갈 수 없게 되자 다른 쥐 한마리를 데려왔습니다. 뒤에 온 쥐가 배를 안고 드러눕자 다른 쥐가 꼬리를 무는 식으로 배를 전부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친정에서 돌아온 부인 양씨가 배가 없어진 것을 알고 계집종을 의심해 추궁하다 매질을 하기 시작했지요. 어린 여종은 매질에 못이겨 억지자백을 했습니다. ‘매에는 장사없다’는 말 그대로지요. 황희는 이 사실을 뒤늦게 전해듣고 탄식했습니다. 얼마 후 황희는 임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며 다음과 같이 주청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금 국내에는 억울한 형(刑)을 받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자 세종은 오랫동안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억울한 자를 가려내도록 해 많은 수감자가 구제됐지요. 그런데 황희는 이렇게 평생을 온후하게만 지냈을까요? 그의 강단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육진(六鎭)을 개척해‘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린 김종서(金宗瑞) 입니다. 그 공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김종서가 임금의 총애를 업고 거만해졌습니다. 어느날 회의 때 술에 취한 김종서가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이 황희의 눈에 띄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황희는 부하에게 갑자기 명했지요.
    “지금 병판(兵判)이 앉아있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니 의자다리가 잘못된 모양이다. 어서 고치도록 해라.” 아무리 취했지만 김종서도 말에 뼈가 있는 언중유골(言中有骨)이란걸 알았지요. 자세를 바로 고친 김종서는 회의가 끝난 후 황희가 자리를 뜨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육진을 개척할 때 밤중에 화살이 날아들어 책상머리에 꽂혔어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식은 땀이 등을 적셨소이다.” 이 일에 미안해진 김종서가 강원도 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오며 좋은 꿀 한단지를 구해 병졸을 시켜 황희에게 선물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기대했던 김종서에게 돌아온 것은 황희의 대노(大怒)였지요. “이 꿀은 뇌물로 받았거나 공짜로 받은 것이 분명하다. 또 나라의 녹봉을 받는 공인(公人·병졸)을 사사롭게 심부름꾼으로 부리다니!”
    ▲  황희선생 기념관에서 방촌영당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김종서는 여러 판서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혼을 냈습니다. 지켜보던 맹사성(孟思誠·1360~1438)이 궁금해 물었지요. “김종서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이고 공이 추천한 인물인데 왜 그리 구박을 하시는게요?” 황희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김종서는 이 자리(영의정)를 이어받을 인물이요. 하지만 성품이 거만하고 대사를 도모하는데 너무 과격해 앞으로 자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 자만심을 꺾고 모든 일에 경솔하지 말라는 것이지 결코 그가 미워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황희의 예상은 머지않아 적중했지요. 김종서는 훗날 문종이 아들을 보살펴달라는 유언을 하고 세상을 뜨자 수양대군에 맞서지만 참혹한 죽임을 당합니다. 만일 김종서가 황희의 말대로 임했더라면 단종애사 같은 비극은 이뤄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황희는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희는 장수 황씨로,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친은 판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낸 황군서(黃君瑞)였습니다. 어릴 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며 첫 이름은 수노(壽老)였습니다. 이름대로 황희는 구십까지 장수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않은 기운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가 태어난 곳 인근에 개성 송악산 용암(龍巖)폭포가 있는데 황희가 임신된 날부터 물줄기가 끊어져 수개월동안 흐르지않다 그가 태어나자 전처럼 물이 흘렀다지요. 황희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민첩해 한번 보면 곧 기억해 식견있는 이들은 그가 이미 그릇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14세 때 음서제도로 녹안궁 녹사가 됐으며 17세 되던 해인 1379년 판사복시사 최안(崔安)의 딸 정경부인 최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문장학(文章學) 즉 과거시험 준비는 군자(君子)의 능사가 아니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권하자 1383년 생원시, 1385년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섭니다. 1년 뒤 부인 최씨가 죽자 1388년 공조전서 양진의 딸 청주 양씨와 재혼합니다.
    ▲  황희 선생의 업적을 전시해놓은 기념관이다. 한번만 훑어보면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다.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와 친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분이 금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황희가 뒤따르려하자 그는 이렇게 만류했지요. “만약 그대가 나를 따른다면 저 동토(凍土)의 억조창생(億兆蒼生)은 어이하겠는가?” 이설(異說)도 있습니다. 황희는 역성혁명이 일어나던 날 불사이군(不事二君),즉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일흔두명의 현자(賢者)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습니다. 황희 기념관에도 황희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한 72현을 두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것이지요. 훗날 정조는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라는 사당을 세워 그들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의(義)를 지키던 황희는 30세에 산을 나옵니다. 조선 초기 황희는 바른 말을 잘해 파직과 좌천을 거듭했습니다. 1397년 서경(暑經)을 하지않아 파직됐는데 서경이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관리를 임명할 때나 법령을 제정할 때 대간(臺諫)들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서명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1398년에는 민안인이란 관리를 탄핵하다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해 좌천됐지요. 1399년에는 바른 말을 하거나 탄핵하다 두차례나 파직당하기도 했으니 젊은 시절의 황희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상의 균형을 잡는 성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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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 정승 유적지는 한가한데 같은 이름의 옆 장어집은 인산인해
    희는 특히 형제들을 죽이며 왕위에 오른 태종, 즉 이방원에게도 맞섰는데 일례로 1406년 태종이 창덕궁안에 불당(佛堂)을 지으려하자“불당 하나를 짓는 것이 
    비록 폐가 없다고는 하나 후세에 법을 남기는 것이면 옳지 못합니다”라고 반대했습니다. 
    태종이“부처의 도는 허실(虛實)을 알기 힘들다. 
    예전에 권중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관음상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으나 내가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하니 황희는 다시“그렇다면 오도자가 비술(秘術)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찌 부처가 신령하고 기이한 때문이겠습니까”라고 다시 반대했지요.
    오도자란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화가 오도현을 말하는데 불화(佛畵)에 뛰어난 인물이지요. 
    이렇게 척불(斥佛)에 집요했던 황희였지만 꽉 막힌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태종이 1408년 “부왕(이성계)의 병환이 위독하니 부처를 섬기는 것이 비록 비례(非禮)가 되기는 하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을 스스로 제지하지 못해 
    승도를 소집해 정근기도를 행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황희는 선선히 수용합니다. 
    “부모를 위해 병을 구하는 것이니 해로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황희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태종은 황희가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하자 유배시켰지만 아들 세종에게 그를 중용하라며 천거했습니다. 
    그때 황희의 나이 60세, 세종은 26세였는데 자기 즉위에 반대한 인물을 중용한 세종도 대단한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반구정 윗쪽에는 앙지대라는 정자가 있다. 거기서 바라보면 반구정 옆으로 철책선이 쳐져있다.

    ▲  반구정의 원래 이름은 낙하정이었다. 황희를 본땄는지 훗날 한명회는 압구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세종은 황희에게 6진과 4군 개척에 간여토록 하며 외교-문물-제도 정비를 일임했습니다. 황희는 이후 24년간 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사상 유례없이 18년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87세가 되서야 영의정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황희는 사실 청백리(淸白吏)의 표본 같은 인물입니다. 청백리라는 말은 청백탁이(淸白卓異)라는 말에서 나왔지요. 청렴하고 결백함이 뛰어난 이상적인 관리라는 뜻으로 자격은 청백(淸白)-근검(勤儉)-경호(敬孝)-후덕(厚德)-인의(仁義) 다섯가지였습니다. 이런 인물이 존재할까 무척 의심스럽지만 조선 전기에는 청백리를 의정부와 이조에서 후기에는 비변사와 이조에서 선발했는데 2품이상 관리가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두명씩 추천하면 이를 6조판서가 심사한 뒤 왕의 재가를 받아 확정하는 식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명단은 전고대방(典故大方)이라는 책자에 실려있는데 모두 218명이었습니다. 경종-정조-순조 때가 제외된 청선고(淸選考)라는 책에 186명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체를 통틀어 200여명 정도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머물렀던 반구정. 6.25 때 불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청백리 황희와 관련된 이야기는 관복에 관한 것이지요.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 퇴궐한 황희는 부인에게 옷을 빨아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당시 황희의 겨울옷은 한벌 뿐이었지요. 속옷차림으로 책을 읽던 그날밤 임금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황희는 바지저고리를 빨기 위해 뜯어놓은 솜을 얼기설기 실로 꿰매입고 그 위에 관복을 걸친 채 입궐했습니다. 여러 신하들과 함께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어떻게 물리칠까를 논의하던 세종의 눈에 황희의 관복 밑으로 삐죽 솟아나온 하얀 털이 보였습니다. 속으로 그것을 양털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의아해했지요. ‘그것 참 이상하도다.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소문난 황정승이 양털옷을 입다니….’ 회의가 끝나자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세종은 황희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오늘은 양털옷을 입으신 겁니까?” 당황한 황희가 이실직고하자 세종은 “어찌 단벌로 겨울을 날 수 있겠느냐”며 옷을 지을 비단 열필을 그 자리에서 하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성무 선생이 지은 ‘방촌평전’을 보면 황희의 청백리적인 부분은 나오지않습니다.
    ▲  앙지대의 중앙부분에 있는 문양이다.한국적인 아름다움은 이렇게 보이지않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이 선생은 황희를 조선의 기틀을 다진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가로 표현했는데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간혹 뇌물을 받거나 인사에 압력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해 당혹스러웠지요.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런 부분이 황희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 24년간 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 진짜 그렇게 먼지 한톨 나올 수 없이 깨끗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놀랍지 않을까요? 차라리 황희야말로 청백리의 표상으로 떠받들어지기 보다는 젊은 왕(세종)을 잘 보필한 노련한 행정가로 보는게 더 정확할 듯 싶습니다. 황희 선생의 유적은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가다보면 장어집으로 유명한 ‘반구정’ 바로 옆에 있습니다. 반구정(伴鷗亭), 즉 갈매기를 벗삼아 지낸다는 뜻의 이 정자는 원래 이름이 임진강 기슭 낙하진에서 가깝다고 해 낙하정(洛河亭)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보는 이 정자는 6·25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7년 그 후손들이 복원한 것입니다. 황희 선생 유적지에는 반구정과 앙지대(仰止臺)외에 방촌영당과 동상이 있으며 묘소는 기념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  방촌영당은 황희 선생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황희 선생의 기념물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는 황희가 1419년 선조 황감평이 지었던 서실(書室)을 헐고 지은 광통루(廣通樓)에서 시작된 건물이지요. 그런가하면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은 1518년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워진 것으로 훗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북 진안의 화산서원에는 황희 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가까운 전북 장수의 창계서원에서도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있지요. 한가지 아쉬운 것은 같은 이름을 가진 장어집에는 인파가 몰리는데 정작 황희 선생의 유적지는 한산하다는 사실입니다. 장어굽는 일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번 주말에는 우리 역사 최고의 명재상 가운데 한분인 황희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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