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19:해군창시자 손원일과 인사동

浮萍草 2015. 8. 8. 11:13
    이승만 대통령이 '육해공'을 '해육공'으로 바꿔부른 이유
    는 오늘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100일’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추적하고자 합니다. 
    섭씨 30도가 넘은 무더웠던 지난 주말 그 루트를 답사했습니다. 
    시간여행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5년 8월16일입니다. 
    광복 바로 다음 날이었지요. 
    그날 중국 봉천(奉天)에서 한 젊은이가 귀국합니다. 
    그는 조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무조건 기차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곤 기차에 올라 24시간을 넘게 달려왔습니다. 
    36년 만에 자유를 찾은 조국에서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은 경성역, 지금의 서울역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945년 8월21일,당시 서른여섯 된 손원일(孫元一)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안동교회로 갑니다. 
    1909년 설립된 이 교회에서 그는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前身)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합니다.
    ▲  손원일이 중국에서 돌아와 처음 해사대를 결성한 안동교회는
    1979년 지금같은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됐다.
    ▲  안동교회가 새로 지어졌음을 알리는 표석이다.

    안동교회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저택인‘윤보선가(家)’ 바로 맞은 편입니다. 1979년 지금 같은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됐는데 옆에는 옛 교회 터로 보이는 한옥이 잘 보존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손원일은 왜 안동교회로 찾아가 해군의 기틀을 만든 것일까요? 교회 내부에서는 이와 관련된 안내문이나 설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추측건대 중국 만주지방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孫貞道ㆍ1882~1931) 목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  안동교회 맞은편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이다

    손원일은 다시 1주일 후인 8월28일 해사대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옛 충훈부 건물로 옮겼습니다. 이곳은 안국역에서 인사동 거리로 들어가는 초입입니다. 9월30일 해사대는 조선해사협회로 이름이 바뀌고 본부는‘조선해사보국단 사무소’로 바뀝니다. 사무소의 위치는 지금 찾을 수 없습니다. 해군도 ‘회현동’이라는 동명(洞名)만 알뿐 주소를 모릅니다. 그리고 11월11일 손원일은 옛 충훈부 건물 즉 8월28일 해사대를 옮긴 그곳에서 회원 70명과 함께 ‘해방병단(海防兵團) 창설식’을 거행합니다.
    ▲  손원일 제독은 우리 현대 해군의 창시자다.우리 해군은 육군보다
    앞선 1945년 11월11일 창군했다
    한국해군이 출범한 것인데 11월11일로 택일(擇日)한 사연은 잘 알려졌습니다. 손원일은 해군이야말로 신사(紳士) 중의 신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선비 사(士)자를 파자(破字)하면 십일(十一)이 되기에 11월11일로 날짜를 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터에는‘해방병단 결단식 터’라는 표지석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나무도 한그루 있지요. 이곳을 방문했던 시각,한 걸인(乞人)이 거기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표지석을 촬영하는데 걸인은 자신의 모습을 찍는 줄 알고 투덜거리더군요.
    ▲  만일 이때 해군이 생기지않았다면 북한의 남침 때 대한민국의 존재는 사라졌을 것이다

    해방병단 결단식을 마친 후 손원일과 초기 해군멤버 70여명은 오후 7시 미 군정청 운수부에서 마련해준 특별열차 편으로 경성역을 떠나 진해역으로 향했습니다. 다음날인 12일 새벽 6시 진해에 도착한 일행은 역 맞은편 태화여관을 거처로 정합니다. 이 태화여관은 진해에서 꽤 유서깊은 곳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11월14일 손원일과 해방병단 단원들은 진해군항 1-2부두에 있는 옛 일본해군 항무부 건물로 이동해 시무식을 엽니다. 여기에도 ‘해방병단 시무지지’라는 표석이 남아있습니다. 손원일이 해군을 건설하는 사이,서울에 있던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는 남산동 퍼시픽호텔로 사령부를 옮기지요. 1946년 10월1일의 일입니다. 원래는 통위부 부속건물이었다고 합니다.
    ▲  지금 외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퍼시픽호텔은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는 다음해인 1947년 7월 옛 일본해군 무관부 부속건물로 옮깁니다. 이곳은 명동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와 왕돈가스 가게가 밀집한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 가는 곳 못 미쳐 서울시 소유 건물 옆입니다. 이렇게 우리 건군(建軍) 역사상 최초로 해군을 설립하고 인력을 정비한 손원일은 1949년 10월1일 미국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전투함 백두산함을 구매하기 위해서입니다. 백두산함 구매와 관련해서는 제가 오래전 쓴 기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  손원일 제독(사진 가운데 왼쪽)이 미군으로부터 백두산함 인수식을 갖는 장면이다.

    ㆍ2011년 9월8일자 조선일보 태평로 ‘백두산함은 증언한다’
    윤숙이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돼요. 뉴욕의 존 스태거씨에게 꼭 전해야 합네다." 문서를 건네주는 노(老) 대통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 받아든 이는 시인 모윤숙(毛允淑)이었다. 1949년 어느 날 경무대(景武臺)에서 있었던 장면이다. '진해를 미군에게 맡길 테니 군사원조를 해달라!' 이런 민감한 내용의 친서를 외교관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맡긴 사연이 있었다. 한 달 전 같은 일을 공직자에게 시켰더니 일본 하코네(箱根)온천에서 기생 끼고 농탕치다 편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60년 전 우리 수준은 그랬다. 인적자원이 이 지경에 팔아먹을 천연자원도 없었다. 그래서 일제가 만든 군항(軍港)에 미군을 끌어들여 안보도 다지고 달러를 받아 맨주먹뿐인 군대까지 무장시키자는 일석이조의 꾀를 낸 것이다. 트루먼이 무시하는데도 자존심 센 이승만이 끝내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독립운동 시절 진주만기지에서 본 미국 함대와 해군 때문이었다. 그때 받은 감명이 하도 깊어 그는 항상'육해공(陸海空)'을 '해육공(海陸空)'으로 바꿔 불렀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

    최근에서야 손 제독의 독립운동 경력이 밝혀진 수준 이하의 독립운동사 발굴현실
    ▲  이것이 대한해협에서 인민군 특공대 600명을 수장
    시킨 백두산함의 마스트다.
    시 우리에겐 함정이 36척 있었지만 미국제 소해정(掃海艇) 몇 척 빼면 어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번듯한 전함(戰艦)은 이승만의 염원이자 해군의 바람이었다. 그 비원(悲願)으로 1949년 6월 '함정건조기금각출위원회'가 발족했다. 해군이 봉급에서 성금을 떼자 아내들은 천막에서 작업복을 지어 팔았다. 이렇게 석 달간 1만5000달러를 모았다. 딱 중고 전함 한 척 값이었다. 전함구매단이 미국에 가서 1만8000달러를 주고 산 게 무게 450t짜리 구잠함(驅潛艦)이었다. 퇴역해 벌겋게 녹슨 배를 되살리려 구매단은 수리공ㆍ페인트공이 됐고 그해 12월 26일 오전 10시 명명식이 열렸다. 백두산함(艦)은 가는 곳마다 동포를 울렸다. 마스트에 태극기가 처음 걸릴 때는 군인이,포ㆍ레이더를 구하러 간 하와이에선 사탕수수밭 노동자가,포탄 사러 간 괌에선 징용 갔다 미처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이 울었다. 처음엔 배가 너무 초라해 나중엔 그래도 조국의 첫 전함이라는 뿌듯함이 눈물샘을 건드렸다. 백두산함은 진해에 도착한 한 달 반 뒤 6ㆍ25전쟁이 터지자 진가를 발휘했다. 부산항으로 접근하던 소련제 수송선을 대한해협에 수장(水葬)시킨 것이다. 거기엔 북한특공대 600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남한 항구 중 접안(接岸)시설은 부산에만 있었다. 백두산함이 없어서 부산이 함락됐다면 한국에 온 100만 병력과 물자는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밀리던 국군은 뒤통수를 맞고 전멸하고 그와 함께 대한민국도 사라졌을 것이다. 해군과 군항은 이렇게 운명을 가른다. 문제는 우리 해군의 발전에도 상황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위에는 북한,왼쪽엔 중국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한국 해군을 반나절 안에 궤멸시킨다는 전력의 일본이 있다. 이 중 누구라도 제주 남방해로를 1주일만 틀어막아도 한국은 고사(枯死)한다. 원유ㆍ곡물ㆍ원자재가 그곳을 지나기 때문이다. 그런 요충이기에 군을 그렇게 싫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제주해군기지건설에 반대하지 않았다. 거기서 종북(從北) 얼간이들이 날뛰고 겁쟁이 정권은 끌려 다녔다. 백두산함의 넋이 살아있다면 몇줌 안 되는 김정일 추종세력에 앞서 그들을 겁내 국민의 생명줄조차 못 지키는 비겁한 정권을 향해 분노의 포신(砲身)을 돌렸을 것이다.
    이렇게 분전한 손원일은 해군 첫 참모총장으로 6ㆍ25를 치렀고 휴전이 되기 한 달 전인 1953년 6월30일 제5대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이후에는 초대 주 서독대사를 지냈으며 1980년 2월15일 타계해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의 아내로‘바다로 가자’같은 우리 군 사상 최초의 군가(軍歌)를 작곡한 홍은혜 여사가 오는 11일 100세 생일을 맞는다는 기사를 저는 최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고 손원일 제독과 관련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 (左)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조선일보 DB▲ (右) 故손원일 제독 부인 홍은혜씨. /조선일보 DB

    전남대 노기욱 교수가 추적한 바로는 손원일은 17세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1925년 4월 30일 중국 길림성에서 길림유자회(吉林幼者會)와 같은 해 11월 18일 여길학우회(旅吉學友會)를 조직했지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손원일 제독 같은 유명인사의 독립운동 경력이 지금까지 베일에 쌓여 있었던 걸까요? 노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그가 일제의 눈을 피해 가명(假名)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 발굴이 수준 이하였다는 뜻도 됩니다. 손원일의 독립운동은 두 갈래로 펼쳐졌습니다. ‘길림유자회(吉林幼者會)’에서는 조선청년들에게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습니다. ‘여길학우회(旅吉學友會)’에서 ‘단군기념식’을 열어 민족정기를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습니다. 이 때문에 손원일은 일본경찰의 추적 대상이 됐습니다. 그러자 손원일은 22세 되던 해인 1930년 7월16일 중국해군부(中國海軍部) 시험에 응시해 해군보관(海軍補官)이 됩니다. 해군보관으로 손원일은 세계 항해에 나서게 되지요. 노 교수가 말한 바로는 세계를 항해하면서 손원일이 모델로 꼽은 우리의 위인이 있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지요. 혹시 독자 여러분 중에는 손원일 제독을 무리하게 이순신 장군과 연결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분도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증거’가 있습니다. 손원일이 해군을 건설할 때 첫 발언이 “충무공 정신에 살고 충무공 정신에 죽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구한말 조선 수군제도와 함께 폐지된 해군사관학교를 다시 설립했습니다. 그가 초창기 건조한 함정 이름도 ‘충무공정(艇)’이었습니다 1947년 2월 8일, 충무공정은 첫 항해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충렬사와 한산도 근해를 일주했습니다. 6ㆍ25때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단독으로 통영을 탈환한 ‘통영수복’의 작전명도 ‘충무공작전’이었는데 작전이 성공리에 끝난 후 손 제독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무공께 신고합니다. 한국해군 ㆍ 해병대가 단독작전으로 통영을 수복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

    손원일家와 김일성 사이의 질긴 은원(恩怨)
    날 충무공 사상연구소 이사장이던 노산 이은상(李殷相)선생은 손원일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손 제독, 당신은 우리나라 해군의 아버지이자 충무공 이순신의 진정한 후예야!”그러면서 노산은 손원일 제독에게‘수향(水鄕)’이라는 호를 내렸다지요. 
    그가 해군장병에게 내린 교시도 충무공을 연상시킵니다. 
    길지만 6개의 항목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군인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경애하자.
    둘째 군인은 명령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자.
    셋째 군인은 명랑 활발하고 신의를 지키자.
    넷째 군인은 정치담을 말고 도별담을 폐지하자.
    다섯째 군인은 충무공 정신에 살고 충무공 정신에 죽자.
    여섯째 군인은 관품을 애호하고 물자를 절약하자.
    해군역사기록단 임성채 과장(예비역 대령)은“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해군을 창설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신성인한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대한민국 해군 불멸의 정신으로 설정하고 평생을 통해 그것을 실천한 진정한 이순신 정신의 계승자 였다. 그래서 오늘날 그는 ‘해군의 창설자’를 넘어 ‘해군의 아버지’라고 추앙되는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사실 손원일 제독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쓰려면 책 한권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우선 부친 손정도 목사가 대단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그가 김일성이 일제 경찰에 붙들려 목숨이 경각을 다툴 때 손을 써 구해줬다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그런 손 목사에게 고마움을 표했으며 손 목사의 아들 가운데 한 분을 북한으로 초청해 후대(厚待)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손 목사의 따님을 사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손원일 제독 역시 중국에서 선장이 된 뒤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액이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일성에 맞서 바다에서 나라를 지켰으니 손 제독 일가와 김일성의 은원(恩怨)도 상당하지요. 이런 손 제독의 일화를 젊은 세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지요. 손 제독의 이름은 지금 우리 해군에 살아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디젤 잠수함 1번이 바로 ‘손원일 함’이기 때문입니다.
    ▲  손원일함. /조선일보 DB

    해군은 우리 기술로 제작한 214급 잠수함에 초대 해군 참모총장이자 해군 창시자인 손원일 제독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214급 잠수함은 핵 추진 잠수함은 아니지만 초보적인 전략무기로 알려졌습니다. 아마 지하에 계신 손 제독도 뿌듯하게 생각하리라 믿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70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해방병단은 지금 7만여 장병과 세종대왕함-율곡 이이함-서애 유성용함 등 세척의 이지스 구축함과 경항공모함으로 전용 가능한 독도함 등을 보유한 당당한 우리 해군의 모체가 됐습니다. 변변한 전투함이 없어 미국에 고물 배를 구하러 떠났던 것과 달리 지금은 이역만리 해역까지 파병돼 국제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강한 해군으로 성장했지요. 그런 해군의 전통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려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복이 아닐까요. 최근 우리 해군은 동네북 신세가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통영함 비리 때문입니다. 통영함은 제가 앞서 보도한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 편에서 북한 몽금포항을 원점 타격하는데 선봉에 선, 자랑스러운 군함입니다.
    ▲  통영함. /조선일보 DB

    그런 유서깊은 이름을 이어받은 통영함이 비리로 얼룩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러분이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방위사업청에 파견된 영관급 장교 일부가 금품을 받고 고물 장비를 선적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직 해군 참모총장 2명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사실도 드러났지요. 이렇게 해군이 방산 비리의 원흉처럼 되면서 우리 해군의 사기는 지금 크게 저하돼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리를 발본색원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해군을 도매금으로 넘겨 난도질하는 데는 반대합니다. 해군 자체를 부정한다면 우리의 바다는 누가 지키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몇 해 전, 해군은 제주도에 기지를 마련하려다 좌파 세력의 총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무슨 돌덩이를 살리겠다는 해괴망측한 핑계를 대며 우리의 생명선인 바다를 지키기 위한 제주해군기지 공사를 그들은 훼방 놓았지요. 그로 인해 발생한 273억원을 해군이 공사를 진행한 업체에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며칠 전 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최근 해군에는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어 제가 관계자들을 만나면 ‘살풀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땡볕에 서 있기조차 어려웠던 지난 주말,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인사동 골목과 회현동-남산 일대에 남아있는 우리 해군 창건 초창기의 유적들을 찾아다닌 것은 바로 사기가 저하될 대로 저하된 우리 해군의 뿌리를 살펴봄으로써 그들에게 작은 위안이나마 주려는 의도였습니다. 여러분도 인사동에 나들이 나갈 기회가 있다면 윤보선 전 대통령 집 앞에 있는 안동교회부터 인사동 초입의 해방병단 표지석까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혹시 남산에 등산가실 일이 있다면 남산 일대에 남은 해군의 유적을 보며 “아! 우리 해군이 이렇게 시작했구나”하고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