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18 특공왕 공정식과 몽금포

浮萍草 2015. 8. 1. 00:00
    건군 이래 단 한번뿐이었던 북한군 '응징작전'
    계사를 살펴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강대국일수록 명(名)재상과 명장(名將)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기 이전, 20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한 영국에는 뛰어난 재상과 빼어난 장수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재상으로는 피트,로이드 조지,윈스턴 처칠 마거릿 대처 등이 있었고 장수로는 우리 이순신 장군과 비견되는 넬슨 제독을 비롯해 말보로 공작,웰링턴 장군,몽고메리 장군 같은 이들이 위기의 상황에서 조국을 구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를 일별해보면 명장들이 많았고 6·25와 월남전을 거치면서 누란(累卵)의 위기를 이들의 힘에 의지해 헤쳐 나왔습니다. 우리가 비록 강대국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지금이 반만년 역사상 가장 강한 것도 그들 덕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감히 말할 수 있는 현대의 한국 명장은 6·25의 영웅 백선엽 장군과 지난해 타계한 채명신 장군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두분 모두 제가 직접 인터뷰한 경험이 있는데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편의 영화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재미있지요. 이번에 소개할 분은 해군사관학교 제1기로 군번이 ‘80125’인 분입니다. 그 이전 세대는 광복군 혹은 만군(滿軍) 혹은 일본군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공정식(孔正植) 전 해병대사령관으로, 그는 몽금포 작전의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이 해병 장갑차 앞에 서있다. 장갑차에 그려진 눈매와 공 전 사령관의 눈매가 닮았다. /문갑식 선임기자

    1949년 8월16일 새벽 2시, 우리 인천항에서 해군 함정 다섯 척이 출항합니다. PG-313 충무공함 등이었습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바로 북한 해군항인 몽금포(夢金浦)기지였습니다. 몽금포라는 지명은 어디선가 들어보신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로 시작하는 민요 ‘몽금포 타령’에 나오는 그곳입니다. 북한 황해도에 있는 몽금포는 모래가 곱기로 유명한,총 길이 23㎞의 해변이 있어 여름철이면 해수욕객이 몰리는데 지금도 북한에서 관광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인천을 출발한 우리 해군 함정에서 이튿날 새벽 6시 특공대원 20명이 다섯 척의 보트를 나눠 타고 해안선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틀 무렵 눈밝은 북한 병사가 해안으로 다가오는 수상한 검은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적진에 비상이 걸렸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적탄(敵彈)이 다섯 척의 우리 해군 특공대가 탑승한 보트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몇 발이 함명수(咸明洙) 소령(7대 해군참모총장)의 양쪽 넓적다리를 관통했습니다. 함 소령은 그만 보트 위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지휘관의 중상(重傷)으로 특공대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를 맞았습니다. 한마디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요. 이때 멀리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JMS-302 통영함이 생사의 기로에 선 전우(戰友)들을 향해 돌진하며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함정의 정장(艇長)은 공정식(孔正植·91·6대 해병대사령관) 소령이었습니다. 그는 몽금포항을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진 않았지만 같은 해사1기인 동기를 구하려 직접 37밀리 대전차포를 쏘아댔지요. 그 기세에 북한군이 주춤했습니다. 며칠 전 이 기사가 신문에 보도됐을 때 해병대 출신 노병께서“몽금포 작전 때 아군이 쏜 것은 37밀리 대전차포가 아니라 50밀리 기관포”라는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하지만 공 장군의 회고록에 이 화기가 37밀리 대전차포로 돼있어 그냥 인용합니다공 소령은 보트에서 신음하던 함 소령을 구해내 후송시켰습니다. 그리곤 예상과 달리 전진(前進)을 계속했습니다. 그 질풍 같은 기세에 북한 함정 4척이 순식간에 폭파됐습니다. 우리 해군은 내친 김에 수류탄을 던지고 뭍으로 올라 육탄전을 벌였습니다. 아군의 기세에 놀라 우왕좌왕하던 북한 인민군관 등 4명이 생포되는 전과를 올린 뒤 302 통영함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통영함은 적 포탄에 함수(艦首)와 양쪽 뱃전이 파손됐지만 북한 함정 한 척까지 나포해 18일 정오, 인천항으로 개선했지요. 몽금포 작전은 우리 전사(戰史)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건군(建軍)이래 단 한번뿐이었던‘응징작전’이며,둘째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적 근원까지 완전 무력화시킨 ‘원점타격작전’이었기 때문인데 해군이 이처럼 몽금포 작전을 감행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미군은 국군을‘허수아비’라 불렀습니다. 당시 정세를 한번 살펴볼까요? 1948년 제주에서 4·3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뒤숭숭한 가운데 5월7일에는 동해시 묵호항에 머물던 통천정을 좌익 군인들이 북으로 끌고 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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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년간 묻혔던 작전, 8월 14일 월미도에 전적비 제막으로 빛을 보다
    
    6월18일에는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 9연대장이 좌익 부하에게 암살됐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서 출동한 14대 연대의 대대장 세 명이 역시 좌익부하에게 살해된 것입니다. 
    다시 이들을 제압하려고 출동시킨 광주 주둔 4연대원 일부가 반란군에 가담하고만 것입니다.
    이른바 여순(麗順)반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5월4일에는 강원도를 지키던 4여단 8연대 1대대장 강태무 소령과 2대대장 표무원 소령이 대대원들을 이끌고 삼팔선을 넘었습니다. 
    대대급 병력이 통째로 적진에 넘어간 것은 전사(戰史)에 없는 일이지요.
    국군 전체가 마치 물에 젖은 볏단처럼 주저앉을 찰나였는데 이번에는 해상에서 사건이 터집니다. 
    정부 수립 1주년인 1949년 8월15일 인천에서 열릴 해군 최초의 관함식(觀艦式)을 앞두고 같은 항구에 정박시켜놓았던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북한군에 탈취되는 사건까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해군의 심장부의 뚫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격노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응준 육군참모총장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경무대(景武臺)로 불렀습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육군과 해군참모총장이 김일성만 도와주니 말이야. 
    동해에서는 태극기를 단 함정이 (북으로) 올라가고 서해에서는 성조기를 단 보트가 올라가고, 이래서야 되겠는가….”
    ▲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손제독은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광복 다음날 귀국해 해군의
    기틀을 세웠다.
    이날 경무대를 빠져나오며 함명수 소령은 손원일 총장에게 ‘몽금포 작전’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작전은 우리 국군이 북한에 그 동안 진 빚을 한꺼번에 청구한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목표 물이었던 로버트 준장의 보트를 찾진 못했습니다. 북한이 작전이 있기 전 보트를 대동강 하류 진남포항으로 옮겨놓았던 것입니다. 대신 보트가 없어진 게 보트 정장 안성갑 하사 때문이라는 건 알아냈습니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습니다. 안 하사는 남로당 공작원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남로당 공작원은 “로버트의 보트를 끌고 월북하면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겠다”고 유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전 성공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정부도 미국도 이 작전을 ‘쉬쉬’한 것입니다. 6·25가 끝난 후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몽금포 작전 참가자 중 한 명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기자들에게 몽금포 작전을 설명했더니 일본 언론이“몽금포 작전이 6·25가 일어난 원인 중 하나”라고 보도한 것입니다. 이른바 몽금포 작전이 북침설(北侵說)의 근거가 된 것이지요. 졸지에 충신에서 역적이 된 몽금포 작전은 1994년부터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6·25가 스탈린과 모택동의 허가아래 김일성이 저지른 남침’이라는 옛 소련 자료를 그때 공개한 것입니다. 이 자료로 북침설은 근거를 잃었지요. 그런데도 우리 해군 전사에 몽금포 작전 관련 기록이 해금(解禁)된 것은 2012년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이란 책자를 통해서였습니다. 실로 통쾌무비한 이 작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데엔 무려 63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사이 200명이 넘던 몽금포 작전 참전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것은 단 세 명,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과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던 김상길 전 광복회장 뿐입니다. 정장(艇長)으로 몽금포작전을 수행했던 남철 제독은 지난해 아쉽게 사망했습니다. 66년간 억울하게 묻혔던 몽금포 작전의 실체가 8월달에 완전히 공개됩니다. 8월14일 인천 월미도에 몽금포 작전 전적비(戰績碑)가 제막되는 것이지요. 그보다 더 기쁜 소식도 있습니다. 공정식 전 사령관은 월남전 이후 첫 태극무공훈장 수상자로 결정돼 국무회의 의결만 남겨두고 있다는 거지요. 군 최고의 명예인 태극무공훈장이 생존하고 있는 장병에게 수여된 사례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함께 참전한 김상길 전 광복회장-이태영 서해첩보부대장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용운 제1정대사령 등 4명 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색다른 사연도 있습니다. 며칠 전 저는 이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7월21일자 기사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의 아버님(이호영 해군12기생 군번 8105316)이 참전하신 전투라 더욱 새로웠습니다. 약 일주일 전 해군본부인지 하는 곳 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참전여부와 전투상황에 대해 물어보고 전적비를 세우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으로 참석일자와 장소는 추후 통보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훈처 등의 자료를 어렵게 찾아서 연락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는군요. 저의 아버님은 6.25동란중 참전수훈으로 훈장서훈을 복수 이상으로 받으셨습니다. 몽금포 관련으로는 아니구요. 첫째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선임기자님의 기사를 읽어보면 작전 참가자중 공정식302함 정장 등 3명만이 생존하고 계시다고 했는데요. 적어도 한 명은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아버님이 살아계시니까요.(경기도 광명시 거주)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302함에는 약 열두서너 명이 승조했다고 기억하시며 공정식 대위(전 해병대 사령관)가 정장 이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적 함정에 근접하여 나포를 할 때 기관총 사수 역할을 하셨다고 합니다. 초 근접하였을 때 적이 수류탄을 던지는 등 저항을 할 때 다량의 사격을 가했다고 하십니다. 몇 명의 적군은 생포하고 일부 살상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상자 및 포로를 교전 후 적함 내부에서 확보) 둘째는 이번 훈장서훈에 어떤 형태로던 저의 아버님이 누락된 것이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제가 올해 나이가 59입니다.(57년생)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참전무공을 들으며 자라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서훈추가가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저는 서훈에 대해 어떻게 조치를 취하거나 도움을 드릴 입장이 아니지만 혹시 국방부나 해군 관계자가 이 글을 본다면 전말을 알아보고 적절한 도움을 드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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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과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기막힌 인연
    
    66년만에 훈장을 받게 된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천안함과 연평해전에서 우리가 당할 때마다 분통이 터져 후배 장성들을 만날 때마다 ‘원점타격’을 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는“최근 영화 ‘연평해전’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몽금포 작전에 관한 영화도 나왔으면 좋겠다”고도 했습니다.
    공 전 사령관은 또“최근 해군의 위상이 말이 아닌 게 너무 안타깝다”며“내가 몰던 통영함이 혁혁한 전과를 올려 한국 최초의 수상구조함에 그 이름을 물려줬는데 방산
    (防産)비리의 대명사처럼 된 게 너무도 한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지요.
    ▲  우리 해군이 장병들과 장병 부인들의 성금으로 도입한 백두산함. 이 백두산함은 6.25가 벌어진 다음날인 26일 부산 앞바다에서 인민군 특공대 600명이 탑승한
    소련제 수송선을 수장시키며 국군에 첫 승전보를 전했다.

    공 전 사령관은 이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가 해병대로 소속을 바꾸는데 그가 이룬 최고의 수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솔산 전투와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입니다.
    ▲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지역을 방문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영접하는 공정식 당시 부전투단장. 공 전 사령관은 해사 1기로 나중에 해병대로 옮겼다

    해마다 10월이면 경기도 파주 도라산평화공원에는 붉은 팔각모가 넘실댑니다. 노(老)해병들이 여기 모이는 사연이 있습니다. 64년 전인 1951년 8월 한국 해병대는 강원도 홍천에 있었습니다. 상륙부대가 산악전에 투입된 것은 양구 '도솔산(1148m)의 비극' 때문이었지요. 거기서 미 해병 1사단이 인민군 정예 12·32사단에게 궤멸적 타격을 당한 것입니다. 반격에 나선 한국 해병 1연대가 1951년 6월 4일부터 17일까지 인민군 2000명을 사살했습니다. 그 후 주둔지를 홍천으로 옮겼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왔지요. 명목은 격려였지만 속셈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밴 플리트 UN군 사령관에게 말했습니다.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탈환한 자랑스러운 한·미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을 지키게 하시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습네다. ”당시 전시작전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노(老)대통령이 딴청을 부린 이유가 있습니다. 두 차례 서울을 적에게 내주었던 이승만은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처럼 역사에 기록되는 걸 겁냈던 것입니다. 이때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당시 현장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곽영주 경무대 경호책임자로부터 무언가 보고를 받고 생일 케이크를 들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 케이크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공정식 대대장에게 주는 대통령의 ‘선물’이었지요. 당시의 장면이 다행스럽게도 한 장의 사진에 남아있습니다. 전장(戰場)의 노 대통령이 생일 케이크를 들고 젊은 대대장에게 생일을 축하해주는 장면은 지금 봐도 훈훈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해병대 이동 지시로 돌아갑니다.
    ▲  도솔산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을 격멸시킨 공정식 대대장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생일 축하 케이크를 전달하고있다.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는 훗날 4.19혁명 때
    민중들에게 발포한 혐의로 사형당한 곽영주 당시 경무대 경무관이다.

    다행히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받들던 밴 플리트 미 장군이 있었기에 한·미 해병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했습니다. 1952년 3월 17일이었지요. 이승만 대통령의 예감은 정확했습니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휴전회담장으로 지금의 판문점이 아닌 서울을 점찍고 있었지요. 그가 정예 19병단 예하 193·194·195사단과 제8포병사단 등 4만2000명을 개성에 배치한 데는 그런 흑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맞선 한국 해병은 5500명에 불과했습니다. 숫자만 8대1로 불리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은 덕물산(288m)·군장산(213m)·천덕산(203m)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군은 도라산(155m)을 제외한 개활지에서 위를 보며 싸워야 했습니다. 1952년 추석 전야(前夜)의 1차 추계공세 때 사천강 전초진지를 빼앗긴 김용호 소대장은 자결하며 유서를 남겼습니다. “부하들을 다 잃어버린 죄책감에 그들이 잠든 고지 위에서 죽음을 같이하여 속죄합니다.” 김용호 소위의 3형제는 모두 전장(戰場)에서 산화했습니다. 군에서 경북 영천에 사는 그의 부친에게 조위금을 전달하려 했지만 두부 배달을 하던 아버지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식들 목숨 값을 받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닙니다.’ 분개한 한국 해병은 10월 31일부터 벌어진 중공군 2차 추계공세에서 대승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까지 거기서 한국 해병 776명이 전사하고 3214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중공군은 1만4017명이 죽고 1만1011명이 다치는 참패를 맛봐야 했지요. 이 대첩을 기리려 '오랑캐를 격파했다'는 파로비(破虜碑)가 2008년 10월 28일 세워졌습니다. 당시 친북(親北)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2007년 추진된 일이 1년 넘게 미뤄진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나라는 충혼(忠魂)들을 위로할 비석 하나 세우는 게 힘들었던 국가였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제게 여러 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서울을 이렇게 지켰습니다.”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공 전 사령관은 5·16때 국방대학원에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육군본부로 왔는데 갑자기 그에게 ‘수도경비사령(수도방위 총책임자)’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온 것입니다. 공 전 사령관은 “해병대 사령관의 허가없이는 못한다”고 버텼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해병대 사령관은 연금 상태였습니다. 어렵게 전화연락이 됐는데 당시 사령관이“공 장군이 맡아줘야지 어떻게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책임을 맡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미군 측에서 “수도경비사령이 박정희 일파를 체포하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고민하고 있는데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공 전 사령관 옆에 바짝 달라붙어 동태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공 전 사령관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을 체포하지 못했지요. ‘혁명 주체’는 아니었지만 그 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공 전 사령관은 자주 술잔을 나누는 사이가 됐으며 사격의 명수인 공 전 사령관과 함께 실탄 사격을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공 전 사령관이 해병1사단장으로 부임할 때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사진 왼쪽)이 꿩사냥을 하는 장면이다. 옆에는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이다.

    전날 축하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사단장 이취임식이 참석하지 못하자 미군에서 “이런 사단장은 잘라야 한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태의 전말을 듣고 씩 웃으며 공 사단장을 두둔했다고 합니다. 공 전 사령관은 훗날 해병대사령관일 때 청룡부대를 월남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 전 사령관이 군을 떠난 것은 대통령의 3선 출마에 반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문(軍門)을 떠난 공 전 사령관은 그 후 대사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지금도 해병대 전략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  월남전에 파견된 지휘관들이다.사진 왼쪽 세번째부터 오른쪽으로 이봉출 청룡부대장,채명신 파월 한국군사령관,공정식 해병대사령관과 공 사령관에게 탄피로
    만든 기념품을 선물하는 청룡부대 포병부대장.

    ▲  월남전에 선봉으로 나선 청룡부대 장병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하사한 고기를 뜯으며 회식을 하고 있다. 당시 대통령의 하사품은 살아있는 돼지였다.

    9순이 넘은 연세에 귀는 잘 들리지 않지만 일상 대화에 지장이 없고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면 언제나“내가 앞장서 전쟁터로 가겠다”며 무골(武骨)다운 호기를 보이고 있지요. 건강에는 지장이 없지만 인간세상의 순리가 있는 터라 우리가 공 전 사령관을 볼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침 24일(금요일)은 공 전 사령관의 생신이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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