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재벌가 인사이드

58 :이맹희

浮萍草 2015. 8. 18. 10:02
    이맹희 회장 "아버지(이병철)와 갈등의 골이 깊었던 까닭은..."
    계의 양녕대군‘비운의 황태자’ ‘풍운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을 일컫는 말이다. 
    국내 최대 재벌의 장남인 그가 이국만리 타국에서 쓸쓸한 생을 마감했다. 
    임종을 한 가족도 없이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이맹희 회장은 지난 71년 삼성 경영에서 배제된 뒤 철저한 야인으로 살아야 했다.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삼성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음은 물론 아예 ‘무능력자’란 주홍글씨를 새기고 말았다. 
    심지어 자신이 눈을 감기 직전에도 장남은 부르지 않고 대신 이맹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현 CJ회장만 들어오게 했다. 
    돌아가시면서까지 장남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  1987년 11월 23일 열린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례식에서 장남 이맹희·삼남 이건희·차남 이창희 형제(사진 오른쪽부터)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필자는 지난 1994년과 1995년 이맹희 회장과 단독 인터뷰를 4번 가졌다. 이때 이 회장은“자신이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갈등의 골이 깊었다”다고 술회 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으면 그렇게까지 감정이 상하지 않았을 것이란 설명이었다. 심지어 아버지보라고 더 행패를 부렸다고까지 했다. 안양골프장을 일부러 찾아가 유리창을 박살낸 것은 아버지한테 무언의 항의 표시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 있다가 지방으로 내려갈 땐 기차나 비행기를 타지 않고 승용차로 이동하면서 용인(애버랜드)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들렀다고 했다. 아버지가 미웠지만 부자지간의 정마저 끊을 수는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이맹희 회장이 이병철 회장의 후계자가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났을 때 사실상 삼성 그룹을 이끈 것은 이맹희 회장이었다. 66년부터 71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맹희 회장은 7년 동안 삼성의 얼굴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때 부친인 이병철 회장의 눈밖에 나고 만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병철 회장은 장남과 차남(이창희 회장)의 경영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신중한 이병철 회장과 불 같은 성격의 이맹희 회장은 경영스타일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오히려 둘째인 이창희 회장이 부친과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들의 경영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자 이창희 회장이 청와대에 투서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부친이 밀수한 물품을 처분,막대한 자금을 모으고 있다고 고발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대노했다. 장남과 차남을 완전히 경영에서 배제하고 말았다. 그후 이병철 회장은 냉정했다. 장남과 차남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급기야 1976년 삼성의 후계자로 3남인 이건희 회장을 지목했다. 이때부터 이맹희 회장은 더욱 부친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툭하면 아버지의 비서실장을 불러내 내리치는 ‘난동’까지 부렸다. 이병철 회장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 역시 철저하게 배척했다. 맏며느리이자 이맹희 회장의 부인인 손복남 여사에게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주식을 물려주고 장남은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맹희 회장은 서울도 아닌 대구나 부산 등지에서 주로 지냈다. 특별히 하는 일없이 ‘풍운아’처럼 떠돌아 다녔다. ‘비운의 황태자’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Premium Chosun        홍성추 조선일보 객원기자(재벌평론가) sch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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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노태우 등 5-6공 실세들과 절친했던 이맹희 회
    면 둘째인 이창희 회장은 형과 달리 아버지한테 용서를 구했다. 그러면서 자기 손으로 사업을 일으켰다. 한때 잘나가던 ‘새한미디어’가 그가 세운 회사다. 전세계 비디오 테이프 시장을 석권할 만큼 규모가 컸었다. 그러나 비디오 테이프가 CD화 하면서 사업이 급속히 위축되고 말았다. 이창희 회장은 1991년 형제들 중 가장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만다. 가족력인 폐암으로 사망했다(선대 이병철 회장과 이맹희 회장,이건희 회장도 모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이병철 회장의 가족 중 이창희 회장의 가족이 사업적으로 가장 불우했다. 제일합섬을 삼성으로부터 물려 받아‘새한그룹’으로 도약을 시도하다 IMF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급기야 차남인 재찬씨가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맹희 회장은 2005년부터 주로 북경에서 생활했다. 이재현 회장의 이복동생이 나타나 이맹희 회장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한 것도 그 시점이었다. 항간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국내를 벗어난 생활을 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  이맹희/뉴시스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2012년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상속재산 분할 소송을 내면서였다. 이병철 회장이 숨겨둔 재산을 놓고 벌인 소송은 인지대만 100억원이 넘는 대형 송사였다. 그러나 그 송사는 1·2심에서 모두 패배해 상처만 남긴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송사가 한창 벌어질 때 이건희 회장이“나를 제대로 처다보지도 못하는 양반이 건희 건희 한다”며 형을 향한 독설을 날려 ‘유명세’를 탔다. 이건희 회장의 발언이 여과없이 매스컴을 타자 국민들은 형제간의 재산싸움이 도를 넘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 뒤 소송이 마무리되고 이재현 회장의 석방 탄원서를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삼성 전자 부회장이 내는 등 화해 분위기가 엿보이기도 했다. 사실 1995년 필자와 인터뷰 때도 이맹희 회장은 동생이지만 이건희 회장이 두렵다고 한 적이 있다. 삼성그룹 총수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맹희 회장은 한때 삼성 그룹의 총수가 되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다. 당시 신군부 실세들인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씨와 경북고 동기동창(32회)이었고 친했던 사이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의 동생인 전경환씨와는 아주 특별한 관계였다. 전 전대통령의 부친이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대구‘삼성정미소공장장이었다. 대구공고를 다녔던 전 대통령과 동년배라 잘 알고 있었다고 필자에게 얘기했었다. 자기가 주인집 아들이라 전 전대통령이 어려워했다고까지 했다. 전경환씨는 이재현 회장이 어렸을 때 운전수 겸 보디가드를 지낸 적도 있다. 그런 관계로 당시 신군부 실세들이 자신을 찾아와 ‘삼성 총수’ 자리를 찾아주겠다고 꼬드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TK(대구 경북)의 대부로 알려진 신현확 전국무총리(삼성물산 회장 역임)가 이들에게‘준동’하지 말 것을 경고한 뒤 그 얘기가 사라졌다고 했다. 잠시 그런 일이 있은 것 말고는 철저하게 야인 생활을 했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 총수의 장남인 그가 가족도 없는 타국에서 84년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 것은 어쩌면 ‘공수래 공수거’의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 것이 아닐까
    Premium Chosun        홍성추 조선일보 객원기자(재벌평론가) sch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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