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朝線時代 夫婦사랑法

4 이광사

浮萍草 2015. 6. 5. 11:09
    글씨 써주고 선물 받았다가 아내에게 혼난 남편, 이유는?
    처녀·노총각이란 말이 언제부터 생겨나고 유행했을까? 그 유래에 대해선 정확하지 않지만 그 말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후기부터였던 듯하다. 
    고려시대만 해도 불교사회로 개인의 해탈을 중시했기 때문에 만혼(晩婚)이나 독신자들이 사회적으로 문제시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유교사회로 누구나 반드시 결혼해서 아이(아들)를 낳아 후손을 이어가야 했다. 
    그와 함께 여자 18세, 남자 20세라는 결혼 적령기가 생겨났는데, 그 시기가 넘어서면 노처녀·노총각이라 부르며 결혼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조선후기엔 이전과는 정반대로 결혼제도도 친영과 시집살이로 바뀌고 재산상속도 남녀균분에서 아들 중심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는 높고 귀하며 여자는 낮고 천하다는 남존여비 의식이 팽배해졌다. 
    이번부터는 그러한 조선후기 가부장제 시대의 부부관계와 부부사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ㆍ“장부가 맺고 끊는 게 그리 물러서야”
    원교 이광사(1705~1777)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화가였다. 특히 글씨를 아주 잘 써서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원래 그의 집안은 전주이씨 덕천군파로 왕실의 먼 친척이요,소론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론은 실각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느낀 소론은 영조 4년(1728)에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으나 그마저도 실패하면서 그들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광사 글씨.

    이광사는 15세에 두 살 연상인 안동 권씨와 결혼했으나, 그의 나이 27살 때 아내가 쌍둥이 딸을 낳다가 잘못되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태 뒤에 다시 9살 연하인 문화 유씨와 재혼했는데 그리하여 긍익과 영익 및 늦둥이 딸 하나를 낳았다. 두 사람은 평소 금슬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한번은 아내의 생일날 이렇게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웃기도 했다. 아! 5월 3일은 그대가 태어난 날. 해마다 이날이면 창밖이 환해지기도 전에, 아들, 조카, 며느리, 딸이 일제히 들어와 새벽 문안을 드렸지. 나 역시 일찍 일어나 그대에게 나아가 말하길,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마땅히 온갖 음식 차려 아들 손자까지도 좋은 날을 즐기게 합시다.” 그대가 웃으며 대답했지. “내가 뭐 귀하다고 내 생일 때문에 번거롭게 굴게 뭐 있어요?” 나 또한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지. “아들 둘 장가 들였겠다 집안의 마님이 되었는데, 높지 않다면 무엇이 높다 하겠소.” (……) 내가 돌아보며 장난삼아, “오늘 태어난 이가 어찌 갑자기 웃고 말하며, 어찌 갑자기 키가 이리 커졌소? 또 젖을 먹지 않고 밥을 먹으며, 어찌 이리 신통하오? 그 조숙함이 고신씨보다 훨씬 낫구려.” 모두 다 웃으니, 그대 또한 빙그레 웃었소.
    유씨는 매사가 똑 부러지고 현명한 여인이었다. 집안 살림에 있어서도 이광사에게 조금도 신경 쓰게 한 적이 없었다. 또 남편을 하늘처럼 섬겼으나,그가 하는 일이 바르지 않으면 기어코 바로 잡으려 했다. 이광사는 글씨를 아주 잘 써서 사람들이 담배나 술, 꿩, 생선 등을 가지고 와서 글씨를 청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받아 안채로 들여보내면, 유씨는 으레 돌려주라고 하면서 내보냈다. 그가 다시 갖고 들어가 “받아 두소. 손님은 갔소”하면, 그녀는 “그걸 무슨 명목으로 왜 받으셨소?”하고 다그쳤다. 인정상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하면, “장부가 어질고 유순하여 맺고 끊는 게 그리 물러서야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하며 꾸짖곤 했다.
    Premium Chosun ☜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myjin55@hanmail.net

    ;  ;草浮
    印萍

    남편이 연좌제에 걸리자 아내는 목매 자살하고
    ㆍ제망실문과 막내딸 걱정
    이광사 초상화.
    영조 31년(1755), 이광사의 나이 51세에 나주 괘서사건이 일어났는데, 백부 이진유의 역모죄에 연좌되어 그도 궁궐로 끌려갔다. 그러자 유씨도 “지아비가 역모죄에 걸렸으니 어찌 살 리가 있겠는가? 지아비가 이미 살지 못할진대 내 무엇을 바랄 게 있어 구차히 산단 말인가?”하고는 흰 무명을 처마의 들보에 매어 자결해버렸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었으나, 사실은 두 아들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내의 죽음은 이광사에게 평생의 통한이 되었다. 이후 그는 12년에 걸쳐 무려 10편이나 제망실문(죽은 아내를 애도하기 위한 글)을 짓고, 그밖에 실기1, 묘지명1을 짓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아내가 자결한 해의 12월에 지은 시를 보자. 이 몸이 죽어 뼈가 재 된다 해도 이 한이야 정녕 풀리지 못하리. 이 목숨이 백번 태어났다 죽는다 해도 이 한이야 응당 오랫동안 풀리지 않으리. (……) 이 내 한이 이와 같으니 그대 한도 응당 그러하리 이 두 한이 길이 흩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만날 인연 있고말고.
    도대체 그 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죽어서도 풀리지 않을 것이라 하고, 나중에 꼭 다시 만나기를 그토록 바라는 것일까?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음을 면한 이광사는 함경도 부령과 전라도 신지도에서 장장 23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남은 인생을 전부 유배지에서 보낸 것이었다. 아내를 잃은 후 그의 사랑은 자식들, 특히 늦둥이 딸에게 향했다. 당시 두 아들은 결혼해서 별 문제가 없었으나, 이제 겨우 8살인 막내딸은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 비록 편지를 통해서나마 막내딸에게 일상생활의 규범들을 낱낱이 가르치려 했다. 대표적으로 유배를 떠난 이듬해인 1756년 5월 막내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살펴보자. “날마다 일찍 일어나 요와 이불을 개어 일정한 자리에 두고, 빗자루를 내려 방을 깨끗이 쓸어라.
    머리는 얼레빗으로 빗고서 상자에 담아 넣어라. 가끔 거울을 보고 눈썹과 귀밑머리털을 족집게로 뽑고 빗살을 깨끗이 쳐서 때를 없애고 얼굴 씻고 양치하고 다시 이마와 귀밑머리털을 빗질로 매만지고 경대를 정리 하여라. 수건은 늘 제자리에 두고, 무릎을 꿇고 앉아 한글을 한번 죽 읽고, 한자는 정한 대로 약간씩 읽어라. 올케에게 배울 때 먼저 바느질하기 쉬운 것이나 솜을 두고 피는 일 따위부터 배우고 음식은 알기 쉬운 간 맞추기 삶기 고기 저미기 생선 배 가르기 채 치기를 배우고, 나물과 젓갈, 김치, 장 담그기 따위도 배워 두어라.” 이처럼 이광사는 마치 잔소리하는 어머니처럼 막내딸에게 일상생활의 규범들을 세심하게 가르치고 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라는 말을 듣게 하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을 썼던 듯하다. 물론 두 아들에 대한 사랑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큰아들 이긍익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야사집『연려실기술』의 저자였는데 그 ‘연려실(燃藜室)’은 이광사가 직접 휘호해준 서실의 이름이었다. 또 둘째아들 이영익도 아버지를 이어받아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이광사는 한 평생을 야인(野人)이자 유배객으로 살았지만 그의 학문과 예술 세계는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비록 삶에는 졌을지언정 역사에는 이긴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 아내와 가족을 아끼고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겉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Premium Chosun ☜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myjin55@hanmail.net

    ;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