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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전염병-기근 해결사 ‘재상 정태화’ 있었다

浮萍草 2015. 7. 14. 18:10
    난해 세월호 사고와 올해 메르스 사태를 연달아 겪으면서 정부는 리스크 관리 능력 부재를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정부는 메르스 사태 초기에 체계적인 대응을 못한 데다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한 컨트롤타워 역할도 제대로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조선 시대엔 국가 재난 발생 시 ‘재상’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다. 효종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리스크 관리와 대응을 주도했던 재상 정태화(鄭太和·1602∼1673)는 명재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지만 ‘리스크 관리’에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재임하던 기간은 재난이 극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7세기 전후는 소빙하기로 지구의 기온이 내려가면서 세계적으로 자연재해,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했다. 특히 현종 때는 거의 매년 재난과 기근이 발생했다. 역사상 최대 기근으로 기록된 ‘경신대기근’(1670년 경술년∼1671년 신해년)도 바로 현종 11년과 12년에 걸쳐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기를 암흑기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조선 최대 개혁이라는 대동법이 탄생했고 민생 안정을 위한 각종 시스템이 만들어진 시기로 알려져 있다. 정태화는 바로 이런 변화를 이끈 인물이었다. 재상 정태화의 강점은 리스크 관리에 있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그는“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처해 일을 그르친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그전까지는 문제 발생 시 얼마나 신속하게 대처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던 조선의 위기 관리 시스템을 사전 예방 시스템으로 바꿨다. 정태화는 흉년을 대비해 대동법을 연안 지역뿐 아니라 내륙,산야 지역 고을까지 확대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또 현종 2년에는 진휼청을 상설 기구화해 기근,질병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는 상시 대비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그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문제가 해소되기 전에는 과잉 대응이 최선의 대응이라는 방침을 유지했다. 정태화는 ‘신뢰 리스크’ 관리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흉년이 발생하자 관리들의 월급 삭감을 주장했다.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관리가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 또 흉년으로 어린아이에게서 받는 베를 감면해주려던 계획을 재원 손실이 크다는 이유로 취소하려고 하자 백성들이 조정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며 강행을 주장하기도 했다. 정태화는 효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 20여 년간 정부의 리스크 관리를 주도한 인물이다. 신뢰 관리와 운영 리스크 관리에 집중해 대비책을 수립하고 정책 오판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조선이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럼에도 정태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직접 정책을 기획한 사람이 아니라 정책이 본래 목적에 맞게 시행되도록 돕고 그에 따른 리스크를 관리해 주는 ‘지원자’였기 때문이다. 실제 기업에서 경영지원 부서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지원자’ 없이는 사업이나 정책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효종과 현종이 늙고 병들어 관직을 사직하고자 한 정태화를 한사코 붙잡아둔 이유는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1인자와 구성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2인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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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 정리=장재웅 동아일보 기자 jwoong0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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