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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암살 밀명받은 독립군, 문 박차고 방아쇠 당기자…"

浮萍草 2015. 8. 28. 18:48
    육사8기 특별4반 한 독립군의 기록
    육군에서 날아온 아버지의 독립군 기록과 공식문서 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사는 정복성(80)씨는 지난 7월 25일 충남 계룡시에 있는 육군본부로부터 날아온 한 장의 행정우편을 받아들었다. 육군본부 병적관리과 최준호 중령이 보낸 한 장의 공문에는 정씨의 아버지 정관우씨의 병적기록이 적혀 있었다. ㆍ‘계급 중위, 군번 13209, 성명 정관우,임관일 1949년 3월 29일, 기수 육사8기.
    육본 공문을 받은 지 일주일 뒤.서울 노원구 화랑로의 육군사관학교로부터 재차 날아온 육사 초기 졸업생 현황에는‘육사8기’ 졸업생들의 현황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육본에서 보낸 아버지의 병적 기록과 임관일(1949년 3월 29일)이 동일한‘육사8기 특별 제4반’,특히 5주 교육을 받고 1949년 3월 29일 1차로 졸업한 생도들의 설명에는‘광복군/독립군 출신의 고령자와 과거 장교 복무 군사경력자 148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받아 든 정씨는 두 팔을 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말로만 전해온 아버지의 독립군 기록이 육군본부와 육군사관학교 공식문서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  1958년 정관우(아버지, 왼쪽부터)·정복성·장영숙(어머니)씨. /정복성씨 제공

    육사8기는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주 4·3사건(1948년),여순반란사건(1948년) 등을 계기로 군 간부의 대폭 증원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선발한 기수다. 김종필,김형욱,윤필용 등 소위 ‘5·16 혁명주체세력’들을 대거 배출한 기수로 1000여명이 입학해 1263명이 졸업했다. (졸업 시 특과 후보생 335명 추가) 6·25전쟁 때 동기생의 3분의 1이 전사하는 등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기수기도 하다. 이 중 ‘육사8기 특별 제4반’은 광복군·독립군 출신 고령자로 편성된 반이다. 육사가 보낸 공문에 따르면 2기, 3기, 4기 졸업생 현황에는 광복군·중국군·만주군·일본군 출신 등이 혼재돼 있지만 육사8기 특별4반에는 독립군과 광복군(1940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든 부대)만 언급돼 있다. 일종의 독립군 광복군 출신 노인 부대였던 셈이다. 당시 250명(1차 148명,2차 99명)이 입학했는데 부자지간,장인,사위가 동시에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육사 정훈공보실의 장민지 대위에 따르면,육사에서 파악 중인‘육사8기 특별4반’의 생존자는 38명 정도. 하지“편지를 보내면 거의 대부분 반송돼 실제 생존자는 많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893년생으로 당시 나이로 56세에 군에 입대한 정씨의 아버지 정관우는 필시 이 중 한 명이다. 육사8기 특별4반 출신 오철환(87) 총무는“우리 명단이 있는데 정관우란 사람은 중위로 제대한 것으로 나온다”며“지금 생존자는 6명으로 독립군 출신들은 다 돌아가셨고 내가 제일 막내라서 총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육사8기 특별 4반 출신 강석준(90) 회장은 주간조선에“당시 가장 어린 사람은 23살 정도 됐었고 독립군 출신들은 다들 나이가 많았다”며“지금은 다 죽었는데, 정관우란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서울 당산서중 교감을 마지막으로 퇴임한 정복성씨는 아버지 정관우의 기록을 찾아 올 초부터 백방으로 수소문해 왔다. 아버지의 병적 기록을 찾기 위해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서울지방 병무청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경인지방 병무청도 찾아갔다. 하지만 너무 옛날 기록이라서 병무청에서는“충남 계룡시 계룡대에 있는 육군본부로 가보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올해 나이로 80세인 정씨는 지난 7월 21일 육군본부가 있는 계룡시까지 찾아갔다. 그 성과가 이제야 나온 것이다. 지난 8월 11일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의 한 교회에서 만난 정씨는 옛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눈시울이 간간이 불거지기도 했다.
    ㆍ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flatron2@chosun.com 1982년 경남 진해의 어촌마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산고를 나와 한양대에서 사학(史學)과 아태경제통상을 전공했다. 2007년 조선일보 47기 수습기자로 입사해 현재 주간조선 기자로 근무 중이다. 서방 기자 최초로 마오쩌둥(毛澤東)을 인터뷰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과 퓰리처상 수상자로 뉴욕타임스 모스크바특파원을 지낸 해리슨 E. 솔즈베리의 ‘대장정’과 ‘새로운 황제들’을 읽고 중국 전문기자를 꿈꾸게 됐다. 국내 언론 최초로 시진핑 주석의 부친(시중쉰) 묘소와 모친(치신) 별장을 소개했 천안문사태로 망명한 반체제 작가 류짜이푸(劉再復)와 인터뷰했다. 대만 홍콩,마카오 등 중국의 변방과 소수민족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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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후에 아버지의 독립투쟁 사실을 전한 어머니
    제강점기이던 1935년 정복성씨는 중국 베이징의 왕푸징대가(王府井大街)의 대완부후통(大阮府胡同) 골목길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나고자랄 때는 아버지(정관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1945년 광복 후부터는 어머니(장영숙)로부터 아버지의 활약상을 숱하게 들었다. 
    독립군으로 만주에서 활동해온 아버지(정관우)가 3·1운동(1919년)이 끝난 1920년 즈음 고향인 평양으로 잠입해 평양 주재 일본인 경찰간부를 총으로 저격한 뒤 
    만주로 도망다닌 등등의 이야기였다
    중국 만주와 베이징을 돌면서 삯바느질과 식당 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이 일을 광복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전해온 이 같은 이야기의 일부를 육군본부와 육군사관학교의 공식문서로 확인했으니 정씨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씨의 아버지인 정관우는 구한말인 1893년 지금의 북한 평양시 수옥리 65번지에 태어났다. 
    ▲  정관우의 딸 정복성씨.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후 20세 되던 해인 1913년,정씨의 어머니인 장영숙(당시 14세)과 결혼해 평양시 전구리 115에서 소금장사를 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어머니 장영숙은 평안남도 강서군 화리면 남호리 사람이었다. 결혼 4년 후인 1917년에는 큰아들(정대성)도 태어났다. 살아생전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한창일 때 아버지 정관우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행진대열에 합세했다. 하지만 일본인 순사들은 조선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검거하고,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팼다. 그때 아버지는“삼엄한 분위기에 쫓길 바에야 차라리 독립군이 되어 당당히 일본과 싸우는 것이 대한의 건아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이듬해인 1920년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만주로 떠났던 아버지가 평양으로 돌아온 것은 같은 해 늦은 겨울쯤이다. 야음을 틈타 작은 배를 타고 압록강을 도강해 평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일본인 경찰간부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평양시 수옥리에서 태어난 뒤 전구리에서 소금장사로 생계를 꾸려온 아버지(정관우)는 평양 골목골목을 눈 감고도 찾을 만큼 익숙했다. 목숨이 걸린 암살과 같은 일을 맡기에는 더없이 적역이었다. 3·1운동 직후에는 이런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의 신문들을 검색해 보면“조선인 불령선인(독립군)들이 평양에서 파출소 등 치안기관을 습격하는 등 크고작은 소란을 피웠다”는 기사를 종종 검색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직전이라 기사는 안 나오지만 정씨의 아버지(정관우) 역시 이 같은‘불령선인’들 가운데 한 명으로 추정된다. 결국 목표물을 추적한 아버지는 근무시간이 아닌 이른 아침,공격 대상자를 발견했다. 당시 경찰복은 갖추지 않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때 아버지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받아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정씨는 “아버지는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내가 해냈구나, 나는 잡히더라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그 길로 수옥리의 집으로 도망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평양에 다시 들어온 사연을 말 하고 만주의 주소를 쓴 쪽지 한 장을 남기고 황급히 떠났다. 당시 어머니는 ‘둘째 딸(정인성)을 낳고 해산한 지 채 100일도 안 된 젖먹이 산모였다. 어머니에 따르면 새벽에 느닷없이 아버지가 나타나 대문을 빨리 열라고 하더니 긴장된 얼굴로 엄청난 말을 두서없이 몇 마디를 남기고 곧장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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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투쟁을 벌인 아버지와 달리 고난한 삶을 살게된 어머니
    머니는 꿈인지 생시인지 한동안 넋을 잃은 듯 멍했다. 
    며칠 후 어찌 알았는지 경찰서에서 순사가 찾아와“남편을 내놓으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결국 경찰서 영창에도 수감됐다. 
    다행히 3·1운동(1919년) 이듬해인 1920년 갓 태어난 둘째 딸 인성이 영창에서 젖도 안 먹고 보채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영창을 지키던 일본인 순사는“시끄럽다”고 고래고래 야단을 치다가 “애기 엄마는 집에 가서 있으라”고 내보내 줬다. 
    어머니는 “남편도 없는데 네가 엄마를 살리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울음으로 어머니를 살린 정씨의 언니 인성은 20세가 되던 해 베이징에서 임파선암에 걸려 죽는다. 
    정씨는“아버지는 언니가 죽은 뒤 내가 이름을 너무 큰 이름(仁成)으로 지어 딸이 일찍 죽었다”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후 평양 거리에는 방이 내걸렸다고 한다. 
    ‘현상금이 붙은 사나이’로 아버지(정관우)의 이름은 알려졌다. 
    조선인 통역을 대동한 일본인 순사도 전구리의 집을 들락거렸다. 
    “남편 있는 곳을 대라”며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니는 “남편이 작년(1919년)에 가족을 몰라라 버리고 떠났는데 나도 소식을 모르니 답답할 뿐이다.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당장 알려주겠다”고 둘러댔다.
    결국 그해를 그렇게 넘기고 1921년 3월 어머니 장영숙은 살림 밑천인 재봉틀(싱가미싱)과 가재도구를 대충 챙겨 남매(당시 아들 5세, 딸 2세)를 데리고 새벽 길을 
    떠났다. 
    만주에 있는 남편을 찾아 떠난 것이다.
    이후 만주 길림(吉林)에서 살면서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았다. 
    제법 사교성이 있어서 동네 중국 여성들과도 친하게 어울렸다. 
    중국 여성들이 좋아하는 누비신발(멘시에)도 만들어주고 의형제도 맺었다. 
    정씨에 따르면, 어머니의 양팔에는 일곱 개의 점이 있었다. 
    한 팔에 네 개, 한 팔에 세 개의 좁쌀 같은 점이 줄줄이 일직선상에 배열돼 있었다. 
    후일 정씨가 6·25 피란 시절에 어머니에게 물어보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이제 아이들이 컸으니 말해줘도 되겠지요”라고 한 뒤“일곱 명의 중국 여성과 의자매를 
    맺은 증표”라고 털어놨다.
    당시 중국 풍습에 따르면, 의형제나 의자매를 맺으려면 그 표식으로 바늘 낀 실에 먹물을 묻혀서 팔 안쪽의 살갗을 뜬다고 했다. 
    이 좁쌀 크기의 문신을 서로 양팔의 똑같은 위치에 새기는 것 의형제나 의자매를 맺을 때 팔의 같은 위치에 문신을 새기는 것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중국 사람들만의 독특한 풍습이었다. 
    어머니가 중국의 일곱 자매와 의자매를 맺은 덕분에 독립군 단복도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마침 일손이 달리는데 의형제를 맺은 중국 여성들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따르면 겨울에는 솜을 넣은 누비옷을,여름에는 광목으로 홑겹 단복을 만들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만주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28년 만주의 지배자였던 장쭤린(張作霖)의 폭사사 1931년 만주사변 발 1932년 청(淸)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빼돌려 옹립한 괴뢰정권 만주국 성립 등 
    만주 정세가 요동을 쳤다. 
    일본군이 사실상 전 만주를 장악하면서 독립군에도 위기가 닥쳐왔다.
    ▲  정관우(오른쪽)·장영숙 부부. /정복성씨 제공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군을 피해 처음에는 북쪽의 하얼빈으로 이후에는 랴오닝성 봉천(지금의 선양)으로 도망갔다. 아버지는 여전히 수배자 신분이었다. 마침 봉천에 있을 때“중국인으로 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인으로 귀화했다. 당시 중국인으로 귀화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했다. 더욱이 중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할 수 있어서 다소나마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정씨의 가족들은 베이징까지 내려와 왕푸징에 자리를 잡는다. 당시 베이징은 명목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의 치하였다. 정씨가 태어난 곳도 베이징의 왕푸징이다. 정씨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정씨는 1935년 중화민국(장제스 국민당 정권) 베이징시 왕푸징대가 대완부후통에서 태어났다고 나온다. 왕푸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중국인 신분으로 월세를 얻어서 ‘제일식당’이란 조선 식당을 운영했다고 한다. 마침 어머니도 오래된 재봉일로 냉병을 얻어 삯바느질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계속 재봉틀에 올라앉아 일을 한 때문인지 냉병을 얻어 하혈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친정이 있는 평양으로 몰래 들어가 자궁수술까지 받았다. 당시 의사는 “더 이상 바느질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각별해 식당 일을 하면서 냉면,만둣국 등을 잘 만들어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김치 맛이 유명해 베이징에서도 입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면, 아버지는 바로 옆 동안(東安)시장으로 가서 식재료를 사왔다. 동안시장은 지금도 ‘신동안(新東安)시장’이란 현대식 쇼핑몰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돈도 곧잘 벌었다. 특히 이 식당에는 아버지의 친구분들도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정복성씨는“광복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식당에 가끔 들렀던 어르신들이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군 활동을 함께했던 투쟁동지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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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세가 된 아들이 회고한 아버지의 기록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찾아왔다. 
    정씨에 따르면 당시는 중국 톈진(天津)에서 인천으로 들어가는 귀국선이 운행됐다고 한다. 
    이에 정씨(복성)와 오빠(대성)는 먼저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에는 마침 정씨의 오빠인 정대성의 처가가 목회 일을 하면서 신당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듬해인 1946년 톈진에서 뜨는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큰아들이 있는 서울로 넘어왔다. 
    정씨는“오빠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어서 평양이 아닌 서울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해방정국 와중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돈은 상하이의 한 무역상에게 맡기고 왔는데 결국 사기를 당해 다 날려버렸다고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아버지(정관우)는 군에 투신을 하게 된다. 
    정씨“아버지는‘최덕신 장군의 추천이 있었다’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했다. 
    최덕신 장군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독립군 출신으로 육사3기로 입교해 곧장 육사교장(1948년)을 지냈다. 
    후일 박정희 정권에서 주서독 대사와 외무장관을 지내고 1976년 돌연 미국으로 망명한 뒤 전두환 정권 때인 1986년 북한으로 월북한 남한 최고위 인사다. 
    북한에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고 ‘민족과 운명’이란 영화를 남기고 지금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하지만 군에서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정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나이도 고령(56)인 데다가 정규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성격은 곧고 꼬장꼬장한 편이었는데 당시 한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의 잔재가 남아서 무척이나 썩은 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정씨는 “아버지가 장교였는데도 당시 부관들이 일반인은 구경도 하기 힘든 고기를 싸들고 집에 찾아와 호통쳐서 쫓아낸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전남 순천강원도 춘천,경기도 수원 등지로 3개월이 멀다 하고 근무지를 옮겨 다녔다. 
    정씨는“아버지가 하도 많이 전근을 다녀서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정씨는 아버지가 1949년 12월 중위로 전역한 뒤에는 공부에 몰두해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학교사로 일했다.
    이후 군에서 나온 직후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정씨 가족들은 할 수 없이 부산 영도까지 내려가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서울수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늘 조국을 위해 할 일을 찾았다고 했다. 
    정씨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으로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담은 편지도 손수 적어 보냈다. 
    또“언제 나라에서 다시 부를지 모르니 몸이 튼튼해야 한다”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난 제자리뛰기를 천 번씩 했다고 한다. 
    또 가족과 친구들이 집을 찾아오면“우리 민족이 세계 일등국민이 되려면 바른 마음 ‘정심(正心)’을 가지고 바르게 깨닫는‘정각(正覺)’,바르게 행동하는‘정행(正行)’
    을 해야 한다”며 일장 훈시를 늘어왔다고 한다.
    생계는 정씨의 오빠인 정대성과 딸 정복성씨가 꾸려 나갔다. 
    중국 톈진의 프랑스조계에서 토목을 배운 오빠 정대성은 광복 후 당시 국내 최대 토목건설사인 중앙건설에서 일했다. 
    정씨도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수학교사로 근무하면서 영어교사이던 김웅수씨(전 국립강원대 공과대학장)와 결혼을 했다. 
    2012년 사망한 김웅수씨는 서울대 광산공학과(에너지자원공학과의 전신)를 나오고 영어를 곧잘해 6·25 흥남철수 때 미 군사고문단 통역장교로 근무하기도 했다. 
    육군 대위로 제대한 뒤에는 인천제물포고와 서울고 영어교사를 거쳐 강원대 공대 교수로 공과대학장을 지냈다. 
    지금은 경기도 이천의 국립호국원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하지만 정씨의 아버지 정관우는 1966년 위암 판정을 받고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3세.정씨는“1966년 애지중지 키워 온 큰아들(정대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양팔에 일곱 개의 문신을 새기고 독립군 단복을 만들었던 어머니(장영숙) 역시 1991년 미국 LA로 이민간 오빠 정대성의 집에서 92세 나이로 사망했다. 
    현재 정씨는 아버지의 육본과 육사 기록을 근거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추서를 추진 중이다. 
    정복성씨는“그간 아버지(정관우)의 숨겨졌던 행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록이나 사진도 없었는데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아버지의 기록을 찾게 돼 감회가 
    새롭다”며“비록 내 나이 80세가 되었지만 뒤늦게나마 회고하게 돼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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