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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토막사건

浮萍草 2015. 8. 24. 13:53
    원래는 중국 자금성 크기… 그걸 일제가 지금처럼 토막냈다
    ▲  2010년 복원된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울에는 다섯 개의 큰 궁궐이 있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덕수궁)이 그것이다. 궁궐은 아니지만 궁궐 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진 종묘가 창덕궁 권역에 속해 있었고 경복궁 서쪽과 경희궁 북쪽에는 사직단이 있었다. 현재 궁장(궁궐 담장)으로 쳐진 경복궁의 부지만 해도 중국 자금성의 약 60%에 해당한다. 여기에 실제 궁궐 부지였던 청와대 일대와 궁궐 주변에 둘러싸고 있던 각종 궐외각사와 6조의 관아,별궁,군사시설까지 합하면 경복궁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다. 아마 5대 궁궐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가정하면,자금성이 명함을 내밀기 부끄러울 뻔 했다. 그러니 궁궐의 크기에 별로 주눅 들 필요가 없다.

    1901년의 한성부 지도에 표시된 5대 궁궐과 종묘. 우리 궁궐은 서로 맞닿아 있는 상황에 따라 크게 3개 권역으로 나뉠 수 있다. 조선시대 가운데 경복궁을 법궁으로 경희궁과 창경궁·창경궁 등은 이궁의 역할을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덕수궁이 정궁이자 황궁 역할을 했다. 경희궁은 서쪽에 있다고 서궐,창경궁과 창덕궁은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했다. 지도에 표시 되지 않았지만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는 운현궁이 있다. 5대 궁궐은 요즘에는 빌딩숲이나 도로로 인해 구분이 비교적 쉽다. 하지만 구한말까지만 해도 서로 담장이나 숲,후원,산으로 맞닿아 있어 드넓은 궁궐 부지를 명확하게 구분짓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창경궁 후원격인 함춘원(경모궁)이 현재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있었다. 그 부지가 현재의 덕수궁보다 크다. 게다가 창덕궁은 종묘와 이어졌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사저였던 운현궁은 경복궁과 종묘 사이에 있다. 이렇듯 창덕궁·경희궁·경모궁 문묘·종묘만 연결해도 그 크기가 자금성을 넘어선다.
    ▲  경희궁과 경운궁을 잇는 홍교(1902년).다리 아래로 전차가 다닌다.
    ㆍ5대 궁궐 외에 인왕산-경복궁-안국동 쪽에 별궁 즐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별궁도 수없이 존재했다. 인왕산 안쪽에 선희궁과 경우궁을 비롯,현재의 경복궁 서편을 중심으로 자수궁,창의궁,어의궁,어의동 본궁 등이 있었다. 종로와 안국동 쪽에도 수진궁, 용동궁, 안동별궁 등이 있었다. 이들 별궁과 궁외에 있던 여러 전각 부지만 합해도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궁궐을 이야기할 때, 흔히 궁장(궁궐 담장)을 기준으로 궁궐의 담장 안쪽을 지칭한다. 하지만 기능이나 여러 가지 부대시설과 업무 공간이 궁장밖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경복궁의 경우, 공식적인 영역은 남쪽의 광화문에서 북쪽 신무문까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현재의 청와대 자리와 비서실,경호실 자리가 모두 궁궐에 속하는 영역이었다. 이곳은 후원(상림원),농사일 관장(경농재),군사훈련(경무대) 등을 위한 다양한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  고지도에 경복궁 부분을 확대해보면, 궁궐 담장 주위로 종친부와 사간원 등의 관청이 가득하고, 광화문 6조 거리에도 각종 관청이 가득 들어서 있다. 경복궁
    서측에 제법 큰 창의궁(1908년까지 존속)이 보인다.경희궁 앞에도 몇 개 관청이 보인다.궁장(궁궐담장)으로 둘러싸인 궁궐 본토 외의 후원과 관아,궁궐에 딸린 숲
    병영터,별궁들에 대한 별도의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ㆍ궁궐에 미처 다 들여놓지 못한 공간들인 ‘궐외각사’가 궁궐 둘러싸
    이게 다가 아니다. ‘궐외각사’라고 해서,궁궐에 미처 다 들여놓지 못한 관아의 업무공간을 궐밖에 두었다. 경복궁의 동쪽 건춘문과 서쪽의 영추문 일대의 궁장 밖에는 궐외각사에 소속된 각종 관청이 있었다. 왕실족보 관리 기관인 종부시,공주·옹주·군주(郡主)·현주(縣主) 등과 혼인한 부마(駙馬)에 관한 일을 관장했던 의빈부를 비롯,중추부,종친부,의금부,사헌부,사간원, 내시부,사직서,체부청,전의감,한성부,돈녕부,비변사,승문원,소격서 등의 관청이 궁궐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특히 경복궁 동쪽과 안국동 쪽에 있는 각종 관청은 창덕궁과 가교 역할을 했다. 광화문에서 현재의 광화문 사거리까지 세종로 거리는 잘 알려진 6조 관아가 들어서 궁궐과 한몸처럼 움직였다. ㆍ5개 궁궐이 나뉘어진 듯 하면서도 하나인 듯 ‘조화’
    우리 궁궐의 특징은 정궁인 경복궁을 제외하고는 산세와 지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지어졌다. 그래서 마치 5개의 궁궐이 나뉘어진 듯 하면서도 하나인 듯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면, 현재 서울시청 옆에 있는 경운궁은 북쪽으로는 경희궁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한문 앞쪽 소공동 환구단 자리는 원래 남별궁이 있던 곳으로 사실상 경운궁 영역에 속해 있었다.
    ▲  광복 직후인 1946년 미군정청이 찍은 경복궁의 모습.마치 불도저로 밀어버린 듯 깨끗하다.조선총독부 건물만 덩그렇게 보이고,경회루와 근정전 외 남아 있는
    전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재 서울시청을 포함하는 덕수궁에서 6조 거리,경복궁,경희궁,사직을 크게 한 덩어리로 보면,사대문 중앙과 서북쪽을 거의 다 차지하는 범위로 그 크기가 어마 어마하다. 경복궁 서쪽에 있는 경희궁(서궐)과 덕수궁은 사실상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러시아 대사관에서 언덕만 내려오면 바로 경희궁이다. 구한말에는 이 두 궁 사이에 홍교라는 다리를 놓아 실제 쉽게 오갈 수 있도록 했다. 경희궁은 다시 북쪽문을 통해 사직단과 이어졌다. 경희궁과 경복궁 사이 사직단 북쪽에는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경희궁과 경복궁 사이의 넓은 부지에는 각종 별궁과 정부 시설,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경희궁 정문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6조거리를 통해 경복궁과 연결된다. 덕수궁 북쪽 현재 경기여고 터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선원전이 있었는데,이곳에서 바로 길만 건너면 6조 거리를 통해 경복궁과 연결됐다. 이밖에 중구 저동에는 영희전이 있었다. 이는 태조·세조·숙종·영조·순조 등의 어진을 모셨던 큰 규모의 전각이 있었다. 영희전 전각은 1900년에 창경궁 앞 경모궁터로 이전했다.
    Factoll        이상흔 월간조선 기자
                                            草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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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에 잇달아 의문의 화재… 일제가 돌담길 뚫고 1/3로 줄여
    ▲  오늘날 남아 있는 덕수궁 전경. photo=문화재청
    제 궁궐을 하나씩 둘러보자. 먼저 덕수궁으로 더 많이 알려진 경운궁이다. 덕수궁은 원래 부왕이나 상왕의 만수무강을 위해 그들이 머무는 궁궐에 대해 한시적으로 붙이는 명칭이다. 고종 황제 사후 당연히 정식 명칭인 경운궁으로 환원되어야 했지만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유지됐다. 그러는 사이 덕수궁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오다(小田星五)<덕수궁사>에 전하는 경운궁 평면도.붉은 색이 현존하는 건물이고,노란색 영역은 일제에 의해 사라진 건물이다.사진의 1번 영역은 미국
    영사관,2번은 영국영사관,3번은 러시아 영사관이다.러시아 영사관 옆으로 경희궁으로 넘어가는 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photo=대원사 <덕수궁>에서 발췌

    ▲  위 평면도를 통해 덕수궁의 영역을 표시해 본 것이다.현재 서울시청 광장 자리는 덕수궁 경운궁 궐내각사가 있던 곳이며,대한문도 현재보다 앞으로 많이
    나왔다.고종 당시 조성된 미국대사관저와 영국대사관 터는 아직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가운데 덕수궁 돌담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경희궁과 경운궁 사이
    에는 상림원이라는 경운궁에 딸린 후원이 있었다.러시아 대사관은 이 상림원 부지 일부를 매입해서 건립했다. photo=다음지도

    ▲  원래의 경운궁 정전인 중화전의 모습.다른 정전과 마찬가지로 2층의 웅장한 모습이다.뒤편에 서양식 구성헌 건물이 보인다.1904년 화재 후 중화전은 현재 남아
    있는 단층 건물로 지어졌다.

    ▲  운궁 함녕전(고종의 침전)의 정문이었던 광명문은 오늘날 제자리를 잃고,흥천사 종과 자격루를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대한제국의 광명을 바라는 고종의
    염원이 깃든 문이지만,궁궐 한 구석에서 본래 기능을 상실한 채 쓸쓸하게 서 있다.

    현재 우리가 보는 경운궁은 1910년 보다 면적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규모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건물은 대여섯 채가 겨우 살아 남았다. 우리가 경운궁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경운궁은 우리나라 최초의 황궁이자,유일한 황궁이라는 점이다. 경복궁에서 아관파천 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황제는 1897년 경운궁으로 옮겨온 후 곧바로 대한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  환구단.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남별궁 부지위에 세운 제국의 상징이다.일제는 합방 후인 1913년부터 곧바로 이를 철거하기
    시작했으며,부지는 팔아버렸다.현재는 황궁우만 남아 있다.대한제국의 상징인 이 건물은 다른 곳에라도 장기적으로 반드시 복원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  오늘날의 환구단 모습.대한문에서 바라 본 모습이지만,호텔숲 속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그나마 최근에 사진에 보이는 환구단 정문도 복원지만,제 위치는
    아니다.
    ㆍ경운궁(덕수궁): 아관파천 후 황궁 면모 갖췄지만 화재로 대부분 잿더미
    고종황제가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은 명실상부한 황궁으로서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4개 대문을 갖추고,정전인 중화전,침전인 함녕전,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황실 도서관인인 중명전 등 수많은 전각이 새롭게 배치됐다.
    ▲  1904년 대화재 전의 덕수궁 모습. 왼편에 보면 궁궐 정면을 둘러싼 담을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1904년 대화재가 발생, 그동안 신축했던 중요 건물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조선을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에게 고종황제는‘눈엣 가시’같은 존재였다. 경운궁에 고종이 거처하는 것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고종은 잿더미의 덕수궁을 다시 한번 재건했다. 1905년 즉조당, 석어당,경호전,함녕전 등이 중건 되었고 이듬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궁궐의 정문으로 삼았다.

    ▲  화재로 잿더미가 된 경운궁(위).고종황제는 이에 굴하지 않고,곧바로 궁궐 재건에 들어가다.아래는 경운궁 화재에 대한 삽화 그림.백성들과 관리들이 광명문을
    통해 허둥지둥 뛰쳐나오는 가운데 일본군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  일제가 1922년 경운궁을 둘로 가르기 위해 만든 이른바 ‘덕수궁 돌담길’왼쪽이 미대사관저이고,왼쪽 정동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오른쪽 편은 사실상 덕수궁
    부지였다.구한말 이 일대에 각국 영사관이 밀집했는데,외교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유지하려던 고종의 몸무림과 무관치 않다.정작 나라가 망할
    때는 이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덕수궁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23년간 머물다가 결국 망국의 한을 품고 승하하는 모습을 지켜본 장소다.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고종이 승하하자 마자,일제는 기다렸다는 듯 본격적으로 궁궐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  고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신민들(위).아래는 고종의 장례 행렬이 대한문을 나와 오늘날 서울시청 광장 앞을 가로지르고 있는 모습.일본군이 욱일승천기를 앞
    세우고 행진하고 있다.고종의 갑작스런 죽음 백성들의 억눌렸던 반일 감정을 폭발시켰고,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ㆍ고종 승하하자 마자, 일제 본격적으로 궁궐 해체
    1922년 일제는 이른바 ‘덕수궁 돌담길’을 뚫으면서 고종이 외국 대사를 접대하던 돈덕전과 선원전 영역을 헐고 덕수궁을 둘로 갈랐다. 선원전에는 영친왕의 모친인 엄비(嚴妃)의 혼전(魂殿)이 있었지만,이곳에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를 지었다. 이것이 오늘날 빈터로 남아 있는 경기여고 부지다. 1933년엔 궁궐 내 대부분의 건물들을 팔아버리고 공원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우리나라 첫 황궁이 공원으로 전락한 것이다.
    ▲  1960년대 도로 확장으로 덩그라니 섬처럼 남은 대한문(조선일보 보도사진).이후 대한문은 뒤로 33m 정도 후퇴한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진다.이후 궁궐 담장도
    투시가 가능한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  해질무렵의 대한문(위).광복 70주년을 맞아 옆의 건물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다.정작 대한문은 큰 빌딩 숲에 짓눌린 모습이다.아래는 대한문 정문의 월대
    모습.제대로 복원하지 않고,그냥 돌사자를 바닥에 덩그렇게 놓아두었다.

    ㆍ경희궁: 경덕궁과 맞닿아 있었고, 육교인 홍교로 연결

    ▲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경희궁은 임진왜란 이후 근 300년 가까이 이 나라 정치의 질곡을 지켜본 중요한 궁궐이다.흔적도 없던 이곳에 최근 몇 개의 전각과
    회랑을 복원해 놓았으나,아직은 도무지 궁궐의 면모가 서지 않는다.아래는 동국대 정각원으로 사용중인 원래 숭정전의 모습.

    ▲  러시아 공사관 언덕에서 내려다본 경희궁.빌딩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이곳 어디를 통해 예전에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하는 홍교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에 서울 역사박물관의 모습이 보인다.

    경희궁은 광해군 이래 300년 간 이궁(離宮:화재나 의외의 재난에 대비하여 만든 궁궐)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며,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있던 궁이다. 정조,헌종,철종 등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했고 정사를 돌봤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원래 경복궁 옆 인왕산 아래 인경궁과 함께 지었지만 인경궁은 사라지고 경희궁은 구한말까지 제 위치를 지켰다.
    ▲  경희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서궐도.남아 있는 도안 그림에 채색을 한 것이다.경희궁의 전체모습을 그린 것으로 정문인 흥화문이 동쪽을 향해 나있다.

    경희궁의 전경을 그린 서궐도를 보면,정문인 흥화문이 오늘날 구세군 회관쪽에서 종로와 마주보며 동쪽을 향해 나있다. 거기서 약 400미터 안쪽에 정전인 숭전전이 남향을 하고 서 있다. 서쪽으로는 서대문과 맞닿은 성벽이 궁궐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직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경덕궁과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었으며,두 궁궐은 육교인 홍교가 연결되어 있었다. 흥화문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6조 거리가 나왔기 때문에 경복궁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경희궁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사용할 비용 마련을 위해 많은 전각이 헐렸다. 그래도 주요 전각과 부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국권이 강탈당한 후에는 전각은 물론이고 부지까지 완전히 없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  일제는 서울 장충단 동쪽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를 세우고,그 북쪽 입구로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옮겨왔다
    ㆍ일제 경희궁 부지 전매국에 넘겨…남은 곳엔 일본인 학교 세워
    1910년 일제는 경희궁 부지를 전매국에 넘기고 남은 부지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웠다. 또한 궁궐 일대를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높은 지형은 깎아내고 낮은 지형은 메워버렸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계사에 매각,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현재 이 건물은 동국대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  헐리는 경희궁.정문인 흥화문 주변에 이미 담장과 전각이 보이지 않는다.비운의 흥화문이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1932년 남산 자락에 세운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옮겨졌다. 1988년까지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현재 위치로 이전했지만 제 위치에 복원하지 못한 채 남향을 유지 하고 있다. 왕의 침전이던 회상전은 임시소학교인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쓰였다. 이후 1928년 조계사에 매각,주지 집무실로 사용되다가 소실되었다. 임금의 편전인 흥정당은 광운사로 옮겨 세워졌고,확학정은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그나마 아직도 활터에 건물이 남아 있는게 다행이랄까. 어쨌든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은 지도상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br>

    ▲  위 1909년 대 초기에 제작된 지도에 경희궁이 표시되어 있다.지도의 왼쪽 하단 넓은 공터다.경희궁의 서쪽 경계는 서대문과 이어지는 성곽임을 알 수 있다.
    하단 지도는 1958년 지도인데 경희궁터에 서울중학교가 표시되어 있다.


    ▲  오늘날 성곽 바깥쪽은 경희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위쪽 사진 성곽 안쪽이 경희궁 부지다.

    ▲  역사박물관 자리 앞에 복원한 경희궁의 금천교.동쪽 종로와 일직선상으로 놓였다.맞은편에 보이는 구세군회관 건물 쪽에 흥화문이 있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전경.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마련한 경희궁 부지에 박물관을 지어놓았다.


    Factoll        이상흔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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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7200칸 경복궁 전각 헐어 ‘요정’으로 사용
    ▲  창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그린 동궐도. 고려대학 소장본이다. 오늘날 동궐도는 고려대와 동아대본 두 본이 남아 있다
    ㆍ창덕궁: 순종 황제 임종한 곳…상대적으로 훼손 덜해 5대 궁궐 중에 창덕궁은 그나마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이다. 순종 황제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훼손이 덜 했다고 한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자,대신 조선의 정궁으로 역할을 해온 곳이다. 창덕궁은 동쪽의 경희궁 영역과 더불어 사실상 하나의 궁궐이었으며, 서궐로 불렸다. 서궐은 면적이나, 궁궐 조성에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모습


    ▲  인정문과 인정전. 조선 중기 이후 대부분의 왕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열었다. 주인을 잃은 궁궐에 잡초만 무성하다.

    창덕궁은 1917년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화재로 수많은 서화와 귀중품이 소실되었다. 이는 일제의 고의적인 방화사건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창덕궁 복구를 구실삼아 경복궁의 주요 전각을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현재 종묘와 창덕궁을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일제가 이곳에 길을 낸지 83년 만이다. 원래 이곳은 역대 임금들의 영령들이 넘나들며 후손들이 정사를 잘 보살피게 돌볼 수 있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창덕궁 남쪽 종묘까지 궁궐의 권역에 속했지만 1931년 일제가 도로(현 율곡로)를 만들면서 원래 하나의 권역이었던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갈라 놓았다. 현재 서울시는 이 구간에 약 300m터 길이의 터널을 내어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ㆍ창경궁: 동물원 들어서는 등 일제로부터 가장 치욕 겪어
    창경궁은 일제로부터 가장 치욕을 겪은 궁궐이다. 동쪽의 궁장(궁궐담장)은 서울과학관을 포함, 성균관대까지 이어졌다.
    ▲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옛모습.

    ▲  현재 창덕궁 서쪽 궁장을 따라가 보면 궁궐 담장에 붙어 지은 민가들이 담을 따라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황제에서 강제 퇴위시키고,순종을 황제로 앉혔다. 그 후 순종은 아버지와 떨어진 채 창덕궁에 기거하게 되는데,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까지 만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상황에 대해 ‘동물원을 수축할 차로 동궐(창경궁) 선인문 안에 있는 전각을 몰수히 허는데 그 중에 천여 년 된 옛 전각도 또한 훼절한다더라’ 고 적고 있다. 일제는 궁궐에 벚꽃을 심었다. 일제는 고종과 순종이 살아 있을 때 이런 야만적인 행위를 벌인 것이다. 창경궁 맞은 편에 있던 넓은 부지는 후원인 함춘원(경모궁) 일대였다. 하지만 일제가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세우면서 부지와 전각이 모두 훼손됐다.
    ▲  자리에 영희전의 모습. 1932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앨범에 실린 사진이다. 영희전은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 의 영정 을 모셨던 전각.

    ▲  서울대 병원이 들어선 함춘원(경모궁) 일대. 경희궁의 후원이자, 역대 선왕의 영정을 모시던 영희전이 있던 상당한 넓이의 궁궐터다.
    ㆍ경복궁: 해방되자 7200칸의 광활한 궁궐 전각은 10%도 안 남아
    ▲  1890년경의 경복궁. 훼손되기 전의 모습으로 웅장한 위용이 드러난다. 현재는 사리진 서십자각의 모습이 선명하다.

    ▲  광화문 앞 6조 거리의 모습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영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궁궐이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세워져 정치의 중심에 서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지만, 망국과 함께 또 다시 수난을 겪는다. 왕조의 상징이었던 만큼 일제는 경복궁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이런 수모 속에서도 한 가지 위안은 있다. 다행히 경복궁은 궁궐부지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화려했던 옛 모습으로 복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위는 1926년 개최된 일제의 조선박람회 홍보물이고 아래는 1923년의 조선부업품공진회 관광 홍보지도 모습. 일종의 관광가이드다. 궁궐을 전시회장, 공원, 놀이시설로 탈바꿈 시켰다.

    경복궁 부지가 남아 있는 것은 일본이 베푼 ‘호의의 결과’가 아니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발전을 홍보하기 위한 공간으로 경복궁 부지를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온간 박람회와 전시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경복궁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  1929년 사이토 총독의 조선박람회 폐회사.일제는 각종 행사를 근정전에서 열고, 총독이 용상에 올라 격려사를 했다.

    ▲  1929년 열린 조선박람회 때의 광화문 모습. 동쪽 건춘문 옆으로 옮겨진 광화문을 일본식으로 3층 누각형태를 만들어놓았다.

    경복궁 훼손은 나라가 공식적으로 망한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때부터 일제는 많은 건물을 팔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15년 조선을 강탈한지 5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시정오젼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는데,그나마 남아 있던 전각이 모조리 철거되고 전시공간으로 꾸며졌다. 1923년에는 조선부업품공진회, 1925년 조선가금공진회 1926년 조선박람회,1929년 조선박람회,1935년 조선산업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일제는 경복궁을 조선 근대화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해방이 되자, 330동, 7200칸의 광활한 궁궐의 전각은 10%도 남지 않았다. ㆍ왕 어진 모시던 곳을 이토 히로부미 사당에 팔아 창고로 사용
    ▲  조선총독부.

    경복궁 훼손의 결정타는 조선총독부 건립이었다. 1916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지진제(地鎭祭)를 지낸 후 1926년 건물을 완공했다. 1917년 창덕궁 화재를 복구한다는 구실로,침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을 헐었고,심지어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에 팔아서 창고로 사용했다. 그밖에 일제에 의해 팔린 경복궁의 전각은 절이나, 별장,요정,개인저택으로 활용되었으며,동궁인 자선당은 일본인 오쿠라라는 사람이 구입,일본으로 가져가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자선당은 관동대지진 때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1995년 조국으로 귀환했다. ㆍ총독부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국립민속박물관쪽으로 옮겨
    ▲  1916년 일본 오쿠라 호텔로 옮겨진 자선당.

    일제는 총독부를 가로막는 광화문을 현재의 건춘문 북쪽인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겨 버렸다. 광화문은 총독부 건물을 가린다는 이유로 헐릴 뻔 했다. 하지만 살아 남았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인 민속연구가가 ‘아! 광화문이여!’라는 시를 써서 일본 잡지에 발표한 것이다. 광화문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도움으로 겨우 헐리는 신세를 면하게 됐다. 일제는 당초 총독부 건물을 조선신궁 쪽을 바라보게 지으면서 광화문의 중심축도 틀어버렸다. 조선신궁은 남산에 조성한 일왕을 모시는 곳이었다. 광화문은 이후 박람회 정문으로 요란하게 치장되는 듯 온갖 순난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일제시대를 겪어냈으나 결국 6·25 전쟁 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  나라를 잃기 직 전의 근정문. 고종과 순종이 경운궁으로 옮기고 나서, 아무도 살지 않는 주인 잃은 경복궁에 잡초만 무성하다.


    ▲  광복 70년이 되도록 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동십자각. 서십자각은 아예 없어졌다. 동서십자각은 ‘궁궐’을 칭할 때 ‘궐’에 해당하는 것으로 궁과 떨어져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건물이다.


    ▲  경복궁 주변이 빌딩숲으로 둘러쌓여 있다. 원래 문화재 고도제한은 예외없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지만, 거리 측정 지점의 편법을 동원하면 무용지물인
    법이 된다.


    Factoll        이상흔 월간조선 기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