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한식의 탄생

[14] 빈대떡

浮萍草 2015. 6. 7. 16:00
    돈 없을 때 부쳐먹던 '貧者 음식'… 60年代부터 高價의 별미로
    국어 학습서'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1517년)에 나오는 '빙져(餠储)'는 빈대떡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사진〉. 빙져는 녹두와 찹쌀을 갈아서 부친 전(煎)으로 한문 설명이 붙어 있다. 1690년에 쓴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빙쟈'가 나온다. 17세기에 쓴'음식디미방'에는 빙쟈가 '빈쟈'로 바뀌어 나오고 19세기'광재물보(廣才物譜)'에는'빙자떡'이 등장한다. 20세기 들어 빈자떡은 빈대떡과 함께 쓰인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貧者)이란 속칭이 붙을 만큼 빈대떡은 일제강점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흔한 외식이었다. 빈대떡 원류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부 지역이었다. 황해도에서는'막부치'라 부르고 평안도에서는'지짐이'로 불렀다. 사리원과 그 주변은 녹두의 주산지였고 평안도는 중국의 영향으로 돼지고기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어 돼지기름으로 지진 빈대떡의 중심지가 되었다 빈대떡은 해방 전에는 서울에서만 사용한 말이었다. 서울의 빈대떡이 '도야지(돼지) 고기 넌(넣은) 것은 없어 그냥 녹두 가루에다가 우거지나 파만 섞어가지고'(1934년 4월호 신동아'인텔리와 빈대떡') 참기름에 지지는 것과 달리 평안도에서는 배추나 김치는 물론 돼지고기를 반드시 넣어(1948년 조선상식) 먹었다. 해방 후 평안도·황해도 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몰려들면서 돼지기름으로 지져낸 빈대떡이 본격적으로 서민 음식으로 등장한다. 서울의 빈대떡 집은 '거리나 골목은 말할 것 없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이 많은 빈자떡 집이 손님으로 터질 지경 이었다. '(1947년 6월 28일자 경향신문)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을 정도로 저렴했던 빈대떡은 녹두 가격이 쌀값의 두 배에 육박(1966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하는 한편 1960년대 분식 장려 운동으로 라면과 짜장면이 서민 음식으로 등장하면서 값이 꽤 나가는 별미로 바뀐다. 하지만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빈대떡의 제철이 겨울임은 변함이 없다.

    Premium Chosun ☜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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