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12] 기능올림픽 첫 금메달제화장(製靴匠) 배진효

浮萍草 2015. 6. 1. 08:00
    키 작아 책상다리 20cm 자르고 작업… 그가 만든 구두에 태극기가 꽂혔다
    7남매의 장남, 무작정 上京… 서울서 제일 큰 양화점 찾아가 밤이면 선배들이 만든 구두 뜯어 몰래 공부, 아침에 혼쭐나기 일쑤
    스페인 기능올림픽 自費로 출전… 하루 만에 과제물 뚝딱 만들고 스페인 공주가 온다기에 남는 시간, 룸 슬리퍼 만들어 선물해 '화제'
    1967년 첫 출전 땐 수출액 3억달러… 2013년 18회 우승, 5596억달러 수출 역대 기능올림픽 출전자 854명 중 80%가 여전히 현장 지켜

    ㆍ김기수가 챔피언 되던 날 경남도 북청 신창인민학교 5학년 김기수는 1·4후퇴 때 피란 내려왔다. 엄동설한에 돛단배 타고 포항을 거쳐 여수에 닿았다. 열두 살이었다. 처녀들이 이고 가는 물동이는 죄다 새총으로 깨버리는 악동이었지만 여수에서는 양담배와 신문을 팔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많고 많은 가난한 소년 중 하나였다. 6·25전쟁이 터지고 정확하게 16년이 지난 1966년 6월 25일 밤 9시 18분,스물일곱 살로 성장한 38따라지 김기수와 이탈리아의 권투 영웅 니노 벤베누티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을 두고 맞붙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남짓하던 그때 벤베누티가 요구한 대전료는 5만5000달러였다. 정부가 지급보증을 섰다. 주최 측은 TV중계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말이 되느냐"는 비난 여론에 경기 시작 40분 전에 KBS에 중계를 허용했다. 1000만원까지 올라갔던 중계권료는 정부 압력으로 2만원으로 조정됐다. 13라운드가 끝나고 벤베누티 쪽 링사이드 줄이 끊어져 소동이 벌어졌다. 결과는 김기수의 2대1 판정승이었다. 이튿날 카퍼레이드가 벌어졌다. 헝그리 복서 김기수는 가난한 시대 대한민국의 영웅 중 영웅이었다. 나도 챔피언이 될 거다.' 고등학생이던 홍수환은 그 카퍼레이드를 보며 인생을 결정했다. 비슷한 시각에 카퍼레이드를 구경하던 열여덟 살 제화공(製靴工) 배진효도 꿈을 꾸었다. "진짜 부럽다." 8년 뒤 홍수환은 남아공 더반에서 국제전화로 어머니와 통화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엄마가 대답했다.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배진효의 꿈도 이뤄졌다. 1967년 7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16회 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먹은 것이다. 함께 금메달을 딴 양복 부문 홍근삼과 배진효는'챔피언의 길'을 따라 지프차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대한민국이 또 한 번 열광했다.
    ㆍ"서울에서 제일 큰 양화점이 어디요?"
    어릴 적 배진효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놀았다. 진주 사람인 아버지는 일본에서 일하다가 광복이 되고 국제시장으로 흘러와 잡화점을 했다. 망했다. 배진효는 남포동에 있는 사촌네 양화점에서 놀았다. 구두 만드는 거 구경하며 놀았다. 점심마다 그 비싼 설렁탕을 시켜 먹으며 계산도 하기 힘든 주급(週給)을 타 가는 구두장이 아저씨들 부러워하며 놀았다. 1963년 위로 누나 다섯에 아래로 동생 하나 있는 장남인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하늘로 떠났다. 더 이상 시장 바닥에 있으면 집이 망가지겠다는 작은 책임감에 장남은 무작정 상경했다. 진효는 서울역에 내려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었다. "서울에서 제일 큰 양화점이 뭐요?" "칠성제화다." 무작정 명동에 있는 칠성양화점으로 찾아갔다. "기술 있으니 나 좀 써주소. 돈 안 줘도 좋소." 기술 없는 게 들킬까 봐 돈 안 줘도 좋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 보물단지였다. 1년 만에 진효는 여대생 단골이 우글거리고 미8군 장교 아내들이 굳이 찾는 여자 구두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밤이면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구두를 뜯었다가 아침에 혼쭐나기를 밥 먹듯 하며 공부한 결과였다. 한 미군 아내는 2년 동안 배진효한테 80켤레를 주문해 신었고 또 다른 아내는 귀국길에 10켤레를 들고 갔다. 어느덧 먹고살 만해졌다
    ㆍ대한민국, 기능올림픽에 출전
    1960년대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산업,그중에서도 공업이었다. 자원 수출보다 부가가치가 높고 고용 효과도 높은 산업이 필요했다. 공산품을 수출하면 더 많은 외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별의별 것을 다 수출하고 있었다. 공중화장실에는 '한 방울이라도 통 속에!'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선진국 제약 회사들은 뇌졸중 치료 성분인 우로키나아제를 추출하기 위해 소변을 수입했다. 1973년 소변 수출액은 50만달러였다. 돼지털·쥐털·뱀·메뚜기도 수출했다. 머리카락도 잘라서 팔았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외국에 팔았다.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면서 자원 수출은 상품 수출로 방향을 바꿨다. 상품을 만들려면 기술자가 필요했다. 챔피언 김기수의 감동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66년 11월 4일, 제1회 전국기능대회가 서울공업고등학교에서 열렸다. 신생국 대한민국이 산업기술을 겨루는 대회를 열었으니 바라보는 눈도 흥분했다. 언론은"이조시대의 숭문천공(崇文賤工)의 폐풍에 더해 임진왜란 때 국보적인 공예 부문 거장들이 적에 끌려간 이래 전래의 공기예가 쇠퇴일로를 밟아와 원통하다" 며"일인일기(一人一技)를 좌우명 삼아 건전한 생업의 수단과 나라의 산업 융성에 일대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고 축원했다(조선일보 11월 15일자 사설). 이듬해 스페인 국제기능올림픽 대표 7명이 정해졌다. 종목은 도장,동력 배선.목공,기계 조립,목형,선반,판금 부문이었다. 배진효가 출전한 제화와 또 다른 금메달 종목인 양복은 애초에 빠져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굵직굵직한 공업용 기술과 달리 구두와 양복은 디자인이라는 세련된 기술이 필요했고 구질구질하게 사는 대한민국이 그 세련된 디자인을 세계와 겨루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으니까. 정부에서는"자비(自費) 출전은 막지 않겠다"고 했다. 배진효가 다니던 칠성제화와 양복 기술자 홍근삼이 일하던 서울 명동 이성우양복점은 두 사람의 항공료와 체재비를 다 대고 사장들까지 마드리드로 날아갔다. 대회는 7월 4일 마드리드직업학교에서 열렸다.
    ㆍ책상다리를 20㎝ 잘라내고
    "가뜩이나 키가 작은데 시험장에 들어가 작업대 앞에 앉으니 상판이 가슴에 닿았다. 책상다리를 20cm 잘라내니 키가 맞았다. 사흘 중 첫날은 외국 선수 작업을 구경하며 보냈다. 작업 도구도, 원가죽도 태어나서 처음 만져보는 것이었다. 함께 경쟁한 서양 선수들은 키가 커도 너무 컸다. 문제가 나왔는데 내 전공인 여자 구두가 아니라 남자 구두였다. 과제로 나온 신발 목형도 한국 목형보다 길고 가늘었다. 이미 연습을 많이 했던 터라 어렵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하루 한 켤레씩 일없이 만들던 우리 아닌가. 그래서 이튿날에 한 켤레 다 만들었다. 스페인 공주가 시찰 온다기에 남은 시간에 룸 슬리퍼 한 켤레 만들어서 선물도 했다. 내가 신기해 보였던지 거기 신문에 선물한 이야기가 큼직하게 실리기도 했다. 경기를 끝내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내가 만든 구두에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내가 금메달이라는 거다. 진짜, 눈물이 핑 돌았다."
    대회가 열린 마드리드직업학교 작업대는 너무 높았다. 배진효는 다리를 20㎝ 잘라낸 책상에서 경기를 치렀다. 뜻밖에도 금메달이었다. /국제기능올림픽선수
    협회 제공

    똑같이 자비로 출전했던 양복 기술자 홍근삼도 금메달을 땄다.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자비로 날아간 선수들이 우승했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은 마치 또 세계챔피언이 탄생한 것처럼 흥분했다. 종합 성적은 4위였다. 7월 27일 김포공항에서 서울시민회관까지 카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대통령은 출정식 때 약속했던 대로'평생을 보장하는'금일봉을 하사했다.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집 한 채 값이었다.
    ㆍ작은 나라의 작은 꿈, 기능올림픽
    신문들은 "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의 코가 납작해졌다"고 비아냥댔다. 그 놀림을 술안주 삼아 소주를 털어 넣으면서 사람들은 문득 깨달았다.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의지며 환경이라고. 가난이 숙명은 아니라는 사실도.놀림감이 됐지만 기능올림픽 한국위원장 김종필은 좋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을 떠나 유럽을 돌아다니며 구상한 게 기능올림픽이었고, 구상 1년 만에 뜻밖의 성적을 올렸으니 자신의 입지도 훨씬 올라갔다. 5·16 세력이 내건'조국 근대화'사업은 한층 속도가 빨라졌다.
    1969년 열린 18회 기능올림픽 선수단 개선퍼레이드 장면
    누구나 다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처럼 유명해진 사람들의 가난했던 내력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꿈을 꾸게 되었다. 7남매의 어린 장남 배진효는 생계를 짊어진 소년이었고 같은 금메달리스트 홍근삼은 피란길에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였다. 밀항선을 타려다 적발됐는데 착한 경찰관이 감옥 대신 양복점에 취직시켜줘 일자리를 얻게 된 소년이었다. 2대 기능올림픽 한국위원장이 된 국회의원 김재순은 그런 사연을 모아 1970년 잡지 '샘터'를 창간했다.
    ㆍ행복했던 배진효
    천성이 못돼먹지는 않았던지라 배진효의 금일봉은 스무 날 만에 사라졌다. "좋은 데 쓰겠다"고 손을 내미는 단체에 나눠줬고 상이군인이며 노숙자며 고아원이며 양로원에서 찾아오면 봉투를 열었다. 대신 열심히 일했다. 남자 구두보다 여자 구두를 더 많이 만들었다. 팬레터가 하루에 수백 통씩 날아왔다. 스페인 공주 신발을 만든 청년이란 소문이 나면서 제화점은 '명절 성수기에는 쓰레기통에 돈을 구겨 밟아 넣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여대생 딸들은 아빠와 엄마를 끌고 와서 가족 단위로 구두를 맞췄다. 웬만한 여배우는 모두 명동에 가서 구두를 맞췄고. 그러던 와중에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월급 1500달러에 성과급 600달러까지 주겠다는 것이었다. 병역 문제가 걸려 결국 불발되고 배진효는 마음을 고쳐 잡았다. "애 낳자마자 어찌 재가(再嫁)를 하랴"는 것이었다. 대신 직장을 지키며 열심히 구두를 만들었다. 때는 바야흐로 1970년대 고도성장기였고 수제화는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행복했다. 머리카락과 오줌을 팔았던 대한민국에서 신발과 섬유는 오랜 기간 주력 상품이 되었다.
    ㆍ배진효, 김기수, 그리고 대한민국
    김기수는 만 14년 동안 링을 지키며 49전45승(16KO) 2무2패를 기록했다. 첫 패배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벌어진 3차 방어전이었다. 대전료는 5만5000달러로 벤베누티에게 준 돈과 같았다. 1968년 5월 26일이었다. 그해 일본 오사카에서 이사오 미나미와 벌인 동양챔피언 방어전에서 패하고 공항에서 계란을 맞았다. 열 받은 김기수는 이듬해 삼일절에 이사오를 서울로 불러 챔피언 벨트를 되찾은 뒤 은퇴했다. "나랏빚 갚아서 후련하고 벨트 되찾아 후련하다"고 했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비정한 세계를 이겨내는 무기가 무엇인지 잘 안다. 자기 자신과 싸워 이겨라."
    김기수는 1997년 하늘로 떠났다. 기능올림픽은 개인에게는 가난을 탈출하는 비상구가 됐고 나라에는 제조업을 통한 부국강병의 통로가 됐다. 대회명은 올림픽이 아니라 '국제기능대회(World Skills International)'였지만 한국에는 스포츠 올림픽에 버금가는 영광과 기회의 무대였다. 한국은 1977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회의 첫 종합 우승을 시작으로 지난 2013년 독일 라이프치히 대회까지 두 차례 빼고 18회나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처녀 출전했던 1967년 대한민국의 수출액은 3억2000만달러였다. 첫 종합 우승을 한 1977년 수출액은 100억달러 18회째 우승한 2013년 수출액은 5596억달러였다. 47년 만에 1748배가 됐으니 지구상에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어디 있겠는가. '한국은 기능 강국'이라는 인식이 수출 상품의 품질보증서 역할을 한 덕택이었다. 세월이 또 흘러서 기름밥 먹는 공돌이 대신에 넥타이 부대가 전면에 등장했다. 숭문천공(崇文賤工)의 폐풍은 여전하지만 역대 기능올림픽 출전자 854명 가운데 80%가 여전히 현장을 지킨다. 예순일곱 살이 된 배진효는 지금 한 제화 업체에서 구두 목형 자문역을 하고 있다. 함께 금메달을 땄던 양복장 홍근삼은 투병 중이다.
    ㆍ배진효
    평생 구두를 만져온 저는 일흔 살 다 되도록 정년도 없이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영광의 세월이었고 아쉬운 세월이었습니다. 젊은 기술자들이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더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과거가 있어야 미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근면함과 성실, 의지를 가진 한국인에게 기술이 더해졌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퍼레이드는 바라지 않습니다. 기름때 닦아가며 일하고 있는 기술자들을 격려해주십시오.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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