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9] 동춘서커스 박세환

浮萍草 2015. 5. 27. 07:00
    화려한 공중제비에 홀린 열다섯 살 소년… 일흔하나 현역 광대로 천막 극장을 지킨다
    아침마다 온통 하얬던 천막 앞 백발 노인들이 줄을 서고 있었고, 여자들은 막걸리 싸들고 자리 펴고… 만담·노랫가락에 가난도 잠시 잊었다
    한때는 돈 셀 수 없을 만큼 벌었지만 1972년 드라마 '여로' 시작되자 사람들은 공연장 대신 TV 앞으로… 전국 팔도 서커스단 전부 망해
    1978년 팔릴 뻔한 동춘 사들여 아파트까지 담보로 내놓으며 버텨 2009년 訃告狀 내고 문닫을 생각도… 올해 창단 90년… 사명감 커져

    ㆍTV 시대의 시작 1966년 8월 전자 회사 금성사에서 첫 번째 국산 텔레비전을 내놨다. 모델 이름은 VD-191로'진공관(Vacuum)''다리가 달린 탁상형(Desktop)''19인치''첫 번째(1)'를 뜻했다. 값은 6만3510원이었다. 일제는 10만원 정도였다. 그때 쌀 한 가마에 2500원이었다. 고가(高價)였지만 'TV 무소유 증명서'를 은행에 들고 가서 당첨돼야 살 수 있었다. 경쟁률은 20대1이었고, 할부 구매 경쟁률은 50대1이었다. 전국에 보급된 미제·일제 텔레비전이 10만대였던 그해 하반기, VD-191은 1만대가 팔렸다. 6년 뒤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이 드라마'여로(旅路)'를 시작했다. 착한 며느리와 악랄한 시어머니와 바보 남편이 벌이는 이야기였다. 바보 영구는 장욱제,며느리 분이는 태현실이 연기했다. 첫 방송일은 1972년 4월 3일이었다. 매일 밤 7시 30분 드라마가 시작되면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TV 수상기가 있는 시골 이장 집에는 마을 주민이 모두 모였다. 딱 다섯 달 만에 전국 팔도에서 공연 중이던 곡예단 15곳이 망했다.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쫄딱
    ㆍ"저것이 사람이냐 귀신이냐"
    1959년 경주고등학교 1학년이던 박세환에게 서커스 무대는 화려했다. 경주를 찾은 동춘서커스단은 끼 많은 소년에게 꿈의 무대였다.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조명을 받는 사회자며 트럼펫을 부는 악사며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며 모든 것이 열다섯 먹은 소년에게는 꿈같았다. 만담도 귀신처럼 잘했고 트럼펫도 귀신처럼 불었고 공중제비는 더 귀신 같았다. "저게 사람이냐!" 잘생긴 얼굴에 밴드부에서 트럼펫도 배우고 노래도 곧잘 하던 터라 작심했다. '어른이 되면 서커스단에 들어가야지.' 할아버지 박화준은 유학자였다. 박화준에게 화가는 환쟁이였고 소설가는 글쟁이였고 사진가는 찍사였으며 배우는 딴따라였다. 예기(藝氣) 넘치는 일체 직업은 비루하고 천박하고 해서는 아니 될 짓이었다. 그런데 곡예사라니 종갓집 장손인 손자 세환은 모범생 흉내를 내며 보안을 유지하다가 가출했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서커스의 추억은 21세기에도 진행중이다.가난한 시절 한국인들을 위로했던 서커스는 문명의 이기에 밀려 잊혀가는 존재가 됐다.사진은 동춘서커스 곡예 장면.
    2015년 동춘서커스단원은 60%가 중국인이다. /조선일보DB

    물어물어 수원에 있는 동춘서커스단까지 찾아갔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보름 동안 천막 뒤를 기웃거리며 얼굴을 판 다음에야 사람들은 세환을 불러 오디션을 봤다. 세환은 무대 청소를 하며 석 달을 살았다. 대개 지방 공연 한 달이면 20일째쯤에는 관객이 급감했다. 색소폰 연주자 고하승의 무대도 그랬다. 박세환이 텅 빈 무대에 올랐다. 관객은 10명 정도였다. '청춘의 꿈'을 불렀다.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언제나 즐거운 노래를 부릅시다~.'
    첫 무대, 망했다. 강렬한 조명에 앞은 캄캄했고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음정이 망가지고 리듬은 폴카에서 트로트로 늘어지더니'즐거운 노래'는'죽고 싶은 노래'로 변했다. 다섯째 소절'가슴은 두근두근 청춘의 꿈'을 부를 때 사회자가 악단 연주를 중단시키고 박세환을 내려보냈다. 무대 뒤에서 시뻘건 얼굴을 가라앉힌 세환은 사흘 뒤 다시 무대에 섰다. 노래도 똑같았고 관객 숫자도 똑같았다. 이번에는 박수가 나왔다.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면서 세환이라는 이름은 약하다고 해서 원영으로 바꿨다. 3년 뒤 코미디언 남철의 아내가 세환을 불렀다. "원영아, 잘 생기고 말을 잘하니 사회를 배워라." 라디오 방송에 나오는 송해 말투를 따라 하며 연습했다. 주연배우가 다른 극단으로 가버리자 대타로 무대에 올랐다. 노래면 노래, 사회면 사회, 연기면 연기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젊은 광대였다. 세환이 인기를 얻자 단장 박동수는 세환을 양아들로 삼고 주저앉혔다. 문화방송 배우로 스카우트됐던 세환은 그 인연에 붙잡혀 한 달 만에 돌아왔다. 그래도 경주에 가면 할아버지가 무서워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강산이 세 번 바뀔 때까지 할아버지 박화준은 손자가 딴따라인 줄 모르다가 1990년 하늘로 갔다.
    ㆍ1925년 목포, 동춘연예단
    1925년 일본 고사쿠라 서커스단 단원 박동수가 조선인 30명을 모아 동춘연예단을 창설했다. 호남에서 활동하던 동춘연예단은 광복 후 분단 전까지 만주까지 돌아다니며 공연했다. 태백·중앙·대우·청광·신국·평화 등 스무 군데 남짓한 서커스단이 생겨나 조선과 만주를 돌아다녔다. 으뜸은 동춘이었고, 라이벌은 신국이었다. 소달구지에 장비를 가득 싣고 마을에 도착하면 풍물대가 먼저 거리로 나갔다. 나팔을 불고 큰북을 치면 꼬마들이 몰려들었다. 공연은 마술쇼로 시작됐다. 마술과 공중곡예,동물 공연 한 시간이 끝나면 신파극'어머니 울지 마세요''안개 낀 목포항''원한 맺힌 두 남매'를 공연했다. 국악 공연에 이어 캉캉과 차차차·코미디가 무대에 올라 사람들을 웃기고 나면 세 시간짜리 공연이 마무리됐다. 기똥찬 라이브쇼에 아이부터 노인까지 박수갈채를 보냈다. 피날레 무대에는 구봉서,서영춘,배삼룡,남철과 남성남,허장강,이봉조,정훈희,장항선,곽규석이 나와 인사했다. 국악 공연을 했던 이은관은 훗날 서도소리 배뱅이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열두 시 넘어서 잠자리에 든 뒤 아침에 양치질을 하러 천막 밖으로 나가 보면 서커스단 앞이 하얬다. 그 이른 아침부터 노인네들이 줄을 서 있으니 옷도 하고 머리도 하였고 여자들이 고구마랑 막걸리 싸들고 와서 돗자리 펴고 놀고 있으니 땅도 하얬다. 그뿐인가. 밤이면 사람들은 하얀 나들이옷을 입고서 등불을 들고 들판을 걸어서 공연장으로 왔다. 가족과 한 번 오고, 다음에는 사돈과, 다음에는 먼 친척과, 마지막으로는 친구들과 이렇게 네 번씩 서커스를 보러 왔다. 박세환은 기억한다. "지폐를 세는데, 세다 세다 못 해서 나중에는 500장짜리 다발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걸 기준으로 무게로 돈을 쟀다"고.
    ㆍ여자 단원과 건달의 싸움
    동춘서커스단의 인기 공연인 공중그
    조선일보 DB
    돈 욕심에 기웃거리던 마을 건달들은 고난도 교예로 몸을 다진 단원들한테 무참하게 혼이 났다. 아예 지방 검사가 미리 건달들을 체포해두고 경찰 형사들이 매표소를 지킨 곳도 있었다. 법(法)보다는 주먹이 가깝고 주먹보다는 의리와'융통성'이 앞서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박세환이 단장이 되었을 때 또 건달들이 찾아왔다. 공중그네를 타는 여자 단원 네 명이 '마중'을 나갔다. 건달 네 명은 말도 못 하게 두들겨 맞고서 무릎을 꿇고 여자들 앞에서 싹싹 빌었다. 그날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던 박세환이 정색을 했다. "목숨을 걸고 그네를 타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초인(超人)'이라고 보면 맞다." 그렇다. 곡예사들은 목숨을 걸고 그네를 탔고 사람들은 목숨을 건 그들의 쇼를 보며 고단함과 무료함과 빈한함을 잊었다. 1970년대 초까지 동춘서커스단은 단원이 250명을 넘었다. 코끼리부터 원숭이까지 동물도 창경원 다음으로 많았다. 인도코끼리 제니가 하모니카를 불면 어김없이 박수가 터졌다. 귀신이 곡할 만큼 기막힌 교예 솜씨에"아이들을 납치해 식초를 먹여서 뼈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그네를 태운다"는 괴담도 늘 따라다녔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천막 극장을 찾았고 단원들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다 한 달 공연이 끝나면 단원들은 천막을 철거하고 소달구지에 장비를 싣고 다음 마을로 떠났다. 한 달 동안 마을에서는 많은 사랑이 맺어지고, 많은 사랑이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사람들은 곡예를 사랑했지 유랑하는 곡예사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서커스단은 대개 100리(40㎞) 안팎의 도시를 골라서 공연장을 옮겨다니며 봄 공연으로 여름 장마를 넘기고 가을에 억척 같이 공연해서 겨울 한파를 넘기곤 했다. 사흘만 쉬어도 몸이 풀어지니 한겨울에 관객이 없어도 공연은 해야 했다. 그런데 망할 놈의 TV가 탄생하더니 마침내 드라마 '여로(旅路)'가 천막 지붕을 찢고 터진 것이다.
    ㆍ드라마 '여로(旅路)'와 서커스의 종언(終焉)
    조짐은 새마을운동이었다.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새벽종이 울리자마자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꿨다. 굳이 대통령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운동 가사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무능해서가 아니라 할 일이 없어서 집에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한 일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는 작업이었으니까. 지금은 향수 아련한 초가집을 왜 없앴으며 고샅은 왜 시멘트로 발라버렸느냐고 비난하지만 초가지붕 위로는 가난이 줄줄 샜고 고샅에 소들이 갈긴 똥 더미에 미끄러 지면 아이들은 그 끈적끈적한 가난에 코를 박아야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새마을 만들기에 매달렸느냐 하면 그 재미난 곡예단 낮 공연에 올 짬이 없을 정도만큼 바빴다. 그러다 2년 뒤 '여로'가 대한민국의 밤을 평정해버린 것이다. 서커스 공연 시작은 7시였는데 여로 시작은 7시 30분이었다. 90회로 예정됐던 '여로'는 전국 며느리들의 성화에 180회로 연장됐다. 첫 방송 다섯 달 만에 동춘서커스단은 관객 없는 밤을 맞았다. 47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듬해 박종구라는 기획자가 태현실과 장욱제를 출연시켜 '여로 쇼'라는 순회공연을 만들어 히트를 쳤지만 거기까지였다. 한번 TV 맛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쇼를 찾지 않았다. 서커스 스타들은 대거 방송국으로 몰려갔다. 서영춘과 구봉서와 배삼룡은'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쇼를 공연했다.
    ㆍ코끼리 제니의 죽음과 동춘의 부활
    1975년 박세환도 동춘을 떠나 부산 깡통시장에 있는 대아극장 선전부장으로 이직했다. "나 완월동 만득인데 영화표 한 장만" 하고 허세 부리는 깡통시장 건달들을 적당히 만져주며 군기도 잡고 타월과 칫솔·치약 도매로 큰돈도 만졌다. 1978년, 양아버지 박동수의 셋째 아들 박영조가 운영하던 동춘서커스단 천막 극장이 무너졌다. 버틸 힘을 상실한 박영조는 동춘을 매물로 내놨다. 세환은 홀린 듯 있는 돈을 다 그러모아서 동춘을 샀다. 사명감이 절반이었다. "국악,연극,가요,쇼가 서커스단 무대에서 싹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없어지면 문제라고 생각했다." 절반은 자신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동춘만큼 알찬 공연이 없으니까." 무너진 천막에 찾아가니 코끼리 제니가 세환을 알아보고선 뿌억뿌억 하고 울어댔다. 2년 뒤 제니는 보온용으로 깔아놓은 농약투성이 볏짚을 포식하고 죽었다. 제니가 죽은 그해 연말 컬러TV 방송이 시작됐다. 지방에서는 아직 동춘 이름발이 먹혔지만 예전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동물 학대라는 소리에 동물 쇼도 못하게 되었고, 단원들도 급감했다. 아내 신경옥은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돈을 꿨고 아파트는 급전 담보로 여러 번 들어갔다. 1997년에는 IMF 외환 위기가 2003년에는 태풍 매미가 수십억 원어치의 장비를 말아먹었다. 그럴 때마다 사명감은 증가했고 자신감은 감소했다. 2009년 신종플루가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운영 자금이 바닥났다. 방도가 없었다. 박세환은 인터넷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에 부고장을 올렸다. '동춘서커스, 문 닫습니다.' 삽시간에 대한민국의 추억이 부활했다. 8만명이 찾아와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유인촌에게 온라인 협박장이 난무했다. '당신을 무인촌으로 만들어버리겠다.' 그해 겨울, 밀려오는 관객 덕에 박세환은 빚 8억원을 다 갚았다. 정부는 동춘서커스단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해 지원을 받게 했다. 부고장은 철회됐다. 2015년 동춘서커스단은 창단 90주년을 맞았다. 지금 동춘서커스단은 경기도 안산 대부도 상설 공연장에서 공연한다. 단원 45명 가운데 60%가 중국인이다. 주말에는 관객이 400명을 넘는다. 주중에는 지방으로 초청 공연을 다닌다. 지난주 서울 석촌호수 2000석짜리 공연에는 관객이 4000명이 넘었다. 할아버지 몰래 흘러든 광대 인생. 한때 상실했던 자신감은 사명감만큼 커졌다. 그래서 '늙은 현역 광대' 박세환은 가끔 생각한다. '청춘은 즐거웠고 중년은 버거웠으되 지금은 행복하노라.'
    ㆍ박세환
    대부도 공연장 매표소에서 어떤 중년 여자 분이 친구에게 전화를 겁디다. "야, 1만5000원이면 동춘서커스 보는데 얼른 와라." 그런 분들 덕에 지금까지 왔습니다. 가난하던 그때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습니다. 죽어가던 동춘을 살려준 분들이 고맙습니다. 사라졌던 자신감도 다시 생겨나고 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의지도 생겼습니다. '태양의 서커스'라는 세계적인 서커스도 노력하면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누군가 묻습디다. "후회는 없냐고." 없습니다. 광대로 죽을 겁니다.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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