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11] 중동건설과 김철빈

浮萍草 2015. 5. 30. 07:30
    땀 증발해 얼굴엔 소금기만 남아… 火傷이 두려워 작업복 벗지 못했다
    느릿느릿한 버스 2시간 뒤 멈추자 외봉낙타 옆에서 기념사진 찍었다 처음 보는 모래 지평선이었는데 그곳이 내가 일할 발전소 공사현장
    기능공도 한국인들은 級이 달랐다, 연장 가방엔 온갖 도구들… 영어 한 줄 읽지 못했지만 도면 보면 그대로 작업했다
    고된 노동은 극단행동을 낳기도… 77년 주베일 현장선 900명이 시위 88년 이라크 전투기 폭격으로 이란 캉간 현장서 근로자 사망

    ㆍ공군 장교 김철빈과 발리의 꿈 1975년 9월 30일 ROTC 공군 장교 김철빈이 전역(轉役)했다. 혈기왕성한 스물여덟 살 청년이었다. 건설업 해외 진출이 막 시작된 때라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장교 출신 수요가 폭증하던 때였다. 취직자리는 있었다. 철빈은 인도네시아 발리에 진출하려던 대림산업이 전역하기도 전에 일찌감치 예약해둔 터였다. 철빈은 야자수 아래 은빛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하는 꿈을 꿨다. 그런데 발리 공사 수주가 불발하고 이듬해 6월 대림산업이 40만kw짜리 발전기가 두 개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가즐란 화력발전소 공사를 따냈다. 김철빈은 선발대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첫 해외여행이 사막? 남태평양의 꿈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됐다. 두 달 뒤 회사 회의실에 집합한 선발대원 70명 앞에서 인솔자가 소개됐다. "김철빈 과장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세 번이나 다녀오신 대단한 중동 전문가시며…." 철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듣고 있던 콘크리트 박과 철근 김이 노련하게 웃었다. '에라, 저 어린놈이?' 국내는 물론 월남전까지 날아가 콘크리트와 철근 작업을 해온 사내들은 팀장 권위를 세워주려는 새빨간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홍콩을 거쳐 바레인에 도착한 뒤 3박 4일에 걸쳐 작은 비행기로 선발대원들을 사우디로 보냈다. 마지막 비행기에 올라타 한참을 기다리니 항공사 직원이 올라타서 이렇게 통고하는 것이었다. "예약이 초과됐으니 한국인은 다 내려라." 그 자리는 두건을 둘러쓴 아랍인들이 차지했다. 내 돈 내고 탄 비행긴데 왜? 무조건 서러웠다.
    동아건설이 리비아에서 벌인 대수로공사 현장. 모래바람을 뚫고서 사람들은 사하라 사막에 초대형 장비로 초대형 수로를 만들었다. 전쟁 같은 공사였다.

    담맘에 모인 선발대원들은 버스를 타고 가즐란으로 갔다. 시속 30km 정도로 느릿느릿 버스가 달리다가 2시간 뒤 잠시 멈췄다. 김철빈은 풀을 뜯고 있는 외봉 낙타 가족 옆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태어나서 지평선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거기였다. 거기가 공사 현장이라는 것이었다. 이 모래 더미 한가운데에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6년 8월이었다. 망연자실한 사람들은 바지 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억지 중동 전문가 김철빈은 속이 활활 타들어 갔다.
    ㆍ오일 달러와 한국 경제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종전(終戰) 선언 닷새 전인 10월 17일, 아랍 산유국들이 일제히 석유 금수(禁輸) 조치를 선언했다. 두 달이 지난 12월 12일 이란 왕 팔레비가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말했다. "유가 상승? 당연하지!(기사에 느낌표가 있었다) 당신네는 밀가루 가격을 세 배 올리지 않았나. 우리 원유를 사서는 정제해서 수백 배 값을 올려 팔아먹고. 이제 기름을 사려면 당신들은 돈을 더 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한 열 배쯤?" 그해 1월 배럴당 3달러 선이던 원유 가격은 크리스마스 무렵 12달러로 300% 상승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을 구가하던 서방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중화학공업을 육성 중이던 대한민국은 난리가 났다. 1973년 3억519만달러였던 석유 수입 비용이 1년 만에 11억78만달러로 폭증했다. 외환 보유액은 3000만달러가 줄었고 소비자 물가는 24.3%, 생산자 물가는 무려 42.1%나 폭등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3억1000만달러에서 20억2000만달러로 아폴로 우주선처럼 치솟았다. 오일쇼크 어퍼컷 한 방에 대한민국은 그로기에 빠졌다. 고도성장에 의존하고 있던 박정희 정부도 위기였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세계는 위기지만 중동은 돈벼락을 맞지 않았는가 말이 생기면 경마를 잡히고 편안하게 다니고 싶은 법이다. 중동이 그러했다. 모래바람을 견딜 빌딩이 필요했고,도로가 필요했고 지열을 막아줄 에어컨이 필요했고,에어컨을 돌릴 발전소가 필요했다. 그런데 토목이며 건설을 할 능력과 인력은 없으니 이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인 돈의 바다였다. 일본이 맨 먼저 그 시장을 봤고, 중동을 노리는 일본을 한국에 있는 공무원, 대통령 박정희가 '국보(國寶)'라고 부르던 경제2수석 오원철이 눈치챘다. 오원철의 건의에 대통령은 기업들에 중동 진출을 강력하게 요청했고 월남에서 철수한 인력과 장비가 쌓여 있던 기업들은 말 그대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두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한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중동으로 진출했다.
    바지선에 고정돼 울산에서 사우디로 가는 거대한 주베일 항만 공사 구조물.

    1973년 12월 1일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울라∼카이바르 164km 고속도로 공사를 따냈다. 1974년 2억6000만달러를 수주한 한국 기업은 1975년 226.3% 늘어난 8억5000만달러어치를 수주했다. 1976년 현대건설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는 9억5800만달러로 대한민국 예산의 25%였다. 그해 6월 계약 선수금 2억달러가 입금되자 외환은행장이 현대건설 회장 정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오늘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고의 외환 보유액을 기록했다." 1983년 동아건설이 수주한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39억달러짜리였다. 6년 뒤 2차 공사는 55억5000만달러였다. 중동 진출은 신화(神話)였다. 그 신화 속에서 노동자들은 사막으로 강림(降臨)한 신(神)들이었다.
    ㆍ급(級)이 다른 한국인들
    도착 일주일 만인 1976년 광복절, 가즐란 사막 위에 발전소 공사가 시작됐다. 사우디 최초이자 중동 지역 최대 규모의 화력발전소였다. 70명으로 출발한 현장 인력은 1000명으로 늘었다. 식당도 짓고, 숙소도 짓고, 새마을회관도 만들었다. 마을 하나가 사막 한가운데 생겨났다. 무늬만 전문가였던 김철빈도 진짜 전문가가 되어갔다. 함께 일했던 미국 벡텔사 현장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뭐, 당신이 대학을 나왔다고? 그런데 여기는 왜?" 이미 선진국 고학력자들은 사막을 기피했다. 기능공도 한국인들은 급이 달랐다. 콘크리트 박의 연장 가방에는 망치와 수평계가, 철근 김의 가방에는 펜치와 니퍼가 들어 있었다. 월남 때부터 닳고 닳은 자기 연장들이었다. 영어 한 줄 읽지 못했지만 도면을 보면 그대로 작업을 했다. 일을 하다 보면 당연히 땀이 나고 얼굴도 타야 하는데 한참을 일하다 보면 땀이 증발하고 소금만 남아 얼굴이 새하얬다. 아무리 더워도 화상이 무서워 작업복은 벗지 못했다. 그래도 안경잡이들은 화상을 피하지 못했다. 금속 안경테는 벗어던질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모래폭풍이 닥쳐오면 공사가 멈추곤 했다. 작업은커녕 질식할 것 같은 바람에 사람들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도 참았다. 요동을 치는 크레인도 폭풍 너머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기를 틀면 서울 목욕탕 열탕보다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잘살아보겠다고 작심하고 떠난 사람들이었다. 1980년 돼지를 치다가 빚더미에 오른 젊은 가장 이건영(지금은 경기도 용인 시의원이다)도 사우디 공사판을 택했다. 설날 하루만 딱 놀고 일했다. 사람들이 "5000명 중에서 당신이 제일 근무 일수가 많을 것"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2등이었다. 알고 보니 설날에도 일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강림한 신(神)들은 그렇게 '일하다가 죽을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일했다. 독기(毒氣) 가득한 우수 인력들이 뭉쳐 살던 새 마을 주변에 발전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200t짜리 발전 터빈 두 개를 14m 높이 기반에 설치하는 날이 왔다. 크레인이 도착했다. 기반에 박힌 앵커볼트 250개가 터빈에 뚫린 구멍 250개에 끼워져야 고정이 된다. 달팽이 기어가는 속도로 하강하는 터빈 구멍에 정확하게 앵커볼트들이 솟아올랐다. 1㎜오차도 없었다. 지켜보던 벡텔사 사람들에게서 먼저 박수가 터졌다. 1981년 2월 1일 발전소가 완공됐다. 4년 5개월 만이었다. 노동자들도 미친 듯이 일했고 기업도 같았다. 주베일 공사 때 현대건설은 울산에서 만든 해양 구조물을 바지선 열두 척에 강철선으로 고정하고서 인도양을 건넜다. 사막을 가로질러 1000km가 넘는 수로(水路)를 만들겠다는 리비아 수로 공사는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 공사였다. 그런데 해냈다. 시공 직전 서방에서는 '미친개의 꿈'이라고 했고, 완공 직후 리비아인들은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불렀다. 리비아는 공사 완공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
    ㆍ'싸대기' 맞은 듯
    어쩌다 쉬는 날이면 김철빈은 동료들과 함께 공사 현장 옆에 있는 콴티프 오아시스를 찾았다. 갈 곳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대개 숙소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틀거나 오아시스를 찾아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귀국할 때 카세트테이프와 사진기에 높은 관세가 붙어서 불평불만이 대단했다. 놀거리가 없다 보니 술을 찾았다. 술 만들기, 참 쉬웠다. 천하제일의 용접공과 배관공이 득실거렸다. 용접 박이 철판을 잘라 용기를 만들면 배관 최가 파이프를 박아서 증류기를 만들었다. 쌀과 이스트를 섞고 물을 부어 증류기에 넣고 놔두면 소주가 됐고 포도를 짓이겨 똑같이 넣으면 와인이 나왔다. 제대로 마실 시간이 없었던지라 다섯 번 증류할 걸 한 번 증류해 먹었다. 일과두주(一鍋頭酒),그러니까 중국제 서민주인 이과두주보다 못한 저급 술이었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사람들은 '싸대기'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밀주(密酒)'라는 뜻이었다. 아침에 깨면 진짜 싸대기(뺨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쿠웨이트 경찰은 가난한 외국 노동자들의 음주를 묵인해줬다. 가끔 가즐란 대림산업 노동자들과 주베일 현대건설 노동자들은 축구 대회를 열었다. 현대는 포니 픽업을 타고 와 축구를 하고 마작도 함께 즐겼다. 용접 박은 낚시광이었다. 통닭 한 마리를 빨랫줄에 걸어서 방파제로 나가 온종일 앉아 있었다. 그러다 진짜로 2m짜리 왕물고기를 잡아냈다. 그날 대림산업 새마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싸대기 회식도 물론이었다. 며칠 뒤 용접 박이 드럼통을 잘라 만든 보트로 바다로 나갔다가 썰물에 쓸려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고된 노동은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1977년 3월 13일 주베일 공사 현장에서 폭동이 터졌다. 인근에 있는 다른 공사 현장보다 낮은 대우에 트럭 기사들이 20km 정속 운행으로 항의하자 간부 한 명이 헬멧으로 기사 머리를 내려쳐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는 30명에서 900명으로 불어났다. 회사 측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사무실과 숙소, 차량이 불탔다. 사우디 무장 경찰까지 출동한 사건이었다.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 주동자의 귀국으로 사건은 종료됐고 공사는 무사히 끝났다. 서울올림픽이 있던 1988년 6월 30일 대림산업 이란 캉간 발전소 공사 현장에 이라크 전투기가 미사일 여섯 발과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노동자 13명이 죽었다. 모래폭풍, 더위, 외로움, 그리고 진짜 전쟁. 단어만 다를 뿐 모두 전쟁을 뜻했다.
    ㆍ전혀 다른 대한민국
    김철빈은 1980년 다시 쿠웨이트로 떠났다. 도하웨스트 발전소 공사로 30만kw 터빈 7개짜리 초대규모였다.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진짜 전문가였으니까. 그때 상사로 와 있던 사람이 심완식이었다. 심완식은 경부고속도로의 가장 어려운 구간인 옥천 터널 감독관이었고 공군 장교 김철빈은 그때 터널 공사를 참관한 적이 있었다. 구면(舊面)인 두 사람은 함께 쿠웨이트로 떠났다. 이번에는 가족도 함께 가도록 배려해줬다. 대림 직원 280명에 현장 기능공은 3800명, 그 가운데 2400명이 한국인이었다. 마을 수준이 아니라 도시 하나를 만들어 노동자들이 살았다. 힘들어도 너무 힘들어서 김철빈은 "그냥 오폭(誤爆)으로 한 방 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사는 적자였지만 1983년 발전소는 쿠웨이트 정부에 인계됐다. 김철빈은 현장소장으로 5년을 더 있다가 귀국했다. 1987년 아내가 귀국하던 날 공항에서 대한항공 직원이 말했다. "아부다비에서 방콕으로 가던 비행기가 사라졌다"고. 그래서 "언제 비행기가 뜰지 모르겠다"고. 귀국하는 중동 노동자 112명을 태운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를 북한이 폭파한 날이었다. 김철빈은 이듬해 귀국했다. 88올림픽이 열렸다.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나라로 변해 있었다.
    ㆍ김철빈
    40년 전 벡텔사 하청업체였던 대한민국 기업이 지금은 벡텔 수준으로 진화했습니다. 대학 시절 지하철은 런던이 최고고, 공항은 파리 드골공항이 최고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 지하철이 세계 최고입니다. 인천공항이 세계 최고입니다. 모든 게 이렇게 됐습니다. 고속도로 또한 한국이 최고입니다. 건설인으로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대한국인 모두가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공짜로 얻은 성과는 아닙니다. 그렇게 사막에서 땀도 흘리지 못하고 벌어들인 돈이 300억달러가 넘습니다. 선진 건설·토목사로부터 배운 노하우와 기술, 그리고 중동에 쌓은 신용은 달러로 환산이 불가능합니다.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이제 후배분들에게 맡깁니다.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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