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10] 파독 광부와 간호사 최회석·정옥련 부부

浮萍草 2015. 5. 29. 07:00
    조국 떠나 막장·병원에 바친 청춘… 돈은 희망, 사랑은 구원이었다
    40도 웃도는 1㎞ 지하 탄광, 오줌도 안 나올 만큼 땀이 흐르고 손가락을 주물러야 손이 펴져… 그렇게 부모님 집까지 사드렸다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獨 병원으로 밤에도, 쉬는 날에도 일하고 일했다 송금할 때면 은행 직원이 물어 "니가 이 큰돈을 1년 만에 벌었니?"
    1971년 성탄절에 만난 동갑男女… 사랑에 빠져 4개월 만에 약혼 "경상도 간호원?" "전라도 광부?" 양가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 리 결혼합시다." 1972년 초 서울에서 9000㎞ 떨어진 서독 바덴 뷔르템베르크주 알렌(Aalen)시에서 스물네 살 먹은 사내 최회석이 말했다. 동갑내기 정옥련이 대답했다. "그러시죠."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사내는 전북 김제에서,여자는 경북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사내는 광부였고 여자는 간호사였다. 사내는 베스트팔렌주 카스트로롭-라욱셀시(市) 에린(Erin) 탄광에서 일했다. 알렌 시에서 북쪽으로 461㎞ 떨어져 있었다. 그해 4월 1일 여자가 일하는 알렌시립병원 구내식당에서 약혼식을 올리고서 두 사람은 각각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나 약혼했고, 이제 결혼하요. 경주 여자요." "엄마, 나 결혼한다. 김제 남자다." "뭐, 경상도 간호원?" "뭐, 전라도 광부?" 1972년 그 봄날 두 집안이 뒤집혔다.
    ㆍ독일로 떠난 청년들
    1963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신사복 차려입은 사내 123명이 김포공항을 떠났다. 일본 도쿄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사내들은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 서독 뒤셀도르프에 도착했다. 광부가 부족한 서독 정부와 일자리·외화가 부족한 대한민국 정부가 합의한 파독 광부 1진이었다. 서독 광산에는 이미 터키·그리스·일본 광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한창 부흥하는 경제를 구가하던 서독은 밑바닥 노동을 떠맡을 외국인이 더 많이 필요했다. 광부 생활을 하다 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시에 사는 고졸 이상 고학력자였다. 연탄은 알아도 석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1진 출국을 석 달 앞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독일 탄광 800m 지하에 수도꼭지가 있는데 홍차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숙소는 호텔 부럽지 않고 마음씨 곱기로 이름난 라인강변 미녀들이 점잖은 동양인의 미덕과 배짱에 안 넘어갈 재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너 달이 지나면 주머니도 부풀고 맥주 살도 부풀어 간덩이가 부어서 댄스홀에서 여자를 낚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에도 난 구체적인 이야기라서 뜬소문이라고 치부하기 힘들었다. 서독에 도착하자마자 이 후진국에서 온 청춘들한테서 회충이 발견됐다. 회충은 습하고 더운 공간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간다고 생각했던 서독 노동 당국은 이들을 격리하고 영국에서 공수한 회충약을 복용하게 했다. 그 사이에 한국 광부들은 독일어를 배웠고 작업 장비 사용법을 배웠다. 계약 기간 3년 내내 사람들은 교육 기간에 배운 첫 독일어였던 '글뤽 아우프'를 입에 달고 살았다. 글뤽(Gluck)은 '행운',아우프(Auf)'위로'라는 뜻이다. 탄광 사람들이 갱도로 들어가며 서로에게 던지는 인사말이었다
    이국(異國) 땅 지하에서 대한민국 사내들이 돈을 벌었다. 한창 빛나야 할 젊은 날, 덥고 어두운 막장에서 사람들은 탄가루를 마셨다.

    작업 첫날은 지옥이었다. '글뤽 아우프' 인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1100m 아래로 내려갔다. 석탄 분쇄기가 뿜어내는 탄가루에 앞이 캄캄했다. 숨이 막혔다. 홍차가 흐르는 수도꼭지는 없었다. 탄광 생활이 익숙해지고 그만큼 고달파지면서'글뤽 아우프'는 그냥'아우프'로 바뀌었다. 천국이고 나발이고, 행운이고 불행이고 집어치우고 그저 올라만 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1977년까지 모두 7936명이 그랬다.
    ㆍ계란 노른자 30개를 삼키다
    김제 청년 최회석은 그 7936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인 아버지 슬하 6남매 가운데 다섯째였다. 사람은 착한데 사고뭉치였던 동생을 보다 못한 큰형이"군대나 가라"고 해서 입대했다. 북에서 남파된 김신조부대 덕택에 넉 달 연장 근무하고 제대하니"서독에나 가라"고 해서 광부로 지원했다. 몸무게가 합격선인 61㎏에 조금 못 미치자 역시 형님 충고에 계란 노른자 30개와 우유를 마시고 겨우 통과했다. 서독 생활에 대해 익히 들어놓은 터라 두려움도 환상도 없었다. 그저 "해본 적 없는 효도,돈 왕창 벌어서 해드리겠다"고 큰소리치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1970년 10월 12일이었다. 효도,원 없이 해드렸다. 나이 스물두 살 때부터 4만5000원 받는 교장 월급 세 배나 되는 돈을 꼬박꼬박 부쳐드렸고 생각도 않던 손자 손녀까지 덜컥 안겨드렸고 평생 관사를 떠돌던 아버지 환갑 선물로 김제 읍내에 서른 평짜리 집까지 사드렸다. 첫 송금 12만원을 받고 말 없이 우는 아버지 앞에서 큰형이 말했다. "우리 가문 최고의 사고뭉치가 효도 하나는 제일 잘했다"고.
    ㆍ독일로 간 여자들
    1960년대 대한민국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가혹했다. 고학력 여자에게도 일자리는 드물었다. 그런 대한민국 여자들에게 서독에서 일자리를 내밀었다. 1965년 독일에 있던 한국인 의사 이수길·이종수가 한국인 간호사 18명을 데려갔다. 그 후 해외개발공사가 독일병원협회와 계약하고 본격적인 간호사 송출 사업을 시작했다. 1968년 서독의 경기 침체로 89명까지 준 적도 있었지만 매년 1500명 정도로 1977년까지 모두 1만371명이 서독으로 갔다. 간호사 1명에 간호조무사 5명꼴이었다. 여자들도 꿈을 꾸었다. 가난한 나라를 벗어나 돈을 많이 벌고, 신문물을 경험하리라.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린 여자들이 서독 전역의 450군데 병원으로 흩어져 환자를 돌봤다.
    대부분 20대 초반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은 서독 전역 병원에 흩어져 환자를 돌봤다. 환자들은 억척스러우면서도 제대로 일했던 한국 간호사, 조무사들을
    좋아했다.

    정옥련은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하다가 서독으로 갔다. 그녀가 받던 월급이 2만원이었는데 서독에서는 600마르크,그때 환율로 5만4000원을 받는다고 했다. 앞뒤 재지 않고 원서를 쓰는 이 7남매 중 막내딸에게 엄마가 말했다. "시집가라." 딸이 말했다. "듣기 싫다, 엄마. 나 갈란다, 무조건 갈란다." 모범생으로 자란 당찬 딸이었다. 말리지 못했다. 엄마는 몸조심하고 꼬박꼬박 편지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딸을 보냈다. 1971년 7월 31일 정옥련이 서독에 도착했다. 자기가 김제 사는 교장 선생님한테 효부(孝婦)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신 부유한 신여성이 되는 꿈을 꾸었다. 도착한 다음 날 옥련은 알렌시 시립병원 산부인과 수술실에 배치됐다. "반드시 한국인 간호사를 보내달라"고 시청에 강력하게 요청해놓은 병원이었다. 한국 간호사를 써본 병원들은 죽으라고 일하되 일 하나는 깔끔하게 잘하는 한국인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ㆍ1971년 크리스마스
    막장에서 고생하던 회석이 두 번째 성탄절을 맞았다. 신참 동료를 따라 알렌으로 놀러 갔다. 동료의 여동생이 간호조무사로 일한다고 했다. 500㎞를 남하했다. 오랜만에 남이 해주는 밥도 얻어 먹고 병원 뒤 숲에 놀러도 갔다. 그때 정옥련을 만났다. 스물세 살짜리 청년이 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말을 하는 동갑내기 예쁜 여자를 만나 밥 한 끼 얻어 먹고 기약 없이 작별했으니 운전이 될 리 만무했다. 탄광으로 돌아가는 폴크스바겐 승용차는 휴게소만 보이면 깜빡이를 켜며 멈췄고 회석은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전화를 걸었다. 휴게소가 없을 때까지 전화질은 계속됐다. 회석은 연애편지를 써대며 자기가 사는 곳으로 놀러 오라고 부탁했다. 해가 바뀌고 옥련과 회석은 도르트문트역에서 재회했다. 기대도 않던 인연이 사랑으로 바뀌었다. 넉 달 만에 남자와 여자는 병원 식당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만우절이었다. 그날 지구 반대쪽 서로 260㎞ 떨어진 김제와 경주 양가는 9000㎞ 서쪽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난리가 났다. "경상도 여자는 음식 솜씨가 없으니 결사반대다." "니가 좋다 카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경상도 양반과 전라도 양반 사이에 기싸움이 벌어졌다. 신랑 신부 없이 마련된 상견례 자리에서 남자 집은 여자 집에 여자가 입던 한복 한 벌을 요구했다. 미래의 시어머니는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한복을 훨훨 태웠다. 불상사들을 액땜한다고 했다. 동갑내기들은 이듬해 4월 7일 에린 광산의 한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혜로운 시어머니 덕이었을까 어리디어린 광부 신랑과 간호사 신부는 무탈하게 막장과 수술실에서 돈을 벌었고 두 아이를 낳았으며,파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지금은 "젊은 날 대단히 멋진 경험을 했노라"고 주위에 말한다. 하지만 대단히 멋진 경험뿐이었을까.
    ㆍ"Tod(죽음)! Tod(죽음)!
    1971년 성탄 시즌,카스트롭-라욱셀에 있는 빅토르 이케른 탄광에서 한국인 집단 사형(私刑) 사건이 터졌다. 상습적으로 카메라·와이셔츠·스타킹·믹서·벽시계·양산 등을 훔치다 걸린 20대 한국인 광부에게 동료 한국인 200여명이 자살을 강요한 것이었다. 광부들은 절도범을 포승줄로 묶고서"투신해서 속죄하라"고 외치며 도르트문트 엠젤 운하를 향해 3열 종대로 행진했다. 경찰은 헬기에 기관총까지 동원해 사건을 진압했다. 주동자들은 추방되거나 자발적으로 귀국했다. 그 전날 한국에서 터진 대연각호텔 화재 때문에 가뜩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이 벌인 사건이었다. 가난 탓에 이국(異國)에서 고생하는 울분이 그날 폭발했다. 그들이 하는 고생은 '대단히 멋진 경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3교대 8시간 근무로는 부모 속 썩인 보상이 모자랐기에 회석은 하루 14시간씩 지옥에 머물렀다. 결원이 생기면 무조건 그 자리를 메꿨다. 다 돈이었으니까. 뭐든 불편하고 위험하면 무조건 지원했다. 저층 갱도일수록 수당이 높았다. 지열이 42도가 넘었지만 석탄 조각이 몸에 박힐까 봐 작업복은 벗을 수 없었다. 물은 마시는 족족 땀으로 증발해 오줌도 나오지 않았다. 잠깐 장비 가지러 입구까지 갔다 와 보면 천장이 무너져 있고 바위 더미 사이로 동료의 장화가 보였다. 그럴 때면 회석은 비상 전화로 달려가 "Tod(죽음)! Tod(죽음)!"라고 고함을 질렀다. 3년 동안 세 번이나 고함을 질렀다. 1m라도 더 갱도를 뚫으면 나오는 성과급을 받겠다고 드릴을 박아대는 사람은 대개 한국인이었다. "그 망치로 내 손톱 한 번 쳐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상(公傷) 처리가 돼서 쉴 수도 있었으니까. 아침에 밥을 해 먹으려면 손가락을 10분 이상 주물러야 손이 펴졌다. 40년 세월이 흐르고 나서"김치만 있으면 밥 먹을 만했고, 돈을 생각하면 그런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고 회석은 말한다. 남 마음 편하게 하려는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안다. 요양원에 배치된 여자들은 심신이 망가졌다. 노인들이 불쌍해서 마음이 망가지고 그 불쌍하고 덩치 큰 노인들의 대소변을 받고 돌려 눕히느라 몸이 망가졌다. 외과 병동에서는 덩치 큰 환자들을 돌보느라 몸이 힘들었고 소아과나 내과 같은 곳에 가면 말이 안 통해 힘들었다. 몸을 많이 써야 하는 간호조무사들은 남자들만큼 힘든 노동에 몸살을 앓았다. 야근도 자청하고 쉬는 날에는 다른 병원도 다니며 번 돈은 몽땅 집으로 송금했다. 쉬는 날이면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서 숲을 산책하거나 친구들과 방에서 수다를 떨었다. 돈 쓸 일이 없었다. 알렌 병원 생활 1년이 채 못 돼 오빠가 결혼한다기에 옥련이 은행에 가서 1만마르크를 부치니 깜짝 놀란 행원은 통장을 몇 번씩 재확인하며 물었다. "아니, 네가 이 큰돈을? 1년도 안 됐는데?"
    ㆍ"아비가 광부였노라"
    3년 계약이 끝났다. 귀국한 동료도 있었고 서독에 남은 동료도 있었다. 최회석처럼 간호사를 만나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회석은 옥련의 선배 언니 남편이 주선해 렌즈 회사에 취직했다. 칼자이스였다. 월급도 올랐고 몸도 편해졌다. 수술실에 근무하던 옥련은 맘씨 착한 환자 폰 짐보스키 부부가 예쁘게 보고 수양딸로 삼았다. 1976년 5월 20일 아들 남우가 태어났다. 근무시간을 엇갈리게 조정해 남우를 키우던 부부는 2년 뒤 6월 9일 딸 남희가 태어나면서 귀국을 결심했다. 시간 조절로 해결될 살림이 아니었다. 1979년 최회석은 아들 남우를 데리고 귀국했다. 이듬해 봄 정옥련은 딸 남희를 안고 귀국했다. 부부는 서울에서 안경점을 운영하다가 경기도 성남에 다세대주택을 지었다. 아이들이 다 큰 다음에야 "아비가 광부였노라"고 털어놓았다. 대단히 멋진 경험이었지만 너무나도 지독한 고생담, 그래서 자랑하기에는 쑥스러운 경험이었다. 그 쑥스러운 경험을 통해 청춘남녀들이 송금한 돈은 미국 돈으로 1억달러가 넘었고 그 사이에 공식적으로 29명의 사내가 탄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최회석이 일했던 에린 광산은 1984년 폐쇄됐다.
    ㆍ최회석·정옥련
    일찍 사랑을 만나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편지에는 ‘돈 잘 벌고 잘 먹고 산다’고 했습니다. 힘들어 못 살겠다는 소리는 차마 쓰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누가 악착같지 않았으며, 그 누가 호강했다고 할까요. 다들 그랬으니까요. 오히려 우리는 어린 나이에 선진국에서 아들딸 키우며 재미나게 살았습니다. 그게 고생이었고 외로움이었고 서글픔이라 하는데, 세월이 흘러 지금 보니 다 추억입니다. 정말이지, ‘찐하게’ 살았고, 주제 파악 잘하고 산 것 같습니다. 힘들었지만 즐거웠습니다. 늙은 우리가, 젊었던 그때 우리에게 고맙습니다.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