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14] 무사고 300만㎞KTX 기장 박병덕

浮萍草 2015. 6. 3. 08:30
    앞만 보고 달려온 38年 '기관사 人生'… 철로는 내 벗이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꼬마가 기관사 돼 증기기관차부터 KTX까지 몰아… 서울~부산 3539번 거리를 무사고… 명절엔 한번도 쉬어본 적 없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와 함께한 기차… 해방자號·목포야간열차·비둘기號… 60~70年代엔 귀성객으로 전쟁, 3배 넘는 정원에 바퀴 스프링 부러져
    최고시속 60㎞도 못넘던 충북선… 밥 짓는 냄새, 모내기농부 얼굴 보여 '등목하는 여자 봤다' 소문 돈 장소선 기관사들 속도 한껏 늦추기도<

    ㆍ1947년 추석 야간 급행 "아이고 이년아! 글쎄,입은 채로 자자는데 부득불 벗으라고 해서 이 꼴이 되고 보니 모양 좋게 됐구나!" "어이 언니도 그럼 단벌옷으로 사돈집에 가면서 구긴 옷을 어떻게 입우? 그러니깐 웃옷일랑 벗자고 그랬지 뭐예요." "글쎄, 세 사람 가방까지 다 들고 갔으니 차표도 없어졌고, 아이 참. 망할 놈의 도적놈 같으니라고." 추석을 앞둔 1947년 9월 27일 서울역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야간 급행열차 객실에서 명숙과 희숙과 계숙 자매는 치마저고리를 도둑맞았다. 살인적으로 붐비는 객실에서 겨우 청한 잠을 깨고 보니 선반에 올려놨던 가방이며 치마며 저고리까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모처럼 부산 사돈집에 간다고 동정에 풀 먹이고 빳빳하게 다려서 입고 나온 저고린데 고깟 주름 덜 잡혀보겠다고 고쟁이만 입고 잠을 청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아, 그놈!" 그러고 보니 대전역에서 옆자리에 탔던 말쑥한 20대 청년도 간 곳이 없었다. 젊은 게 보기 좋다고, 과일도 깎아주고 우스개도 나누며 칠흑 같은 밤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그 놈팡이가 치마까지 싹 들고 대구역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기실, 그 당시 그런 일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옆 칸에서도 난리가 났다. "아이고, 내 보스톤빽을 찢고 돈을 꺼내 갔네!" "이것 봐라, 내 가방도 밑바닥이 째여 있네!" "이를 어째, 내 보퉁이 속의 돈과 귀중품이 든 핸드백도 없어졌어요!" 열차가 목적지 역에 도착하고 1~2분이 지나면 객차마다 비명이 터지곤 했다. 못살았기에 도둑질을 했지만 야간열차를 탄 사람들도 못살고 가난했다. 가난한 주머니를 가난한 손이 털어가던 가난한 나라의 야간열차 풍경이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될 때까지 박병덕은 그 열차를 몰았다. 증기기관차부터 KTX까지, 정년퇴임 할 때까지 38년 동안 300만6453km를 몰았다. 거리로 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 3539번, 지구에서 달까지 네 번 왕복이었다. 그것도 무사고였다. 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한동안 나오기 힘든 대기록이다.
    ㆍ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
    1946년 6월 16일 이른 아침 부산역에서 시동을 걸고 있는'조선해방자(朝鮮解放者)호'객실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객실에 앉아 있던 백범 김구 선생이 굳은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옆에 있는 흰색 상자들의 먼지를 털었다. 상자는 세 개였다. 한 달 전인 5월 15일 맥아더 사령부 소속 군함에 실려 일본에서 봉환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담겨 있었다.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합동추모식 다음 날 유해들은 서울로 향했다. 장맛비 속에 출발한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유해는 조계사에 안치됐다가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10시간이 조금 덜 걸렸다. 그날은 이 열차의 첫 운항 후 26일째 되던 날이었다.
    명절 귀성열차에서 대중가요까지, 열차는 대한민국 사람들 애환을 싣고 달려왔다. 그 사이에 대한민국을 에워쌌던 어둠은 빛으로 변해갔다. /조인원 기자

    조선해방자호는 1945년 12월 24일 서울 용산공작소에서 탄생했다. 광복 후 우리가 만든 최초의 기관차였다. 힘이 2000마력이 넘는 특급열차였다. 명숙이 일행을 벌거숭이로 만든 완행열차와는 급(級)이 달랐다. 첫 운행도 워낙 요금이 비싼 터라 512명 정원에 29명만 탑승했다. 서울역에서 탑승한 승객들은 대부분 포항역과 부산역에 내렸다. 포항은 이북에서 온 화물선,부산은 마카오에서 온 화물선의 입항지였다. 모두 돈이었다. 포마드 기름을 잔뜩 바른 남자들은 조선해방자호 식당칸에서 고관대작들을 접대하며 화물을 싣고 서울로 올라갔다. 2등칸에는 이 사내들의 돈을 노리는 여자들이 치마 잃을 걱정 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귀족 열차였다. 서울행 열차는 대전역을 지나 영등포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했다. 박병덕은 대전역 기찻길 옆에 살았다.
    ㆍ기찻길 옆 오막살이
    병덕의 아버지는 1·4 후퇴 때 평남 성천군에서 단신으로 내려왔다. 금방 돌아가리라 생각했지만 고향에 있던 가족은 끝내 다시 보지 못했다.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에도 나가봤지만 소식이 없었다. 대신 남쪽에서 새로 만든 가족에게 평생 정을 주며 살았다. 병덕은 개구쟁이 중의 개구쟁이였다. 증기기관차에서 떨어진 조개탄으로 불장난을 했고, 쇳조각을 주워 엿을 바꿔 먹었다. 덩치가 크고 씨름도 좀 해서 형이 맞고 오면 가서 두들겨 패주곤 했다. 그런데 동네에 사는 기관사들만 보면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졌다. 노란 견장이 달린 제복을 입고 다니는 아저씨들을 병덕은 '철도과장'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녔고 철도과장이 사라지면 애들을 집합시켜 기차놀이를 하고 놀았다. 그런 아들을 보며 아버지가 말하곤 했다. "빨랑 기찻길이 연결되믄 내레 소원이 없겠다만…." 아들은 그 혼잣말을 셀 수도 없이 들었다. "기관사 뽑는단다. 시험 보러 가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배꼽친구가 말했다. 시험을 권유한 친구는 떨어지고 그만 혼자 붙었다. 1975년 5월 14일이었다. 떨어진 친구는 훗날 대성(大成)해서 한 도시의 구의원을 연거푸 하고 있다.
    ㆍ대한민국의 추억
    전쟁이 끝났다. 사람들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1954년)을 떠났다. 박병덕이 태어나고 4년 뒤인 1959년 목포행 야간열차가 신설됐다. 대전역 출발 시각은 0시 50분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0시 40분에 대전역에 도착해 허겁지겁 가락국수를 먹고 다시 열차에 올랐다. 1년 동안 운행된 이 야간열차를 소재로 노래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으로 '구슬비에 젖어가는 목포행 완행열차'('대전부르스'·안정애·1959년)를 탔다. 열차를 빼면 대한민국에 추억은, 없다. 국가의 동량(棟樑)인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명절이 되면 특별 귀성열차 승차권을 배정받았다. 일제강점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에서는 1947년부터 방학이 되면 귀성 학생 열차를 별도로 편성해 학생들의 귀향을 도왔다. 특권을 부여받고 바글바글하게 열차에 모인 남녀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불문가지였다. 사람들은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에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리라'('고향역'·나훈아·1972년)는 꿈을 꾸며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지옥과 비슷했다. 명절이 되면 전국은 아수라장이 됐다. 서울역 앞은 열차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가 되곤 했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장대와 곤봉까지 동원해 사람들을 통제했다. 1960년 1월 26일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려던 승객들이 서울역 계단에서 넘어져 31명이 죽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연약한 부녀자들이었다.
    1977년 설날 귀성열차 예매 인파… 2015년 개통된 호남선 KTX - 열차 풍경의 어제와 오늘. 사진 위는 1977년 2월 12일 서울역 설날 귀성열차 예매 승객들,
    사진 아래는 2015년 2월 호남선 KTX. /신현종 기자

    개찰구에 들어가도 문제였다. 입석표가 있어도 타는 게 불가능했던 사람들은 창문으로 들어갔다.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기관실에 승객들이 밀려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구로공단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영등포역에서는 대개 그랬다. 그럴 때면 박병덕은 플랫폼으로 내려가 승무원들과 함께 사람들을 창문으로 밀어 넣곤 했고 운전실에 함께 타고 내려간 적도 많았다.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는 사람들인데! 그는 철도 인생 38년 동안 명절은 하루도 쉰 적이 없다. 대신 대전 집 근처를 지날 때면 속도를 늦추며 인사를 하곤 했다. 통로까지 승객이 점령한 객실에서 상인들은 공중부양을 하며 소쿠리에 찐 계란과 밀감을 담아 팔고 다녔다. 1969년 추석 때는 콜레라가 창궐한 호남지역의 귀성객이 급감하리라고 예측했지만 고향에서 죽겠다며 귀성객들이 더 몰려들어 큰 곤욕을 치렀다. 그리하여 해마다 음력설과 추석이면 정원의 세 배가 넘는 승객들로 인해 열차 바퀴의 스프링이 부러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곤 했다.
    ㆍ등목하는 여자
    박병덕이 처음 탄 열차는 증기기관차였다. 1968년 디젤기관차 도입과 함께 퇴역한 증기기관차는 역 구내에서만 운행되고 있었다. 대전역에서 상사가 첫 임무를 맡겼다. 삽질. 화로에 조개탄을 넣는 작업이었다. 요령은 간단했다. 250번 삽질하고 허리 한 번 펴기. 그리고 작업이 끝나면 재 긁어내기. 힘들어서 죽을 뻔했지만 아버지의 혼잣말을 생각하며 견뎠다. 2013년 은퇴할 때 대한민국에서 증기기관차 경험을 가진 기관사는 박병덕밖에 없었다. 병덕은 기관사를 보조하는 부(副)기관사로 9년을 근무하다가 1984년 1월 14일 처음으로 가감간을 잡았다. 가감간은 기차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는 조종장치다. 병덕은 가감간을 조심스럽게 올리고 충북선에 첫 출항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충북선을 오가는 기차는 어느 마을을 지날 때면 속도가 느려지곤 했다. 충남 조치원과 봉양 사이를 오가는 충북선은 지형이 복잡해 최고 속도가 60km를 넘지 못했다. 마을을 지나면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모내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보일 정도였다. 특히 어떤 마을은 철로변에 우물이 있었는데 새벽녘이나 밤이 이슥할 무렵이면 예쁜 여자가 나와서 등목을 하는 것이었다. '등목하는 여자의 마을' 소문은 순식간에 기관사들 사이에 좍 퍼졌다. 그 마을을 지날 때면 기관사들은 으레 가감간을 저속으로 내리고 전조등을 한껏 밝히곤 했다. 모내기가 한창이던 어느 해 5월, 충북선 소이역 근처에서 선로를 따라 못밥을 이고 가던 처녀를 만났다. 그때 속도는 시속 10km 정도였다. 밥 소쿠리를 머리에 인 처녀의 윗도리가 올라가 살이 다 드러났다. 꼴깍, 침을 삼키며 병덕이 경적을 크게 울리면서 소리쳤다. "아가씨, 배꼽!" 눈이 마주친 처녀가 "에구머니" 하고 손을 내렸고, 소쿠리에 있던 그릇들이 와장창 다 깨졌다. 짓궂고 인간적인 노선이었다. 그러다 산중(山中)으로 기차가 올라가면 별이 보였다. 기차 소리와 밤새 우는 소리와 구름 흐르는 소리와 별이 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박병덕은 기억한다. 1986년 12월 3일에는 '미친년' 소동이 벌어졌다. 새벽 3시 천안역을 출발한 서울행 통일호 열차 앞에 빨간 내복과 고쟁이만 입은 여자가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선로에 미친 여자가 있다"고 관제소에 보고한 뒤 잡고 보니 전남 하의도에서 인천으로 결혼식 때문에 가던 할머니였다. 앞차에 탔다가 난방 스팀이 너무 뜨거워 옷을 한 꺼풀씩 벗었는데 그래도 더워서 바람이나 쐬자며 내렸다가 차를 놓쳤다는 것이었다. 열차 뒤꽁무니가 보이니 달려가면 도로 탈 수 있겠다 싶어 달렸는데 열차를 놓치고 정신줄도 놓으시고 마냥 달리기만 했다는 것이었다. 자살하겠다고 선로에 누워버린 사람의 30m 전방에서 겨우 열차를 세웠더니"왜 빨리 안 죽여!"하고 대들던 일 대학교 입시 예비소집날 객차를 평소의 두 배로 붙여서 사람들을 태웠다가 기차가 퍼져서 연착했던 일, 산모퉁이를 돌다가 화염에 휩싸여 있는 객차를 보고 비상정차를 했던 일, 그리고 새벽에도 불이 훤하게 밝은 구로 공단 옆을 지나며 가슴이 뭉클했던 일까지, 기억은 모두 추억이 됐다. 2001년 1월 15일 서울역을 떠나 구로공단이 있는 영등포역을 거쳐 시흥으로 가는 길목에서 박병덕은 100만km 무사고 기록을 세웠다
    ㆍ재건호에서 KTX까지
    디젤기관차가 대세가 되면서 1967년 8월 31일 증기기관차 운항이 종료됐다. 1980년 10월 17일 충북선 삼탄역에 조명시설이 설치되면서 조명 없는 무등역(無燈驛)이 사라졌다. 그 사이에 우리는 조선해방자, 재건, 태극, 맹호, 건설, 증산, 백마, 청룡, 갈매기, 대천, 관광, 신라, 계룡, 충무, 새마을, 상록, 약진, 부흥, 풍년, 우등, 무궁화, 통일, 비둘기호를 타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여행했다. 그리고 2004년 4월 1일 고속열차 시대가 열렸다. 2004년 3월 30일 KTX 개통식 날, 박병덕은 동료 기장 이병남과 함께 고속열차를 몰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57년 전 조선해방자호가 9시간 넘게 걸렸던 길이 2시간 40분 걸렸다. 시속 300km로 날아가는 고속철 운전실에서는 등목하는 여인도,못밥 이고 가는 처녀도 보이지 않았다. 야간열차 바깥으로 훤하게 밝았던 구로공단은 불이 꺼졌다. 헬기보다 빠른 기차를 몬다고 해서 기관사는 기장(機長)이라고 불린다. 지금 박병덕이 살고 있는 서울 북가좌동 아파트에서 산책을 나가면 디지털단지의 불이 밝다. 그 불빛을 보면서 화가인 아내 송미경에게 말한다. "휴일에는 일하러 나가고, 쉬는 날에는 귀신처럼 불러내는 친구들 따라 술 먹으러 나가는 남편을 안 버리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그 덕에 부부는 22일 결혼 32주년을 맞았다. 박병덕은 2013년 4월 16일 김천과 대전 사이에서 300만km 무사고 운전을 달성하고, 두 달 뒤 정년퇴직했다.
    ㆍ박병덕
    제복이 멋있어서 좋아했던 기관사가 평생 직업이 되었습니다. 시속 60km짜리 증기기관차에 올라탔던 인생이 300km가 넘는 고속열차에서 마감됐습니다. 300만km를 열차 위에서 보내며 저는 차창 밖 대한민국이 바뀌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철길 위에는 열차 바퀴 50만 개가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 바퀴들이 어떤 길로 우리를 이끌지 궁금합니다. 철길을 따라 저는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우리, 참 먼 길을 달려오지 않았던가요. 저는 지금 문화재지킴이로 서울 창경궁에서 궁궐 해설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달려온 그 길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속살을 찌울 시간이 아닐까요.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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