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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마지막 회 식민지 해방투쟁의 현대사, 베트남 쿠바 과테말라 리비아 이란

浮萍草 2015. 5. 18. 12:02
    9. 식민지 해방투쟁의 현대사 양의 기계류 문명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코 진정한 '인류문명'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 동안 기계류 문명의 홍수 속에서 헤매었던 인류는 올바른 인류문명에의 길을 다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물질 문명을 추구하되 공정한 분배를 바랄 수만이라도 있다면 제국주의적 수탈이라는 극악한 반문명상태에서는 어쨌든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인류의 본성을 찾기 위한 시도는 상상력에 그치지 않았다. 식민지 해방투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지나반도의 베트남,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아,카리브해의 쿠바,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니카라과 등이 해방투쟁의 주무대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리비아와 이란이 중대한 혁명적 과정을 거쳐 세계사의 큰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여러 해안 국가들도 겉으로나마 독립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신식민지주의로 모습을 바꾼 제국주의는 더욱 인류사회와 지구 자체를 파괴해 가고,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기형적 발전을 거듭해 갔다. 1. 베트남
    호찌민. 베트남 역사는 한 마디로 외세 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
    투쟁의 역사로 정의할 수 있다 편집부
    한국전쟁으로 잠시 불경기의 늪에서 빠져 나왔던 미국이 다시 경제침체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기 시작한 것과 프랑스로부터 베트남 문제를 물려받게 된 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통킹만에서 의문투성이의 미국군함 피격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북베트남(월맹)에 대한 적대행위를 본격화 했다. 그 후 십오년 이상이나 미국은 '양키제국주의자'로써 베트남 인민해방군(베트콩)과 베트남 민족민주전선의 원수가 되어 싸웠다. 수십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 명분없는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또한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베트남인 들이 문명세계의 이름아래 희생되어 갔다.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은 어떠한 반대자도 용납하지 않고 투옥과 학살을 예사로 자행했으므로 전세계의 양식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를 이은 티우 정권도 근본적으로 고 딘 디엠 정권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서 베트남민중의 민심은 남베트남 정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양의 파리'라는 사이공은 온갖 타락의 온상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마약과 매춘부는 물론 미군장비와 미제 무기까지도 공공연히 매매되고 있었다. 베트남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그러한 미제무기들을 구입하여 미군과 월남군에게 대항한 것은 잘 알려진 비밀 이었다. 비좁은 한반도에서 8·15 이후 국제적인 조소를 받아 가며 동족상잔을 그치지 않음으로써 배달민족 역사에 일찌기 없던 반문명적인 분단국가로 전락한 한국이,이 기묘한 '해방 방해전쟁'에 수만 명의 한국군을 보낸 것은 다시 한번 국제적인 의혹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었다. 미국이나 서방 자본주의국가들이 베트남의 자발적인 독립을 방해한 이상 호지명이 이끄는 베트남 해방군은 공산국가인 쏘련과 중공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곧 미국의 호전적인 위정자들이 호지명을 '붉은 악마 공산주의자'인 것으로 선전하는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이 호지명의 뒤를 이은 월맹지도자들에 의하여 '해방'된 후에 곧 중공과 국경분쟁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국제 공산주의보다도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의 경향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2. 과테말라와 쿠바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로 피신해 있던 게바라는, 1955년 역시 쿠바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자료사진 편집부

    과테말라의 아르벤즈는 과테말라를 신식민지주의 첨병인 미국 다국적기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자립경제를 이룩하려 했으나 중도에 미 중앙정보부(C.1.A.) 의 반혁명공작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씨·아이·에이는 전후 세계 각국의 혁명을 분쇄하여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인 다국적기업의 수익과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적인'구사대'역할을 해 왔다. 아르벤즈는 실패했으나 아르헨티나의 의과대학생이었던 '체 게바라'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체 게바라의 동지인 쿠바의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등의 동지들과 함께 쿠바의 바티스타 매판정권을 몰아내는 민중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아르벤즈가 과테말라에서 겪었던 실패를 만회했다. 미국의 앞 바다에서 발생한 이러한 변화는 진보의 기수를 자처하던 케네디 미국대통령을 자극하여,미국은 쿠바의 피그스만으로 반혁명군 침공을 시도했다. 그러나 케네디의 시도는 쿠바 민중의 효과적인 저항에서 부딪쳐서 성공할 수 없었다. 쿠바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게 된 미국측은 카스트로의 우호관계 요청을 거부하고 모든 무역을 금지시켜 쿠바를 고사(枯死)시키려 했다. 그러자 카리브해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려 하던 쏘련과 중공이 쿠바의 설탕을 사 줌으로써 쿠바는 초기 단계의 위기를 넘겼고 쿠바는 플란테이션에 의한 단일작물 재배로 인하여 황폐해진 농업부터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쿠바는 미국 자본가들에 의하여 전 농토에 사탕무우 단일경작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바가 발전시켜 나간 사회주의는 민중을 위한 모범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일단 성공했으나,바로 그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신랄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억압과 착취와 가난과 무지에서 헤매이던 쿠바의 민중이 교육의 혜택을 받고,기본적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으며,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고,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무슨'주의'라는 이유로,자본주의 사회보다도 인간의 품위를 보다 더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악한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마약과 매춘부와 거지와 깡패들이 사라진 사회는 분명코 그러한 악덕 (惡德)들이 들끓고 있는 사회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사회인 것이다. 그런 도덕수준이 높은 사회는 총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높은 도덕성을 사회적 통념으로 삼는 사회만이 그러한 인간존중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이를 입증한 쿠바는 인류문명에 있어서 불완전하나마 한가지 공헌을 한 셈이다. 컬럼버스가 그 저주스러운 뱃길을 달려오기 전에도 그러한 평화 속에서 잘 지내던 인디오의 세계가 있었다. 쿠바가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옛 문명의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는 데 약 500여년이 허비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쿠바혁명의 성공은 일찌기 애국자인 산디노가 독립운동을 일으킨 바 있었던 니카라과의 억압받던 민중을 각성시켰다. 혁명가 산디노의 뒤를 이어서 니카라과 혁명을 수행한 혁명가(산디니스타)들은 미국자본가들의 충실한 하수인인 소모사 일파를 파라과이로 쫓아 버렸다. 소모사 일가가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집권하고 있던 40여년은 니카라과의 전 민중을 가난과 질병과 무지 속으로 몰아 넣었던 기간이었다. 산디니스타에 대한 소모사 정부군의 탄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정부군은 게릴라 출몰지역의 전 주민에 대한 학살·방화·약탈 등 왜구들이 일찌기 선보인 바 있던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는 야수적인 공포정책을 사용했다. 수많은 마을들이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진압에 나섰던 정부군 병사들은 민중의 재산을 약탈함으로써 잠시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분노한 민중은 혁명게릴라들을 점점 더 지지하게 되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직접 소모사 타도에 나섰다. 마침내 산디니스타에게 쫓겨서 망명한 소모사는 파라과이에 있던 자기의 별장에서 민중을 수탈하고 심지어는 차관까지 집어 삼켜 만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유유히 골프를 치며 놀다가 남미의 혁명단체에 의하여 로켓포탄을 맞고 공중분해되었다. 니카라과는 산디니스타 민중정부를 건설했으나 쿠바와 마찬가지로 미국 중앙정보국의 반혁명공작에 시달리게 되었다. 할리우드 액션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니카라과와 리비아를 괴롭히는 람보작전으로 자신의 식욕을 돋구었던 것이다. 3. 리 비 아
    리비아 혁명가들이 서방의 개입에 반대하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Aljazeera 편집부

    리비아의 정부군에 소속되어 있던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은 석유자원이 풍부한 리비아의 국민이 빈곤에 시달리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매판정권인 이드리스 왕정은 거대한 석유이권을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옥시덴탈 석유회사 등에 넘겨 주고 민중의 고통은 외면한 채 온갖 사치행각을 다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장교 교육을 받기 위해 런던에 파견나갔던 카다피는 한 카지노에서 리비아의 재벌과 옥시덴탈 석유회장이 거액의 도박판을 벌리고 있던 현장을 목격했는데, 이를 노려보는 카다피에게 해머회장은 '애송이'라고 놀렸다. 그러나 수년 후 카다피는 혁명에 성공하여 옥시덴탈 석유회사를 비롯한 서방의 착취적 자본들을 차례대로 국유화해 버렸다. 카다피가 혁명에 성공하기 전의 대다수 리비아 여성들은,사춘기만 되면 '국가정책'에 따라서 지중해 연안의 공창(公娼)에서 수년간 반의무적으로 정조를 파는,외국인 상대 매춘부로써 외화획득에 종사해야만 했다. 카다피의 혁명에 의하여 매춘관광은 사라졌고, 거지도 사라졌으나 카다피의 출신 종족이기도 한 사막의 베드윈 종족은 지중해 연안의 안락한 무료 아파트보다는 계속 사막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에 따라서 카다피로서는 국가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힘들었다. 리비아는 그 넓은 국토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이백여만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다피는 정당한 계약조건이라면 제 3세계는 물론 서방세계에서도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구하면서 리비아 사막을 비옥한 농토로 개조하는 공사를 진행중이다. 그의 더 할 나위없는 고결한 인간미와 코란에 바탕을 둔 나무랄 데 없는 도덕성에 의하여,리비아는 물론 전 아랍세계는 이슬람문명에 있어서 또 다른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이슬람형제 사회건설을 통한 새로운 아랍세계의 확립을 주장하는 카다피는,미국제일주의자 레이건의 람보식 공격의 목표가 되어,레이건의 지중해 함대는 걸핏하면 리비아의 영해를 침범하고 심지어는 카다피 대통령의 숙소를 한밤중에 저돌적으로 공습하여 카다피의 가족을 비롯한 수백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적나라한 야만성을 노출하기도 했다. 미국의 수많은 의약품 공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않은 채,러비아에서 하나 만들어 보려는 의약품 공장은 '화학무기 제조용으로 변할 수 있다'하여'모든 화학공장들을 폭격해서 없애 버리겠다'는 폭언도 서슴치 않으며 미국의 수뇌부는 끊임없이 카다피를 제거하기 위하여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살기 좋은 아랍 민중의 낙원을 이룬 리비아를 공격하는 진짜 목적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 4. 이란
    1953년 이란에서는 중동 지역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부가 구성되었다.그러나,당시 이란 정부는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배후 조종한 쿠데타로 전복
    당했다. 편집부
    리비아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의 이슬람혁명에 성공했다면 중동지역에서 호메이니옹이 이끌어서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혁명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란의 팔레비 왕정은 이차대전 전에는 영국 이차대전 후에는 미국의 다국적기업들과 결탁하여,이란 민중을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두고 반민중적인 독재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중동지역에서는 이슬람의 시아파 회교도와 순니파 회교도간의 사소하고도 미묘한 갈등에 의하여 이란과 이라크가 반목하고 있었고 두 나라의 석유판매 수입금은 미·쏘 양국으로부터 사들이는 무기 대금으로 대부분 지불되었다. 따라서 그 풍부한 석유자원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아랍민중의 생활은 조금도 개선될 수 없었다. 민중의 분노는 여기서도 폭발하여 회교지도자 호메이니옹을 앞세운 민중혁명이 성공함으로써,팔레비와 미국 자본가들은 이란에 발을 못 붙이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이란에 무기를 팔 때'쏘련공산주의자들이 이라크를 선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선전하던 미국 측은 정작 이란에서 쫓겨나게 되자 이번에는 이란과 분쟁에 돌입한 이라크에다 무기를 팔기 시작하면서 '이란은 쏘련과 짜고 있다'는 앞·뒤 다른 선전을 하게 된 점이다. 그러나 이란은 분명히 쏘련과 손잡은 것도 아니며,이른바 '이슬람 형제국'임을 주장하는 회교국가일 뿐이다.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이 폐쇄되고, 이란에서 가지가지 공작에 전념하던 미국인들이 공사관에 갇힌 상태가 되자,'도덕국가 미국'을 부르짖던 카터는 그들을 구출하고자 했다. 그는 페르시아만의 미군함정에서 헬리콥터로 특전대원들을 실어 보냈으나,사막의 돌풍에 휘말린 헬리콥터가 추락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슬람의 기도문에 있는 대로 '인샬라(Inch Allah ; 신의 뜻대로)'였던 것이다. 카터의 걱정과는 달리 인질에 대한 폭행은 발생하지 않았고 호메이니옹은 인질에 대한 간단한 조사만 마치고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이라크의 야심적인 독재자 사담·후세인은,호메이니의 이란이 전세계의 언론을 통해 매도당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란에 대해 명분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8년에 걸쳐 백여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치열하게 전개된 양국간의 본격적인 전쟁에서 두 나라는 다시 서방 및 쏘련 등으로부터 천문학적인 액수의 최신무기들을 다량 구입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특히 이라크의 후세인은 미국·프랑스 등 서방의 무기상인들에게 월남전이후 최대의 고객으로서 환영받았다.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후세인은 그 후 이란과의 전쟁을 어중간하게 종결짓자마자 이번에는 쿠웨이트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감행하여 아랍세계의 해묵은 문제점들 중의 한 가지를 더 떠맡기도 했다. 카터는 아프가니스탄 정책과 이란 정책의 실패로 레이건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었는데,스포츠 해설 아나운서 - 영화배우 - 어용연예인 노동조합장 -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을 거치며서 '파우스트적으로' 출세한 레이건은 곧 자신의 가치를 발휘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이란·리비아·니카라과·쿠바·북한 등을 몽땅 싸잡아 '테러국가'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한 '테러'에 나섰다. 그로 인하여 특히 페르시아만은 일촉즉발의 초긴장감이 그칠 새가 없게 되었다. 레이건이 '테러국가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자,레이건은 자신의 임기 말년인 4321년(서1988) 11월에 이란의 민간항공기를 '5억달러 짜리 최첨단 전자함정'이 보유한 미사일로 페르시아 상공에서 격추시켜 270여명의 이란 민간인을 학살하고 4322년(서1989년) 1월에는 리비아의 정찰기를 지중해의 리비아 영해에서 격추시켜 버림으로써,그 자신이 바로 유능하고 저돌적인 '국제 테러범'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 4빙기 이후 펼쳐진 인류문명의 시작으로부터 서기 1990년까지의 세계사를 우리민족 주체적 관점에서 정리해 본 '세계사 반정'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모든 관계자들과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모든 이들에게 건강과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미처 못 다한 이야기는 이번 6월 초 출간 예정인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桓檀正統 世界史),지식과 감성사 발행'에 보강되어 선 보일 예정입니다.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질정을 바탕으로 10년 내지 20년 마다 보강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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