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8 백자달항아리와 권대섭

浮萍草 2015. 5. 23. 12:00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한국의 백자달항아리
    예가 권대섭과 부산 공간화랑 대표 신옥진이 나눈 대화입니다. 
    권대섭은 백자달항아리의 명인(名人)이며 신옥진은 올해로 40년째 화랑(畵廊)을 경영하고 있는 부산 문화의 대부(代父) 격인 인물인데 참으로 이야기가 정겹습니다.
    공간화랑 도로에서 한 사내가 달항아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 사내가 바로 한국 최고의 달항아리 도예가 권대섭이다
    #1. 그럼 왜 전시는 하는데? 권대섭= “불만이 많아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신옥진= “그럼 왜 전시는 하는데?”= “제대로 된 작품이 안 나왔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럼 왜 전시는 하냐고?”
    지난 12일 부산 공간화랑에서 권대섭 달항아리전이 열렸습니다. 이날 저녁 두사람이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 2. 도대체 뭘? 권대섭= “저는 매사에 목숨을 걸고 합니다.” 신옥진= “뭐에다 목숨을 거는데?”= “저는 삼가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뭐를 삼가냐고?”
    두 거장의 대화가 한편의 블랙코미디 같습니다. 예술의 경지가 극(極)에 달하면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 마치 어린이처럼 변하는 것 같습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의 전형이지요. # 3. 그렇게 못참아?
    권대섭= “(신옥진) 관장님, 소주 없습니까?” 신옥진= “이 집은 소주 안 파는데.”= “가슴이 답답해서 한잔 해야겠는데요?”= “조금만 참으라니까, 손님들 오시는데 얼굴 벌개서 되겠어? 그렇게 참을성이 없나?”
    이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 권대섭이 맥주컵 2개에 ‘물’을 반쯤 채워들고 들어옵니다. ‘물’이 아니라 ‘소주’지요. 그걸 본 신 관장이 연신 혀를 찹니다. “정말 못말리겠구먼.” # 4. 디스 이즈 달항아리 데쓰.
    권대섭의 아내= “저이가 유행어를 만든 적이 있어요. ‘디스 이즈 달항아리 데쓰.’ 작품 설명을 하라고 하니 영어와 우리말과 일본어를 섞어서 딱 한마디했어요.” 권대섭= “더 짧은 것도 있는데 ‘이것은 사발입니다.” 권대섭의 아내= “저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속이 터질 뻔 했어요. 저렇게 말을 못한다니까요.” 신옥진= (권씨를 보며) “오늘도 그러려고?”
    이런 대화의 끝에 모임이 시작됐습니다. 해운대 조선호텔의 연회장입니다. 참석자는 스무 명 남짓, 하나같이 부산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달항아리 전시회답지 않게 무게 있는데 돌연 한 노(老)신사가 마이크를 잡더니 노래를 부릅니다.
    권대섭 달항아리 전시회가 열린 12일 저녁 한 모임에서 한국 추리문학의 대가 김성종 선생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도공에게 바치는 소설가의 노래는 예술에 경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헌사같다.

    한국 추리소설계의 거장 김성종 선생입니다. 독일 민요에 이어 앵콜을 요청하자 이태리 가요가 이어졌습니다. 대체 이 해괴한 만남은 어떻게 해서 이뤄진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유래를 알기 위해 저는 여러분을 영국의 대영박물관으로 모시고 갑니다. 우리는 대영(大英)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영국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British Museum)에 갔다가 당혹스러웠습니다. 일본관이야 워낙 컸지만 바로 옆에 중국관이 비슷한 규모로 확장돼있었습니다.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의 자화상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대영박물관에 갈 때마다 저는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백자달항아리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백자달항아리에는 사연이 많습니다. 여기서 잠시 백자달항아리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것이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인 달항아리다. 영국인 버나드 리치가 가져간 것이다. 자연스레 이즈러진 모양이 꼭 달을 닮았다

    백자달항아리는 생긴 것이 꼭 달처럼 둥실둥실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한문으로 백자대호(白瓷大壺)라고 하는데 제작기법이 특이합니다. 커다란 백자 접시 두개를 위 아래로 맞붙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예상 밖의 현상이 생깁니다. 중력(重力)의 힘에 따라 위에 놓인 백자접시가 아랫쪽 백자접시를 눌러 모양이 이그러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확한 원형보다 이그러진 모습에서 우리 선조들은 아름다움을 찾아냈습니다. 자연스런 한국적인 미(美)의 백미(白眉)입니다. 백자달항아리는 통상 18세기, 영조 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높이 45㎝정도인데 놀랍게도 국내외에 전해지는 것이 스무점에 불과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 국보(國寶)로 정해진 게 두점,보물(寶物)로 지정된 것이 5점이니 전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13점에 불과합니다. 그중 한점이 대영박물관에 있지요.
    권대섭이 자신이 만든 달항아리를 만져보고 있다. 작가는 점점 달항아리를 닮아가는 것 같다

    귀한 백자달항아리가 지구 반대쪽 영국으로 가게된 것은 현대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백자달항아리를 보고“현대 도예가 나갈 길을 조선 도자가 가르쳐준다”고 했을만큼 한국 도자에 심취해있었다고 합니다. 리치는 1935년 덕수궁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귀국할 때 그는 도자기 한점을 가져갔는데 그게 바로 백자달항아리입니다. 리치는 이것을 가져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을 가져갑니다.” 그의 사후 백자달항아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백자달항아리는 사랑하는 제자 루시 리에게 넘어갔습니다. 1995년 그녀는 사망하면서 스승으로부터 넘겨받은 보물을 스승의 아내 재닛 리치에게 줬습니다. 재닛 리치는 백자달항아리를 넘겨받은 지 3년만에 사망했고 그후 유품들은 경매에 넘어갔지요. 그런데 이때 대영박물관이 나서게 됩니다. 대영박물관은 당시 백자달항아리 시세의 4분의1정도인 1억2000만원을 써냈다고 합니다. 백자달항아리는 5억원을 제시한 한 한국인의 것이 됐지요. 그런데 IMF외환위기를 맞으면서 환율이 폭등하자 경락자(競落者)가 포기하고 맙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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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도공들의 기술을 배우러 일본에 가다
    렇게 우여곡절을 거친 백자달항아리가 대영박물관 한국관의 중앙에 있는 자태를 보면 일본관-중국관의 요란한 전시물들을 일거에 제압하는 기품(氣品)을 느끼게 
    됩니다. 
    이후 세계경매시장에 백자달항아리가 나온 것은 2007년입니다.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였는데 이때 나온 백자달항아리가 서울 프리마호텔에 넘어갔습니다. 
    당시 낙찰가가 17억원이었다고 하니 우리 백자달항아리의 위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의 다과(多寡)가 전부는 아니겠지만요.
    조선시대 반가(班家)에서 아꼈다는 백자달항아리에 대한 예찬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화가 김환기(金煥基)의 작품 중에 달항아리가 있습니다. 
    오죽 달항아리에 빠졌으면 그림으로 한폭안에 들어있는 우주의 공간을 담으려 했겠습니까?
    6·25때 김환기는 아끼던 백자달항아리를 집 우물 속에 넣어두고 피난을 갔다고 합니다. 
    돌아와보니 상당수가 깨져있었다지요. 
    그가 화폭에 백자달항아리를 담은 것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고유섭은 달항아리를 ‘무기교의 기교(技巧)’라고 했으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쓴 고 최순우선생은 는 달항아리에서 우리 민족의 후덕(厚德)함, 
    마치 맏며느리 같은 넉넉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번에 부산에 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달이 5개나 떴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달(月)이 아니라 백자달항아리 전시회에 명품 5점이 출품된 것입니다. 
    근처를 지나시는 분들은 쇼윈도우를 통해서도 감상할 수 있으니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
    이 것이 권대섭의 달항아리다. 대영박물관에 보존된 것과 비교해보시길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마린시티1로에 ‘공간화랑’이 있습니다. 지방 화랑 가운데 꽤 역사가 깊은 곳으로 올해로 개관 40년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 화랑 관장 신옥진은 지금까지 회화작품만을 전시해왔다고 하지요.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른 분야까지 범위를 넓히면 주위에서 욕을 먹는다는 것이지요. 신옥진 관장은 “나는 왜 안열여주느냐”고 조르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런 신옥진 대표의 고집이 2010년 꺾였습니다. 권대섭이라는 도공(陶工)을 보고난 후였습니다. 2010년 첫 권대섭 달항아리전이 열린 이후 12일 시작된 두 번째 달항아리 전시회가 26일까지 그곳에서 열립니다. 작품 수는 5점, 적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한 점을 만들어내는데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서울 올림픽도로의 동쪽 끝, 하남(河南)을 지나면 검단산(黔丹山)이 나옵니다. 산줄기 끝 부분의 팔당호(八堂湖)는 이 즈음이 제격입니다. 꽃무리가 수놓던 봄빛의 호수는 지금 초록천지로 바뀌어 여름을 기다리지요. 장어집이 즐비한 그 부근이 바로 조선백자의 본향(本鄕)인 것을 아십니까? 마을에는 금사리(金沙里) 분원리(分院里)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사기그릇 굽던 터라는 뜻이지요. 도마리(陶馬里)라는 이름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여우의 혼(魂)을 억누르려 질(陶)로 만든 말(馬)을 고개에 세웠다 해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도예가 권대섭(權大燮·63)은 팔당호가 내려보이는 집에서 우리 예술의 정화(精華)라 불리는 백자달항아리를 30년 넘게 만들었습니다.
    전시회 개막을 앞두고 참석자들과 환담을 나누는 권대섭

    백자달항아리 외길을 걸어 성공하기까지 그에겐 몇 가지 기연(奇緣)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미술 신동(神童)으로 전국 대회의 상(賞)을 휩쓴 뒤 홍익대 서양화과에 진학한 그의 인생은 군(軍) 복무 후 3학년에 복학할 즈음 바뀌게 됩니다. 인사동에서 우연히 본 백자(白瓷)에 넋을 잃은 그가 돌연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것이지요. 미술계의 치사한 파벌(派閥)싸움에 지치고 돈없어 고생하던 그가 도자의 세계로 향한 것은 군 복무중 만난 설원기란 친구의 영향이 큽니다.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인 설원기씨의 부친은 언론인이었다가 기업인으로 변신한 설국환 선생인데 권대섭이 도예를 배우려할 즈음 인테리어 회사를 만든 겁니다. 그런데1년쯤 그 회사에서 일하자 설선생이 ‘오원도자기’라는 회사를 만든 것입니다.
    예술가의 실루엣이다. 먼산에 달항아리가 뜬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기자만의 생각일까

    권대섭은 일본 규슈(九州) 이만리(伊万里)에 있는 나베시마요(鍋島窯)의 오가사와라 선생 문하(門下)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세월이 1979년부터 1984년까지 5년이나 됩니다. 지금으로치면 도자기회사의 선발요원쯤이 된 겁니다. 일본의 도자기 수준은 세계적입니다. 그런데 그 원류(源流)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끌고간 한국의 도공(陶工)들이었습니다. 나베시마요 역시 도자기로 유명한 곳인데 임진왜란 때 끌려간 우리 후예들이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며 생긴 곳이지요. 권대섭의 스승 오가사와라 선생은 그 7대(代)째로, 당시 40대였지만 엄격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첫 1~2년간은 청소만 했으며 지도는커녕 눈치껏 보고 배워야하는 것 인데 이유가 있습니다. 재료에 대한 소중함을 직접 느끼라는 배려지요. 일본에서 도자기 교육을 제대로 받고 돌아온 권대섭은 상업 도자기를 만들 것이냐, 예술적인 도자기를 만들 것이냐의 기로(岐路)에서 고민했습니다. 그가 설 선생을 찾아가 ‘예술에 매진해보겠다’는 뜻을 전하자 표정이 일그러졌다고 하지요. 권대섭에게 들인 돈만 2억원이 넘는데 지금으로치면 ‘배신’이 되겠지만 설 선생(당시 직함은 회장)은 그의 앞길을 막지않고 열어줬습니다. 설회장과 헤어진지 다시 만난 것이 1995년인데 그는‘자네가 뭔가를 해냈구나’하며 기뻐했다고 하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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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많은 예술가는 작품에 자신이 없기 때문"
    렇게 독립한 권대섭의 앞에 신창호 회장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타임지(誌) 국내 총판을 하던 그와 권대섭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런 권대섭에게 신 회장을 소개한 것은 권대섭의 재능을 눈여겨보던 한 고(古)미술상이었습니다.
    두어 번 만난 뒤 신 회장은 지금 권대섭이 사는 경기도 입석리 집,바로 밑의 한옥으로 데려갔습니다. 
    가마까지 갖춘 예쁜 한옥을 권대섭에게 넘기며 백지수표까지 내주었다고 합니다. 
    권대섭이 백자에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신 회장은 틈만 나면 연탄과 쌀 한 가마니와 작업 비용을 댔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권대섭은 주변의 조선 관요(官窯) 가마터를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숫자만 200개가 넘는 한국 도자예술의 메카에서 그는 사금파리 주우러 다녔습니다.
    권대섭은 백자 판 돈으로 골동품을 사들인다. 그의 집 안에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선배 도공들이 남긴 파편(破片)은 소중한 공부재료였다고 합니다. 부서지긴 했지만 형태가 있고 이어보면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눈치 빠른 일본인들은 우리가 눈여겨보지않을 때 그 파편을 떼로 몰려와 쓸어갔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앞서 말한 1995년 즈음입니다. 그해에는 국내에서, 1997년부터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 역정(歷程)은 장자(莊子)의 한 귀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큰 새(大鵬)는 쉬 날지 않지만 한번 날개를 펴면 창공(蒼空)을 뒤덮는다’는 그 유명한 구절입니다.
    권대섭이 작업실에서 백자달항아리를 살펴보고 있다

    현재 그의 작품은 멕시코, 러시아, 방글라데시 국립박물관과 우리 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올 9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개인전이 아니라 문화관광부에서 그를 한국 백자의 ‘국가대표’로 선정한 것입니다 1997년과 98년에만 동경,요코하마,오사카에서 잇따라 전시회를 했는데 이때의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동경에서의 전시회는 한국대사관 요청으로 이뤄진 것인데 그걸 본 일본의 갤러리에서 요코하마 전시를 하자고 제안한 겁니다. 2007년엔 미국 뉴욕에서 했고 2009년에는 다지안 마이애미·바젤 아트페어에서 했는데 그 때는 스승 오가사와라 선생도 왔다고 합니다. 권대섭은 지금도 1년에 한번은 일본을 찾아 노년의 외로움을 느끼는 스승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러 평론가들은 권대섭의 백자달항아리가 옛 조선 도공들의 그것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평합니다. 본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항아리 형태는 기원전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만드는 건 아닙니다. 18세기 조상들에 의해 이미 개성있는 모양이 만들어졌고 전 현재에 적합하게 해석할 뿐이지요. 다만 사람의 손이 아닌 불(火)이 형태를 만든다는 데 백자달항아리의 묘미가 있긴 해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구우면서 형태가 뒤틀리거든요. 그렇다고 도예가 대가없이 결과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불의 온도와 결과를 철저하게 계산해 장작 한 개비를 더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게 바로 도예가들이거든요.” 그는 한때 인기를 끌었던 ‘이도(井戶)다완 열풍’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도다완, 이도다완하는데 막사발이란 게 뭡니까, 밥 먹고 술 마시고 반찬 담고, 그렇게 막쓰는 게 막사발이잖아요. 이도다완이 유명해졌다고 그 색이나 모방하는데 조선의 백자 사발이 사실은 다 다완이예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할 인물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대섭이 만든 백자 막사발. 그 안에 따른 말차 한 잔이면 우주가 다 내 것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은 권대섭에게 꼭 들어맞습니다. 5년간의 일본 수학과 남종면 이석리에서의 10년 공부와 기인(奇人)들의 도움에도 그는 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돈 안되는 백자항아리와 백자사발만을 고집했습니다. “백자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엄격하고 부드럽기도 하지요.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는 그걸 보고 ‘슬프다’고 했지만 전 그게 ‘구라’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 사람들 입장일 뿐이지요. 저도 미(美)의 기준은 전통에 두곤 있습니다만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단순,소박,무작위성(無作爲性)만 말하는 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백자를 유백, 설백, 회백으로 나누지만 실제 백자색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다양함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거든요. 사실 흰색과 백색은 다른 겁니다. 동양화가들이 쓰는 먹색이 검은색과 다른 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렇게 엇비슷해보여도 다르니 모든 작업이 손으로 이뤄집니다.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수(手)작업으로 이뤄진다는 거지요. 백자 소지(흙)는 손과 호미로 분류해 모으고 도석도 쇠몽둥이로 빻아 체에 거릅니다. 그걸 햇볕에 사나흘 말리면 꾸득꾸득해지지요. 그러면 발로 밟아 끈떡끈떡하게 만든 뒤 치댑니다. 그제서야 항아리 형태를 두개 만든 뒤 몇 단계로 말리고 초벌구이와 순수낙엽재를 이용해 장작가마에서 소나무 장작으로 굽는 겁니다. 온도는 1300도 정도인데 온도계는 사용하지 않아요. 순전히 불 색깔이 녹아있는 유약의 상태를 보고 제가 판단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데 약 20~30일이 걸리지요.” 권대섭에게 “가마에 넣은 백자달항아리 가운데 몇 개가 살아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전 가마에 백자달항아리의 경우 2~3개 밖에 넣지 않습니다. 처음엔 다 망한 경우도 있고 지금은 절반 정도가 살아남지요.”고 말했습니다. 백자에 쓰는 흙은 고령토와 양구 백토(白土)를 혼합해 쓴다고 합니다. 나무는 강원도 홍천에서 조선 소나무를 구해다 씁니다. 조선 소나무가 불에 활활 타는 모습이 장관일 겁니다. 그에게 가마에 불 때는 날, 연락을 달라고 하니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집 뒤에 있는 가마에서 나란히 앉아있는 기자와 권대섭

    앞서 권대섭과 신옥진 관장의 대화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권대섭은 말 수가 적습니다. 자랑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자기 작품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예요. 자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것저것 말을 합니다. 저는 말 많은 예술가는 믿지않아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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