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10 :이원익이 보여주는 공직자의 道

浮萍草 2015. 5. 29. 09:00
    인조가 40년이나 정승을 지낸 이원익에게 집을 지어준 이유
    기도 광명시(光明市)에 특이한 도로가 있습니다. 
    ‘오리로(路)’입니다. 
    처음 보는 분들은 동물인 오리(Duck)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한자로는 오동나무 오(梧) 마을 리(里) 자를 씁니다. 
    ‘오리’라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물의 호(號)입니다. 
    바로 이원익(李元翼ㆍ1547~1634)대감을 말합니다. 
    TV드라마 ‘징비록’을 본 분들은 ‘이원익’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도체찰사로 평양 수복의 전위(前衛)에서 고군분투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오리 대감’을 한국사에서 희귀하다고 한 것은 다음 같은 네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그는 선조-광해군-인조 등 세 명의 임금을 모셨습니다. 
    둘째, 그 기간 그는 한국사의 운명을 가른 세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국난(國難) 극복에 앞장섰습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이었지요. 
    그가 죽은 지 2년 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淸)나라 군사들 앞에서 청 황제를 향해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절하는‘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살아있었어도 우리가 청에 그런 수모를 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勢)가 외로울 때 우리는 충신을 생각한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당시 인조는 선조처럼 유성룡-이원익 같은 문신도,이순신-권율 같은 무신도 없이 간신들 틈에서 역사에 남을 치욕을 당했지요. 
    셋째, 그는 64년의 공직생활을 하면서 6번씩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습니다. 
    영의정은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며 도체찰사는 전시(戰時) 총사령관에 비견되는 직책입니다. 
    넷째, 그는 조선시대 통틀어 3대 청백리(淸白吏)로 꼽힌 인물입니다. 
    3대 청백리는 세종 때 황희(黃喜), 숙종 때 허목(許穆)입니다.
    오리 이원익의 관감당 입구. 안으로 관감당 건물이 보인다

    광명의 오리로를 향해 달리다 보면 시 경계의 끄트머리 부분에 충현(忠賢)박물관이 나옵니다. 이 박물관의 정면을 통과하면 오른쪽으로는 유물전시관, 왼쪽으로 관감당(觀感堂)이 보입니다. 이 관감당은 인조가 직접 지을 것을 명했습니다. 인조는 자신이 보낸 승지로부터 이런 보고를 받습니다. “(오리 이원익은) 매우 심하게 야위었고 쇠약해져서 눕거나 일어날 때 반드시 남의 손이 필요합니다. 그의 집은 초가집 두서너 칸뿐이며 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입니다. 한 뙈기의 땅도, 노비도 없으며 단지 녹봉으로 입에 풀칠한다고 합니다.” 이 보고를 접한 인조는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40년 정승을 지낸 사람의 집이라는 것이, 두서너 칸의 바람도 못 막는 초가집이로구나. 그의 청렴함은 옛날에도 없다. 내가 평생 그를 존경하는 까닭은 그의 공로와 덕행만이 아니다. 그의 청렴을 모두가 본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의 근심이 있겠는가?” 군왕이 내린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살던 누옥(陋屋)에 새집을 짓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원익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그의 집은 불타버리고 맙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관감당은 전쟁이 끝난 후 지은 것인데 관감당이란 당호(堂號)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관감당은 임금이 이원익의 충심을 보고 느껴 그것을 모든 사람도 똑같이 느끼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입니다. 새집을 하사하기로 한데 이어 인조는 이원익에게 베 이불과 흰 요를 선물했습니다. 임금은 왜 비단 이불과 비단 요를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게 오히려 그의 청렴함을 찬양하는 것이란 걸 안 것입니다.
    관감당은 크지는 않지만 청백리다운 기개가 보이는 건물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임금이 이런 집을 하사한 이는 세명밖에 안된다.

    이렇게 보면 역사상 가장 무능하다고 여겨지는 인조 역시 진정한 부하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훗날 실학자 이덕무는 오리 이원익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역대 재상 중 임금께 집을 하사받은 사람은 셋뿐이었다. 이 새사람이야말로 임금의 ‘관감’을 얻은 진정 영예로운 청백리 정승이었다.” 관감당과 종가 뒤로 이원익의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충현서원(忠賢書院-현재는 터만 남아있습니다), ‘바람에 목욕을 한다’는 뜻의 정자 풍욕대(風浴坮),이원익이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모두 역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삼상대(三相臺)와 그가 거문고를 탔다는 탄금암(彈琴岩)이 보존돼 있습니다.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오리영우.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사실상 한옥이나 마찬가지인 충현박물관은 4000평 가까운 규모인데 정남향으로 뒤쪽은 야트막한 야산처럼 높은 위치에 있어 꽤 좋은 지세(地勢)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손들은 충현박물관 앞 흰 건물에 산다는데 이렇게 박물관을 정연하게 가꾼 걸 보면 선조의 은덕으로 안온하게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재미있는 것은 충현박물관에 모란이 화려하게 꽃 핀다고 합니다. 제가 가기 1주일 전에 꽃이 졌는데 아시다시피 모란은 자식들의 융성(隆盛)을 뜻한다고 하니 그 역시 배려에 의한 식재(植)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이한 이력을 지닌 오리 이원익은 어떤 집안에서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요?
    이원익 선생을 모신 충현박물관을 뒷뜰에서 내려다본 광경이다. 4000평 규모의 박물관이 잘 보존돼있다

    이원익의 선조는 조선 세 번째 임금 태종의 열두 번째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였습니다. 이원익은 이치의 4대손으로,익녕군파에서는 처음으로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조선은 종친의 정치 간여를 피하기 위해“종친은 일반관료로 임명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단, 대군(大君)에게서 태어난 자손은 4대까지,군(君) 소생의 자손은 3대까지 종친으로 인정해 작위(爵位)를 잇게하고 그 뒤부터는 과거를 통해 일반인과 똑같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했지요.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에 왕족에게 내린 관직의 종류를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합니다. 맨 위로 대군은 정1품이었지요. 이어 군은 종1품-정2품-종2품으로 나뉘었고 그 밑으로는 도정(都正)이 정3품 당상관이었으며 그냥 정(正)은 같은 정3품이었지만 당하(堂下)의 관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선조 때 역모 혐의로 죽는 시산정 이정숙은 세종대왕의 증손자였지만 관직은 정3품 당하관이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각설하고, 이원익에게 ‘종친’은 명예로웠지만 한편으로는 굴레로 작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증조부 이정은은 술을 지나치게 마시다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고 이원익의 아버지 함천군 이억재가 거문고의 달인이 된 것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분노를 달래려다 얻은 재주이니 큰 자랑이 되진 못하겠지요.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

    율곡 이이가 눈여겨 본 이원익
    오리 이원익은 키가 작아'꼬마정승'으로 불렸
    지만 3대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원익은 1547년 지금의 동숭동 서울대병원 맞은편 이대부속병원 가는 길에서 태어났는데 이런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전반기 사림(士林)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고 훗날 그의 스승이 되는 이준경(李浚慶ㆍ1499~1572)이 상서 로운 자색(紫色)기운이 한양성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이렇게 외쳤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구할 인재가 태어났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릴 적 이원익을 두고도 구전(口傳)이 있습니다. 세 살 때 젖을 조르다 어머니의 귀밑머리를 잡아당겼는데 어머니가 아파하자 중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백약(百藥)이 무효하자 지나던 노인이 말했다지요.“탈 없이 장성하면 큰 인물이 돼 사십년 정승을 할 터인데 안타깝구려.” 그러면서 노인은 산삼(山蔘)씨 만이 아이를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때 집에 산삼씨가 있었습니다. 이원익은 17살 때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됐고 1년 뒤 결혼했는데 신부는 고려 때의 명신(名臣)인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7세손인 정추(鄭樞)의 딸이었습니다. 이후 생원 신분인 이원익은 성균관에 입학해 당시 정승이던 이준경과 사제의 관계를 맺는데 이준경의 저서 ‘동고유고’에 제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정탁-이덕형-이항복-유영경-최흥원-심희수-정언신 등인데 모두 정승의 반열에 오르지요. 그 명단의 첫째가 이원익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준경에 대해 알아보고 가기로 합니다. 이준경의 스승은 명재상 황희였습니다. 그러니 명재상의 도통(道統)이 황희→이준경→이원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이준경은 이원익을 특히 아꼈는데 공부를 하다 제자 원익이 쓰러지자 선조에게 간청해 궁중에서 쓰려던 산삼을 내리게 했지요. 선조는“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재길래”하는 궁금증에 이원익을 보곤 실망을 금치 못하고“산삼만 낭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원익은 키가 하도 작아 훗날 ‘꼬마 정승’으로 불렸을 정도입니다. 1569년 부태묘별시에서 병과 4등으로 급제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셋이었습니다. 청년 관료시절 이원익은 중국어를 배우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다른 관리들은 통역을‘아랫것들이 하는 일’이라고 치부해 건성건성 배운 데 비해 그는 종9품-정9품 정자-종8품 저작에 이르기까지 중국어에 탐닉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처자정자(處子正字), 즉 말단 관료 주제에 높은 선비 흉내를 낸다는 뜻이지요. 그런 이원익을 유일하게 동기(同期) 강서가 옹호했지요. “자네들이 모두 이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야. 이 사람은 장차 이 나라가 어지러워질 때 정승이 되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할 것이야
    강서의 ‘예언’은 적중합니다. 임진왜란을 맞아 그의 중국어 실력이 빛을 발하는 거지요. 그것은 훗날의 일이고,이준경에 이어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아본 이는 율곡 이이(李珥)였습니다. 이원익이 황해도사,즉 지금의 황해도 부지사 시절 황해감사가 율곡이었습니다. 그는 이원익에게 웬만한 일을 다 맡겼지요. 이때 이원익이 가장 신경 쓴 일이 군적(軍籍)정리였습니다. 임 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군적이 개판이었습니다. 군적이 정확해야 병사를 뽑을 텐데 죽은 사람이 올라 있는가 하면 멀쩡한 젊은이는 명단에 없는 등 엉망진창이었지요. 이원익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미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율곡은 이때 이원익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한양으로 돌아와“이원익이란 젊은이가 참으로 쓸만하다”고 칭찬하고 다녔으며 홍문록(弘文錄)에 그의 이름을 등재 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홍문록에 기록돼야 ‘청요직(淸要職)’,즉 중요한 보직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써도 장수(長壽)였고 지금도 장수한 축에 속하는 이원익의 87세 삶을 일일이 정리하기는 어려워 이제 그가 국난(國難)의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충현박물관 입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선조를 모시던 신하 중에 진관제가 붕괴했으며 국방개혁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세 명 있었습니다. 바로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과 오리 이원익이었습니다. 앞서 서애 유성룡 편에서 말했듯 원래 조선은 진관제(鎭關制)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진관제는 외침이 있으면 해당 지방의 병력을 모아 싸우며 시간을 끌다가 중앙에서 지원군이 오면 함께 힘을 합쳐 일대 반격을 펼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사이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변해있었지요. 제승방략은 외침이 있을 때 중앙에서 유능한 장수가 여러 고을에서 모은 병력을 이끌고 내려와 결전(決戰)을 벌이는 것으로, 이른바 합체(合體)로보식 전술인데 어중이떠중이 병력이 모일 경우 국가의 근본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약점이 있지요.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 초 조선은 왜군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지요. 다행스럽게 선조는 천운(天運)이라 할 인사(人事)발령을 내는데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로 보낸 것입니다. 선조는 이원익이 일찍이 안주(安州)목사를 할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주민의 신망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원익은 선조보다 먼저 한양을 떠나 선조가 평양에 다다를 때쯤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럼에도 선조는 평양 방어를 두고 혼선을 빚었지요. 내심 압록강 건너 명나라 땅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인선을 못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양에 머물던 관료 중 최고위급은 윤두수였습니다. 좌의정이었는데 그에 버금가는 인사가 전직 좌의정 유성룡군사책임자로는 도순찰사 이원익, 도원수 김명원,순검사 한응인, 경기감사 권징,평안감사 송언신이 있었는데 누가 최종 명령권자인지가 모호했던 것입니다. 이때 이원익은 스스로 군복차림을 하고 김명원에게 군례(軍禮)를 올립니다. 스스로 하위를 자처함으로써 지휘책임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이는 앞서 임진강 전투에서 한응인이 김명원의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혼선을 빚어 패배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평양을 빼앗기자 민심을 다독이는 자세를 보입니다. 나중에 이원익은 조선 8도 중 평안도를 보전하는데 공을 세웁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유성룡과 이원익은 다른 태도를 보이는데 훗날 사람들이 내린 평가가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고 했다.” 과연 서애와 우리 중 누가 더 현명한 처사를 했는지는 독자 여러분이 판단해 보시지요. 이런 그를 유성룡도 인정했습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신이 들으니 원익은 방패를 베고 누워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우고 병제(兵制)가 오랫동안 폐해진 것을 한탄하여 바로잡아 세울 것을 생각하며 제대로 상벌(賞罰)을 시행하므로 한 달 사이에 성과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

    이여송 장군을 사로잡은 이원익의 선물
    삼상대는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모두 역임한 것을 기념해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다
    원익은 이런 과정에서 명나라 군사의 원조를 끌어오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통역관을 내세울 필요없이 명나라 장수들과 1대1로 대화하는 중국어 실력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명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했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우리측 신하들이 앞다퉈 보물과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내놓았습니다. 이여송이 조금도 기꺼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원익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자 이여송이 비로소 기뻐하며 사례하고 나중에 부채에 시(詩)까지 한 수 적어 선물로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오리 이원익 기념사업회 이병서 회장은“후세 사람들이 임진왜란 중 유성룡만이 역할을 한 것처럼 오해하는데 사실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과연 선조는 전쟁 중“오직 이 나라에는 이원익 한 사람뿐”이라고 그의 수고를 칭찬했으며 이순신 장군조차“나의 힘이 아니라 상국의 힘(非我也 相國也)”라고 인정 했지요. 여기서 상국이란 누구일까요? 바로 이원익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이러니 임진왜란 때 무(武)에서는 이순신,문(文)에서는 유성룡뿐 아니라 이원익의 노력이 얼마나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아는 이원익의 공은 어느 정도 일까요? 그뿐 아니라 훗날 다산 정약용은 이원익에게 이런 시를 바치지요. “이 한 사람으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으며 이 한 사람으로 왜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와 명나라 군사들이 끼친 폐해에 신음하던 평안도 백성은 이원익의 선정을 잊지 못해 죽은 사람도 아닌 산 사람에게 바치는 생사당(生 祠堂)을 짓기도 했지요. 선조도 귀가 있었던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강원감사로 부임하는 윤승길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남겼다고 합니다.
     
    ▲ (左)이원익의 영정은 모두 세점이 남아있다. 위의 사진은 평양의 생사당에 모셔진 것이라고 한다 ▲ (右)관감당 옆은 이원익 후손들이 종가로 사용했다. 지금
    오른쪽 기둥에 문패는 걸렸지만 후손들은 근처에 산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실로 나의 잘못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평안감사 이원익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모두 바치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현재 당면한 급무는 생산을 늘리고 군대를 훈련해 기필코 치욕을 씻는 일이라 하겠다(중략)….” 임진왜란 말기 이원익은 평안도를 떠나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남(三南)지방을 순시하는 도체철사로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과 처음으로 대면합니다. 명신(名臣)과 명장(名將)의 회동에 대해 백호전서는 이런 기록을 남기지요. 한마디로 서로서로 배려하는 상하 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공(이원익)이 영루(營壘)를 살펴보고 방수방략(防守方略)을 점검해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돌아오려 할 때에 이순신이 가만히 공에게 말하기를 ‘체상(體相ㆍ도체찰사의 약칭)께서 이미 진에 오셨거늘 한번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푸셔서 성상의 은택을 보여주심이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뜻은 좋으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이순신은 이미 잡을 소와 술을 준비해놓았으니 허락만 하시면 잔치를 베풀 수 있다고 아뢰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마침내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의 재주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후인들이 그 땅을 정승봉(政丞峰)이라고 불렀다….”
    이원익은 세 임금으로부터 모두 존경을 받았다.광해군과 인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모시기위해 무진 애를 썼다.
    덧붙이자면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빠져 위기를 맞았을 때 그를 옹호한 것은 알려진 것처럼 유성룡이 아니라 이원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는 선조에게 “이순신에게 벌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바다에서 이미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계책에도 실수가 없고 살피는 일에도 잘못이 없습니다. ”라고 진언했습니다. 반면 원균에 대해서는 줄곧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원균은 본래 사나운 사람이고 무능한 편인데 그가 대신 그 자리를 맡는다면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원균은 당초에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고 공이 있었으므로 (두 장수가) 다투는 시초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전국에서 볼 수 있는 산성(山城) 가운데 상당수가 이원익의 명에 의해 개축됐습니다. 예를 들자면 경상북도 선산(善山),즉 지금의 구미에 있는 금오산성, 포항의 용기산성,경주의 부산산성,달성의 공산산성,함안의 황석산성,창녕의 화왕산성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왜란을 몸소 헤쳐나간 이원익은 1599년, 처음으로 영의정에 오릅니다. 그 후 광해군 때도,인조 때도 이원익은 영의정에 잇따라 제수되지만 이미 그때는 당쟁이 격화될 대로 격화됐던 시기였습니다. 더욱이 인조의 옹립에 기여한 공신들의 입김으로 이원익은 자신의 정치를 펼 수 없었지요. 한가지 그의 빼놓을 수 없는 공이 바로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동법 하면 김육(金堉)을 떠올리지만 1608년 광해군을 설득해 대동법을 실시키로 하고 그 시행관청으로 선혜청을 만든 것은 바로 오리대감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지요. 이원익이 세상을 뜨고 나서 그를 가장 그리워했던 사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선 후기 최후의 개혁군주를 꿈꿨던 정조(正祖)와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이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홍재전서’에서‘거센 물결에 오뚝이 버티는 기둥이고 큰 집을 튼튼히 받드는 굽은 대들보 였으니…태산 교악처럼 높고 웅장한 사람이었으리’라는 시를 헌정합니다. 쓰다 보니 이원익의 거대한 생애에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마는 기분이 들지만 요즘 처럼 근시안적이며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관료들이 횡행하는 시대에 그는 우리가 본받아 마땅한 사표(師表)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런 선현을 두고도 오늘날의 우리는 이 지경이라는 자괴를 느끼는 삶이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