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7 스마일화가 이목을

浮萍草 2015. 5. 23. 10:20
    실업계 고교 미술수업에서 "그림 그려"라는 말은 대학가라는 말?
    이목을이 자신의 대표작인 '대추' 앞에서 이야기하고있다. 대추가 마치 공중에 떠있는듯하다
    기도 양평군 강상면 화양리에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 있습니다. 꼭 송이버섯같이 큰길 옆에 서 있습니다. 세채가 붙어 있는데 가운데 건물이 제일 높고 안은 원형(圓形)입니다. 거기 인생의 굴곡을 딛고 일어선 화가(畵家)가 살고 있습니다. 이목을(李木乙ㆍ53). 한문 그대로 해석하면 나무 목,새 을이니 ‘나무 위에 앉은 새(鳥)’라는 뜻입니다. 척 봐도 본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괴상한 이름의 화가가 한국 미술시장에서 단가(單價)가 높은 10명 안에 든다니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화가의 작품을 ‘호당(號當) 얼마’라 표현합니다. 여기 나오는 ‘호’는 우편엽서 한장의 크기를 말합니다. 이목을은 호당 가격이 50~60만원 선입니다. 이러니 웬만한 작품은 2000만원대를 넘지요. 요즘 같은 미술시장 불황에도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중학교 때 왼쪽 눈의 시력(視力)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2009년부터는 남은 오른 눈의 시력마저 거의 사라졌습니다. ‘볼 수 없는 화가’가 된 것이지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한가 싶으실 겁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세 단계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가 극세밀화(極 細密画)입니다. 지금은 그리길 중단해 몇점 안 남은 작품들을 보면 대추나 사과가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낡은 도마 위의 꽁치는 금세 살아 튀어 올라올 것 같습니다. 허풍 아니냐고요? 그의 작업실에는 놋쇠 수저와 젓가락 한 쌍을 도마 위에 그려놓은 작품이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진짜’를 걸어놓은 것 아니냐며 옆에서 바라봅니다. 노인들 가운데는 등을 슬며시 대는 분도 있습니다.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지요. 여기서 저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머무를 때 간 적이 있는 프랑스 쥐베르니를 떠올립니다. 모네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그곳에는 모네의 정원이 있지요. 모네도 백내장으로 시력이 약해지자 세밀화에서 뿌연 색채의 그림으로 전환했지요.
    이목을의 극세밀화 '꽁치'다. 낡은 도마위에 진짜 꽁치가 올라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목을의 작품 세계 그 두 번째가 ‘스마일(Smile)’입니다. 말 그대로 70년대 우리가 했던 스마일 운동,즉 미소(微笑)입니다. 경북 영천 출신의 소년이 화가가 되고 눈을 잃고 갖은 고생을 하다 스마일에 천착하게 된 스토리는 이 부분에서 시작됩니다. 그의 본명은 이영희(李永熙),아버지는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길 즐겼던 6남매의 다섯 번째 이목을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한순간에 날아간 것입니다.
    이목을의 극세밀화 '대추'시리즈의 하나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가면 대추의 흥망성쇠를 보는 듯 하다

    예로부터 ‘기자(記者)와 선생과 경찰의 돈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아는 듯하지만 정작 물정이 어두워 사기를 잘 당한다고 해서 생긴 말입니다. 이목을의 아버지도 교육자로 남았으면 많은 재산이 무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수(運輸)사업을 한다고 친구에게 맡긴 돈이 그냥 없어진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회(下回)는 뻔합니다. 집에는 빨간 딱지가 붙고 세간은 길거리로 나앉으며 가족들은 뿔뿔이 제 살길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이목을도 딱 그랬습니다. 친구들처럼 교복 입고 중학교에 가고 싶은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13살 어린 소년은 며칠씩을 굶으며 꿈을 꿨습니다. ‘살고 싶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지요.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구나.” 그때부터 ‘선생님 집 아들’ 이목을은 거리의 소년이 됩니다. 대구 서문시장 육교에서 광주리 놓고 좌판을 벌이기 시작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해본 일을 직업이라 부른다면 100가지도 넘을 겁니다. 앵벌이도 해봤으니까요.”
    이목을의 스마일 그림(오른쪽)과 새롭게 선보일 '사이 간' 시리즈의 하나(왼쪽)다

    하루하루 먹고 잘 걱정을 하면서도 그는 대구 중앙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었지만 학교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을 안 그린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불행이 찾아옵니다. 거리에서 다투다가 상대가 휘두른 흉기(凶器)에 눈을 찔렸는데 하필 쇳독(毒)을 앓은 겁니다. 지금 같으면 병원 응급실이라도 갔겠지만 어려서 집을 나온 그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눈을 잃었지요. 그는 지금은 영남공고로 개명(改名)한 대성공고 야간부에 진학했습니다.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장사하다 어둠이 깔리면 지친 몸을 끌고 학교에 가는 생활이 계속됐습니다. 그 시절 그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밑바닥에서 헤어날 줄 모르던 이목을의 삶에 서광(曙光)이 비친 것은 고3 1학기 때였습니다. 당시 실업계고들은 미술수업을 고3 때 받았습니다. 중요한 과목이나 실기를 저학년 때부터 배워야 했기에 미술은 중요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림을 좋아하던 이목을에게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선생님의 한마디가 그의 혼(魂)을 뒤흔듭니다. “그림 그려!” 딱 네 글자였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이목을은 고민합니다. “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해 몇몇 친한 친구들을 불러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한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대학가라는 거다.” 순간 그는 웃었답니다. “대학? 꿈도 못 꾸던 말에 실소(失笑)가 나왔지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교내 미술백일장을 열었습니다. 공고(工高)에 없던 대회를 제자를 위해 마련한거지요. 당연히 1등을 한 이목을은 학교 대표자격으로 전국대회에 출전해 상(賞)을 휩씁니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었는데요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

    미대 재학중 스물여덟살 입산 결정
    심(眞心)은 쇠도 녹인다고 하지요. 
    친구들의 거듭된 권유에 이목을은 진지하게 대학 진학을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만 진력하느라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이때 친구들이 ‘가정교사’를 자원합니다.
    친구들은 참고서를 가져다주며 말했습니다. 
    “몰라도 끝까지 풀어봐라. 
    처음부터 몇번을 반복해라.” 
    신기하게도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는데 되풀이해 읽는 동안 깨우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었습니다. 
    ‘백번을 읽으면 스스로 깨우친다’는 말 그대로였지요. 
    이렇게 이목을은 제 나이보다 한해 늦은 1982년 영남대 미대에 척 붙고 맙니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미대 실기시험은 3시간 동안 치러지는데 그는 30분 만에 나왔습니다. 
    “석고 데생을 하는 것이었는데 뒷자리에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그런 석고 형태를 일본 헌책에서 본 적이 있었어요. 
    기억력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보면 카메라처럼 뇌리에 인식돼요. 
    그러니 30분 만에 완성한 거지요.”
    이목을의 붓이다. 여러가지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낡은 붓은 이 화가의 굴곡진 삶을 대변한다

    학생이 갑자기 30분 만에 척척 그림을 그리고 나가려 하자 감독관이 오히려 당황했지만 그는 자리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치른 시험이어서 합격을 기대하지도 못했는데 하필 발표 당일 영남대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문 앞에서 웅성대는데 그 친구의 여동생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오빠, 오늘이 합격자 발표날 아니야? 내가 가보고 올게.” 그리고 얼마 뒤 친구의 여동생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빠 붙었어, 이름이 있어.” 이 부분에서 짚고 넘어갈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3 때 ‘그림 그려’라는 말을 남긴 분은 황우명 선생님입니다. 화가는 설날 때도 선생님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그의 공부를 도왔던 친구들은 여전히 죽마고우(竹馬故友)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 혹시 선생님이 계신다면 본인들의 한마디가 학생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교권(敎權)이 추락한 시대라지만 선생님의 중요성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지요. 또 한 가지, 그는 어떻게 거리의 생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에 따르면 그는 ‘고문관’ 비슷하게 취급됐다고 합니다. 그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려 하자 선배들이 해코지를 가하려 했지만 이른바 ‘오야붕’이 놔두라고 했답니다. 다만 화가가 그려준 문신(文身)으로 인해 그의 붓길을 받은 사람들은 훗날 줄줄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지요. 이렇게 어렵사리 대학생이 됐지만 가난은 여전히 ‘동반자’였습니다. 그는 배고프면 물 마시고 몸을 한번 흔든다고 했습니다. ‘출렁’ 소리가 나면 더 마시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배가 찼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잠은 눕는 모든 곳이 그의 ‘방’이 됐습니다. 옷은 해어지고 머리는 엉덩이까지 치렁댔으니 당시의 그는 그야말로 거지도 ‘상거지’라 해야 할 것입니다.
    집안이 망하면서부터 하루 2시간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는 이목을은 책상다리를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또 한 가지 그를 실망시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학문화였지요. 공부는커녕 술만 마시는 게 그는 그토록 싫었다고 합니다. 싫다는 술을 억지로 강권(强勸)하는 선배들에게 참다못해 주먹을 날린 적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나중에야 서울대나 홍익대에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어요. 경상도에서는 영남대 미대가 최고지만 우리나라에서 먹고살려면 그 대학을 나와야 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왔어도 붙었을 텐데 다시 서울에서 터전을 잡는 게 너무 겁이 나서….”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들어온 대학에서 실망한 나머지 그는 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며칠 만에 귀가조치 당합니다. 시력을 잃은 눈 때문이었지요. 군대도 못 가고 붕 뜬 생활 때문인지 그는 휴학계를 3번이나 내고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국전(國展)에서 입상했습니다. 그야말로 스타가 된 것이지요. 뒤이어 대학미전에서도 1등을 했습니다. 그 뒤 공모전을 포기했는데 지금은 후회하더군요. “형식적인 게 싫었는데 그때 상을 더 타 놨더라면 편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말이 8년이지 이목을의 대학생활은 미대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습니다. 죄다 경영학-브랜드학-법학-철학 같은 과목만 수강하고 걸핏하면 데모에 나가 교수 방을 점거했으니까요. 오죽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미대 학장을 지낸 분이 그를 불러 “앞으로 1년이면 내 임기가 끝나는데 그때까지만이라도 참아줄 수 없겠는가?”라고 당부한 거지요. 그런 그를 공안당국이 주시했지만 그야말로‘독불장군’이지‘불온조직’과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목을의 경기도 양평 작업실이다. 송이버섯을 닮은 건물 앞에 '스페이스 목을'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대학 재학 중 미술학원 강사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경북예고에서 짧게 교편을 잡았습니다. 학생들은 열광했지만 학교에서는 그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걸핏하면 체벌(體罰)을 가하고 괴상한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났으니까요. 당시 그의 작품에서는 ‘죽음’의 색채가 지나치게 강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그가 염세적인 사고에 푹 빠져 있었던 증거이기도 합니다. 교수들마저 그에게 “그런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 당부할 정도였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질풍노도처럼 살던 그가 스물여덟살 되던 해 갑자기 입산(入山)을 하자 난리가 납니다. 대구 달성군의 해발 881m 최정산(最頂山)에서 그는 독서에 탐닉합니다. 산중생활이 이 산 저 산 바꿔가며 17년 동안 이어지자 친구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만류에도 그는 산속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철학과 역사 서적 읽기에 몰두하던 그는 신선(神仙)이 됐을까요? 머릿속에 너무도 복잡해 신선은커녕 병신(病身)이 되고 말았습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

    대명그룹, 스마일 작품 100개 4억원 산 뒤 전속(專屬) 계약 맺자고 했지만 거절
    
    “1997년 반신 마비가 왔어요. 
    경북 청도 운문사가 가지산 자락에 있는데 그곳에 터를 잡고 3년을 살았습니다. 
    집도 제 손으로 직접 지었어요. 
    병든 몸을 이끌고 마을에 내려가면 난리가 났지요. 
    거지가 왔다고 할매들이 고함지르고 했습니다.” 
    1년쯤이 지나 몸이 저절로 치유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가 본 것이 감나무 위에 앉은 새 한 마리였습니다. 
    그 모습에 온몸이 갑자기 벌벌 떨리더니 나무가 미치도록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마을로 다리를 끌고 내려갔지요. 
    “보는 사람마다 ‘나무 좀 얻을 수 없겠느냐’고 했지만 대답은 뻔했어요. 
    할매들이 ‘실성한 놈 또 내려왔다’고 고함치고 야단이 났어요. 
    그중 한 할머니가 ‘저쪽 종가(宗家)에 가면 부서진 나무토막들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줬지요.”
    그는 버려진 도마며 개다리소반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곤 그것들을 며칠 동안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자신과 객체가 일체(一體)가 된다고 느끼는 순간에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꽁치, 대추, 사과, 수저가 그렇게 그려졌지요.
     나무 위에 앉은 새는 그의 이름을 ‘목을’로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상했던 몸은 치유와 함께 그에게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져다줬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미친 것과 이목을이 반신 마비가 된 것은 ‘예술가의 길’인가요?
    1999년 마침내 그가 서울에 등장했습니다. 아트페어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2시간 만에 완판(完販)됐습니다. 
    그야말로 미술시장에 혜성과 같이 스타가 탄생한 것입니다. 
    2004년까지 그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그런 그가 경북 청도의 집을 팔아 돌연 미국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멀어져 2년을 지내다 되돌아옵니다. 
    다시 극세밀화에 전념하던 2009년 그의 남은 눈에 이상(異常)이 생깁니다. 
    고난은 그를 떠나지 않았던 거지요.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어요. 
    조금만 지나면 상(像)이 없어지는 거예요. 
    서울대병원 등 좋다는 데는 다 가봤는데 원인을 모른대요. 
    차라리 백내장, 녹내장이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을, 침-뜸 같은 민간요법도 할 만큼 했지요.”, 
    ‘볼 수 없는 화가’가 택한 길은 방황뿐이었습니다.
    언뜻 질서없는 선같은데 자세히 보면 웃는 모습이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하지만 방법이 없었지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 내려놓자’는 생각이 들면서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그는 자신의 화법을 버리고 어린이가 돼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서울 광화문의 교보문고였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서점에 들어가 그림책을 종일 들여다봤습니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용, 다음은 유치원생, 마지막으로 2세까지. “한 달 동안 그러고 지내니 직원 한 분이 다가왔어요. CCTV로 다 보고 있었던 거죠. ‘ 뭘 보시는데요?’하고 묻는데 그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학부형들은 몰골이 이상한 저를 피해 다니고 있었던 겁니다. ‘또 남을 힘들게 했구나’ 하는 자책이 들었어요.” 유아용 그림책을 섭렵한 그가 다음에 들른 곳은 문방구였습니다. 거기서 어린이들이 사는 스티커를 사다 놓고 며칠이고 바라봤지요. 그런 어느 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이모티콘이라는걸 봤어요. 웃음을 뜻하는 ‘^^’를 본거지요.” ‘온몸에 찌르르한 경련이 왔다’고 이목을은 말했습니다. ‘이게 그림인가, 이거 하나면 다 통하는데’하는 자각(自覺)을 그때 그는 했습니다. 불행한 내가 남에게 웃음을 줘보자 하는 생각으로 그가 스마일 그림의 첫 번째 작품을 그린 겁니다. “선(線) 3개를 쭉 긋고 나니 작품이 끝났어요.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의심이 갔어요. 선 3개가 그림인가 아닌가 하는 궁리를 한 달 동안 해봤지요. 그다음에는 10호짜리 캔버스 100개를 동시에 깔아놓고 스마일을 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스마일이 다 다른 것이었습니다. “100개를 그리는데 3시간도 안 걸렸어요. 일어나서 보니 100개의 웃는 모습이 전부 달랐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저기 ‘고통은 하늘이 내게 준 보약’이라는 글이 쓰여 있지요?” 그 글은 이목을이 사라지는 시력에 고민하다 ‘다 내려놓자’는 결심을 한 뒤 쓴 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밑에 있는 ‘웃음은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글은? 그것은 이목을이 세상에 웃음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으며 덧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목을이 남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자 새롭게 개척한 스마일 연작.가장 불우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미소를 남긴다

    2011년 5월 서울 코엑스 아트페어에 이목을은 스마일 작품을 들고 재등장했습니다. 아트페어를 앞두고 그렇게 마음 설레고 두려울 수 없었다고 이목을은 회상했습니다. “속으론 ‘나는 신진작가다’라고 마음먹었지만 남을 의식했기 때문이지요.” 오랜만에 그를 만난 동료 작가며 화상(畵商)들이 아는 체를 했지만 그가 스마일 작품을 들고나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것도 그림이냐? 발가락으로 그려도 그거보다 잘 그리겠다’고 비아냥댔답니다. 하지만 이른바 전문가들보다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한 것은 대중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불티난 듯 팔려나갔고 갤러리아 백화점 옆 화랑에서 연 초대전은 그야말로 ‘대박’을 냈습니다. 당시 초대전이 KBS-TV 뉴스에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그는 ‘스마일’그림으로 돈방석에 앉을 기회도 있었지만 스스로 걷어찼습니다. “대명그룹에서 스마일 작품 100개를 4억원에 샀어요. 저와 전속(專屬) 계약을 맺자고 제의했는데 싫다고 했습니다. 예술가의 자존심 때문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스마일로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린 그는 6개월 동안 차를 몰고 전국을 주유(周遊)했다고 합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이 땅의 산천(山川)을 가슴 속에 모두 담아두고 싶었던 거지요. 제자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아내는 처음엔 반대했습니다.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차 몰고 다니다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의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자동차에 이불과 코펠-버너를 싣고 다니며 이목을은 쇠잔한 안력(眼力)에 풍경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그는 ‘간(間)’ 즉 ‘사이’라는 뜻의 새 연작(連作)을 이달 20일 발표한다고 합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작품을 보니 무채색의 작품이 동양화 같기도 하고 사진 같기도 한 묘한 느낌을 줍니다.
    이목을이 오는 20일 선보일 연작가운데 하나다. 마치 동양화같기도 하고 사진같기도 하다

    이 작품들이 또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네요. 이목을과의 대화는 장장 6시간 반 동안 이어졌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쓴 글을 그와의 대화를 전부 옮기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다만 이목을이 제게 진심으로 당부한 부분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불우한 이야기를 너무 상세히 기술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미술 전공하는 대학생 딸과 미용공부를 한다는 고3 아들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뜻을 받아들여 최소한 사실만을 기술했습니다. 또 한 가지, 그와 아내의 러브스토리는 꼭 영화를 연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만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을 기약해봅니다. 그의 이름은 중학교-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실릴 정도입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자녀들이 무척 자부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