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9: 의상대사와 영주 부석사

浮萍草 2015. 5. 25. 10:26
    의상대사를 사모해 바다에 몸을 던진 중국 낭자\
    북 영주에 예사롭지않은 산이 있지요. 
    봉황산(鳳凰山)입니다. 
    봉황은 예로부터 ‘새 중의 왕은 봉황이요,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百獸)의 왕은 호랑이’라는 말처럼 상서로운 동물인데 중국에서는 봉황이 천자(天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천자가 사는 궁문(宮門)에 봉황을 장식해 봉궐(鳳闕) 혹은 봉문(鳳門)이라 했고 아름다운 누각은 봉대(鳳臺)라고 불렀습니다. 
    해발 818m의 산에 봉황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위에서 산세(山勢)가 꼭 봉황처럼 생겼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부석사 가는 길은 곧 봉황산을 오르는 길이다. 우리는 무엇을 찾아 절에 오는가

    그런 이 산이 더 유명해진 것은 초입에 들어선 절 때문입니다. 이 절에는 얽힌 전설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골담초’라고도 불리는 선비화(禪扉花)입니다. 이 평범치 않은 나무는 의상(義湘)대사(625~702)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의상은 자기가 짚고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나무가 싱싱한지 시들었는지를 보고 내 생사(生死)를 알라!” 1400년 가깝도록 나무가 시든 적이 한번도 없으니 의상대사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의상대사가 머물렀다는 조사당과 의상의 지팡이가 나무가 됐다는 선비화. 사람들의 손길을 피해 철창을 쳐놓았다

    이렇게 신통하다보니 탐욕을 부린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가장 유명한 것은 광해군 때 관찰사 정조(鄭造)에 대한 구전(口傳)입니다. 그는 ‘대사의 지팡이’를 지니고 싶어 그만 나무줄기를 잘라갔는데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지요. 이런데도 선비화의 잎이 아들을 낳는데 효험있다, 질병에 좋다고 소문나 몰래 따가는 이들이 많아지자 결국 선비화는 금속으로 된 쇠창살 안에 갇히고 맙니다. 높이 1m70㎝, 굵기가 사람 손마디만한 나무의 슬픈 운명이라하겠습니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이름이 적힌 일주문. 초봄, 채 꽃이 피지않은 사찰의 황량함이 오히려 색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산 초입에 들어선 절’이 어디인지는 독자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해동화엄종찰(宗刹) 부석사(浮石寺)입니다. 최근 부석사를 세차례 다녀왔습니다. 이 사찰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이 중학교 국사수업 때니 세월의 괴리가 40여년이나 됩니다. 선비화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와 관련됐다면 부석사 자체에는 의상대사의 로맨스가 얽혀있지요. 다 아시다시피 의상은 벗 원효(元曉)와 함께 650년 당(唐)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잠을 자려고 찾아든 무덤에서 사단이 벌어집니다. 한밤 원효의 갈증을 풀어준 감로수(甘露水)가 다음날 알고보니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는 겁니다. 원효는 모든게 마음먹기 나름이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깨닫고 당나라행을 단념하지요. 의상에게도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열아홉 때인 644년 경주 황복사에 출가해 승려가 됐던 의상은 원효와 헤어져 홀로 중국으로 갔다가 요동(遼東)에서 첩자로 몰려 신라로 추방됐습니다. 의상은 굴하지않고 661년 이번엔 뱃길로 중국으로 향해 이듬해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갑니다.
    부석사의 백미인 안양루(사진 왼쪽)와 무량수전. 안양루는 화려함의 극치를, 무량수전은 소박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양주(揚州) 종남산에는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祖師)인 지엄(智儼·602~668)스님이 있었습니다. 지엄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전 의상은 오랜 여행 끝에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서 기거합니다. 그런 의상을 보며 연정(戀情)을 품은 이가 바로 유지인의 딸 선묘(善妙)낭자였습니다. 의상은 서른 여섯, 선묘는 열일곱 꽃다운 나이로 의상이 몸을 추스리는데 최선을 다하다 의상을 연모합니다. 하지만 스님에게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671년 신라로 귀국할 때 의상은 선묘의 집을 찾았지만 안타깝게 만나지 못합니다. 뒤늦게 의상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은 선묘는 바닷가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망망대해의 점(點)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낭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선묘는 의상에게 전달하려했던 비단을 바다에 던지며 “이 비단이 님에게 전달되게 하소서”하고 빌었습니다. 놀랍게도 선물은 의상의 배로 날아갔지요. 선묘는 이어 자신이 용(龍)이 돼 의상의 배를 호위하겠다며 바다로 몸을 던지고야 맙니다.
    석등 사이로 무량수전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의상과 선묘의 인연은 계속됩니다. 부석사를 지을 때 500여 이교도(異敎徒)들이 나타나 의상을 괴롭힐 때 선묘는 그의 꿈에 등장해 해법을 가르쳐줍니다. 의상이 선묘가 시키는대로 지팡이를 한번 두드리니 큰 바위가 공중으로 떠올랐지요. 이 바위가 바로 지금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옆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용(龍)이 된 선묘가 실제로 들어올린 것이라고 합니다. 바위가 두번 세번이나 공중으로 치솟자 이교도들은 겁에 질려 의상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짓는데 힘을 합칩니다. 과연 공중에 뜬 바위가 존재할까? 이런 의심이 있는데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地)’에서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당기면 걸리지 않는다”고 해 부석(浮石)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선묘는 이후 부석사를 지키는 용이 돼 무량수전 앞뜰에 묻혔다는데 1967년 우리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실제로 5m나 되는 석룡(石龍)의 하반부를 발견 했다고 합니다. 무 량수전 뒤에는 선묘낭자를 기린 작은 각(閣)이 있습니다.
    이것이 의상대사가 신통력을 발휘했다는 부석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돌을 언급했다.

    부석사가 세워진 것은 676년인데 왜 하필 봉황산에 터를 잡은 것일까요? 봉황산이란 이름이 산세에서 비롯됐다고 했지만 의상이 이 산에 절을 세운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봉황산은 당시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겁니다. 지도를 한번 볼까요. 봉황산은 태백산맥 줄기로 남으로는 청량산-각화산,서남쪽은 선달산-형제봉-연화봉-도솔봉으로 이어집니다. 이 서남쪽이 바로 지금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가르는 경계였던 겁니다. 여기서 제가 무량수전을 잊지않은 이유를 밝힐까 합니다. 한때 제가 가진 장서가 3000권에 이르렀는데 좁은 집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보니 한계에 도달했지요. 아이 셋이 머물 공간도 충분치 않은데 책이 담긴 라면박스 100여개는 큰 짐이었습니다.
    무량수전 앞뜰에는 지금도 의상대사를 연모하는 선묘가 석룡으로 변해 묻혀있다고 한다

    기증을 하려해도 여의치 않아 비오던 어느 날, 이사를 앞두고 책 보따리를 모두 버렸습니다.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내동댕이치는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곤 300권가량의 책만 남겨놓게 됐습니다. 그때 제가 버리지 않은 책 가운데 한권이 고(故)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입니다. 이 책이 훗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발전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 분의 글 가운데 잊지 못할 부분이 있지요.
    의상과 선묘 낭자의 사랑을 무량수전 뒤 선묘각 뒤 벽에 그려놓았다.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의 바닷길을 호위하는 모습이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이 문장을 기억하는 분도 많겠지요. 그때부터 “무량수전의 풍광(風光)이 어떠하길래 이런 명문장을 낳았는가”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그리던 부석사를 찾은게 최근이니 게으른 기자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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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것으로 유명해진 사찰은?
    석사에는 볼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부석사의 창건 과정과 선묘에 얽힌 전설 외에 무량수전, 안양문(安養門)이 있는데 이 이름도 그냥 지은 것이 아닙니다. 
    무량수는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국토,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말합니다. 
    ‘안양’이란 말 역시 극락세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경기도에 있는 안양시도 같은 한자인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경기도 삼성산에 고려 개국을 도운 스님에게 절을 지어주며 바친 안양사라는 이름이 그대로 시(市)의 
    명칭이 됐다고 합니다.

    안양루 앞에서 무량수전까지 33계단이 이어지는데 이는 극락으로 가는 33천(天)입니다. 안양루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이 장관인데 앞서 다룬 김삿갓도 그냥 지나치지않고“백발이 된 지금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더 나아가 의상과 관련된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살펴봅니다. 이 열개의 절이 어딘가를 두고 기록이 갈립니다. ‘삼국유사’에는 태백산 부석사-원주 비마라사-가야산 해인사-비슬산 옥천사-금정산 범어사-지리산 화엄사 6곳만 등장합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부석사-화엄사-해인사-범어사-옥천사 외에 미리사-보원사-갑사-국신사-청담사가 나옵니다. 미리사는 중악공산(中岳公山), 즉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에 있는 미리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보원사는 웅주(熊州) 가야협,즉 지금의 충남 서산 운산면에 있고,계룡산 갑사,전주 무산의 국신사는 지금도 존재해 있습니다. 문제는 ‘한주 빈아산 청담사’인데 이 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의상이 창건하거나 간여한 화엄십찰은 다 전설이 있습니다. 의상이 맨먼저 세운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는 의상이 유학 길에 오르기전 동해(東海) 인근 굴에 관음보살이 산다는 말을 듣고 7일간 기도하자 천룡팔부 (天龍八部)가 등장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하늘에도 땅에도 연꽃이 활작 피었다.

    천룡팔부는 중국인 김용의 소설을 말하는게 아니고 불법을 지키는 신장(神將)을 뜻합니다.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 등 여덟 신(神)이 그것입니다.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아 의상이 처음 만난 분은 백의관음인데 다시 의상이 7일을 더 기도하자 마침내 관음보살이 나타나 의상에게 대나무 두개가 솟아나는 자리에 절을 지으라는 말을 남기지요. 그곳이 바로 낙산사라니 예사 땅이 아니겠습니다. 실제로 낙산사는 강화도 보문사-남해 보리암과 함께 불교에서 으뜸으로 꼽는 기도처라고 합니다. 저는 보문사와 보리암 역시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만 이 유서깊은 낙산사가 몇 년 전 대화재로 전소(全燒)된 것이 너무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전남 구례 화엄사(華嚴寺)는 서기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지었다고 하지요. 얼마전 인도 수상이 왔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2000년전 인도공주와 가야의 왕이 결혼했다”는 말이 있는데 인도와의 인연도 꽤나 깊습니다.
    화엄사 출입구 기와에 풀들이 자라고있다. 화엄종의 대본산답게 역사의 이끼가 곳곳에 피어나고있다

    이 절은 이후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면서 이름이 높아지고 670년 의상이 장륙전(丈六殿)을 짓고 사방의 벽에 화염경을 새기며 화엄종의 중심 사찰이 됩니다. 나중에는 도선국사까지 간여했다니 대단한 절이 아닐 수 없지요. 이 장륙전이 지금의 각황전(覺皇殿)으로 이름이 바뀐데도 설화가 있습니다. 조선 임진왜란 때 불탄 건물을 인조가 복원했고 숙종이 중수(重修)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불사(佛事)의 중책을 맡은 사람은 계파스님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걱정이 돼 밤새 대웅전에서 밤샘기도를 드리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아무 걱정하지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대신 맨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말했습니다. 스님이 한참 길을 가는데 웬 노파가 걸어오고 있었다지요. 스님은 난처했지만 꿈에 등장한 노인의 말을 어길 수 없어 시주를 권했는데 노파는 한참을 듣더니 이런 말을 남기고 길가의 늪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내가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겠으니 문수대성은 가피(加被·도움)를 내리소서.” 이후 계파스님이 몇 년동안 불사를 이루지 못하고 전국을 걸식하던 끝에 한양에 도착했는데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 나온 어린 공주를 만났습니다. 신기하게도 공주는 스님을 보고 반가워 매달렸는데 한쪽 손이 불구였습니다. 펴지지 않는 손을 계파스님이 만지자 쫙 펴졌는데 손바닥에 ‘장륙전’이라는 세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지요.
    화엄사 각황전은 의상이 지은 장륙전을 대체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에 감동받은 숙종이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고는 장륙전을 중수할 비용을 댔습니다. 전각이 완성된 후 장륙전의 이름이 바뀌지요. ‘각황’ 즉 임금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각황전으로 개명(改名)한 것입니다. 내친 김에 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사의 창건설화도 살펴봅니다. 청량사는 해발 870m인 청량산의 거의 정상부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걸어서 올라가기가 꽤나 힘겹습니다.
    조선 숙종 때 중창된 각황전은 '임금이 깨달았다'는 뜻이다

    청량사는 특이하게도 663년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說)이 엇갈리는 사찰입니다. 하지만 설화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의상보다는 원효가 건설의 주역이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는데 여기엔 뿔이 세개 달린 소(牛)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절을 짓고 있을 때 부근 마을에 뿔이 셋달린 송아지가 태어났습니다. 이 송아지는 덩치가 얼마나 컸던지 얼마되지않아 낙타처럼 크고 힘도 세 ‘남민’이라는 이름의 주인이 먹성좋은 소의 여물을 대기에도 급급했다고 합니다.
    청량산 청량사의 전경이다. 험준한 산 봉우리 바로 밑에 건축된 절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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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대사가 여인에게 망신당한 사연
    느날 원효가 이곳에 나타나자 그 소가 갑자기 순하게 변하더니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습니다. 
    원효는 소의 주인에게 시주를 권했고 남민은 힘이 천하장사인 소의 도움을 받아 청량산 정상까지 돌과 나무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전 소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원효는 이를 불쌍히 여겨 소를 절 앞마당에 묻고 극락왕생을 축원했는데 알고보니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化身)이었다지요. 
    그 소를 묻은 곳에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나 세가지로 갈라졌다지요.
    청량사 앞에 설치된 원효대사와 관련된 안내문이다

    청량사의 대웅전을 유리보전이라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내부의 약사여래불과 문수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각각 종이(紙)와 모시와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산이 험해 들고올라가기 쉽도록 가벼운 재질을 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의상대사는 청량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연화봉(蓮花峯)이 의상봉으로 불리며 근처에 의상굴-의상암이 있기 때문 입니다. 의상암은 지금 절터만 남아있으며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절의 역사에 ‘원효와 의상이 함께 지었다’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신라시대 절의 창건에 힘쓴 이가 의상이기에 그의 이름을 거명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불교사를 보면 원효보다는 의상의 무게가 더 느껴지니까요.
    청량사 유리보전에 모셔진 불상은 각각 종이와 모시와 나무로 만들어졌다

    앞서 말한 낙산사 창건 설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親見)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원효가 망신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원효가 낙산사를 향해 가는데 흰옷을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습니다. 짓꿎은 원효가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며 거절했습니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한 여인이 생리가 묻은 속옷을 빨고 있었습니다. 원효가 물을 청하자 여인은 피묻은 더러운 물을 건넸지요. 이에 원효가 물을 버리자 소나무 위에 앉아있던 파랑새가“스님은 (관음보살을 만나러) 가지 마십시요”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놀란 원효가 뒤를 돌아보자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짝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낙산사에 도착한 원효가 관음보살상을 보니 거기 나머지 짚신 한짝이 놓여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원효는 앞서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현신(顯身)임을 알게되지요. 이렇게 의상은 고상하게, 원효는 미련하게 그려진 설화는 왜 나왔을까요? 의상이 수도에 힘쓴 반면 원효는 거리의 포교에 주력했고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까지 낳은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청량사에 어둠이 찾아오고 있다. 유리보전 앞의 석탑이 발 아래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제가 이렇게 기나긴 불교이야기를 한 것은 최근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의 뇌우침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영국을 기점으로 프랑스-이탈리아-독일을 종횡(縱橫)하며 많은 것을 보고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제가 프리미엄 조선에 기고한 ‘옥스포드레터’ 시리즈입니다. 지금까지 총 53회가 연재됐습니다. 당시 시리즈를 쓰며 너무도 유럽의 문화가 부러웠습니다. 분명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중세까지는 압도적으로 그들을 앞섰는데 왜 그들에겐 찬란한 문화가 남고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하는 자탄을 했지요.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전국 팔도를 주유(周遊)했다고 믿어왔는데 알고보니 지금까지 본 것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나하는 반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럽에서 돌아온 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영국-프랑스-이탈리아처럼 세계에 자랑할 우리 문화유산(遺産)은 대체 무엇인가, 세계에 내놓을 우리 인적 자산(資産)은 누구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문갑식의 기인이사(奇人異士)’ 시리즈가 나온 이유입니다. 우리 산하(山河)를 돌아보며 이런 잠정 결론을 얻게 됐습니다. 한반도에 산재한 사찰(寺刹)과 서원(書院)이야말로 지구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한민족의 보물(寶物)이며 보존 상태도 우리 전란사(戰亂史)를 감안해도 열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인이사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다른 각성(覺醒)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유럽 어느 곳을 봐도 도시 중심에 교회가 서있듯 492년 고려사와 맥을 함께 한 불교유산과 518년 조선사를 받친 서원문화가 눈에 비친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전국 사찰을 취재하며 느낀게 대체 우리 절 가운데 의상(義湘)대사나 자장(慈藏)율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몇군데나 될까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때론 도선(道詵)국사 같은 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두 스님의 영향력은 압도적입니다.
    의상대사의 영정이다. 부석사 조사당 안에 걸려 있다

    조선일보에서 종교를 담당하는 전문기자에게 “혹시 조계종에서 의상대사나 자장율사가 지은 절이 몇 개나 되는지 통계를 뽑아놓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런 자료를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닐텐데도요. 의상은 625년에 태어나 702년에 사망했고 자장율사는 590년에 태어나 65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년(生年)을 기준으로 35년의 차이가 있어 오늘 의상대사를 다뤘지만 취재가 보충되면 자장율사와 도선국사에 대해서도 다뤄볼까 합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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