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4 :전봉준과 진영호

浮萍草 2015. 5. 16. 08:30
    3대 풍수 좋은 곳 중 한 곳에서 일어난 민란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 터. 바로 뒷편이 고속도로이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일대에는 동학농민혁명 발발
    기념일을 맞아 당시 인물들의 얼굴을 그린 깃발이
    걸려 있다.맨앞이 전봉준, 뒷편이 손화중이다.
    난 4월6일이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지 만 28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전(前) 직장에서 근무한 2년3개월을 합치니 그야말로 ‘머슴살이’가 30년을 넘었습니다. 그 세월 팔도강산(八道江山)을 종횡하다보니 ‘얼치기 풍수’가 됐지요. 우리 땅 가운데 지세(地勢)가 마음을 편안케하는 곳이 세군데 있습니다. 경북 안동 하회, 충남 공주, 전북 고창(高敞)입니다. 고창은 붉은 빛 감도는 황토(黃土)가 전국 최고의 곡창이자 숱한 기인이사(奇人異士)를 탄생시켰습니다. 지금 고창 일대에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지 올해로 121년 되는 해입니다. 고창군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음력 3월20일 전봉준-손화중 등 지도부가 무장에서 백산마을로 출발하면서 불이 붙습니다. 121년전의 음력 3월20일이 오늘날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달력 상으로는 오는 5월8일이 되네요. 아마 이 즈음해서 고창군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를 갖는 모양인데 인근 정읍시에서도 여러 행사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전사(前史)를 살펴봅니다. 동학(東學)은 서학(西學), 즉 천주교에 맞서 자생한 종교입니다. 1860년 동학을 태동시킨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4년 뒤 대구에서 처형됩니다. 그 뒤 약 30년간 동학은 내부를 결집시키지요. ‘교조신원기(敎祖伸寃期)’입니다. 혹세무민했다는 누명으로 죽은 최제우의 죄명을 벗기고 종교의 자유를 받아내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1892년부터 동학교도들은 충청도 공주-전라도 삼례-서울 광화문-충청도 보은 등에서 대규모 집회를 엽니다. 그런데 동학교도들을 폭발시킨 사건이 최제우가 처형된지 거의 30년이 되는 1893년 11월15일 일어납니다. 군수(郡守)로서는 유일하게 국사책에 등장하는 고부군수 조병갑이 지나치게 농민들을 착취하자 세금을 감면해달라는 청원이 시작된거죠. 고부군수 조병갑하면 여러분은 노무현 정권 당시 민주의 대명사처럼 행세하다 조병갑이 증조부였음이 밝혀져 하차한 한 인물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의 해명은 허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 벼슬에 매달리는게 인간의 숙명인가요. 나는 증조부의 경력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증조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오류일 수도 있다.” “증조부는 역사의 희생양일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역사가 완전히 잘못돼 무고한 조병갑을 죄인 취급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도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 될텐데 이상한 것은 그런 역사인식을 가진 인물이 한때 섬겼던 당(黨)의 간판을 들고 나오기만 하면 당선되니 참으로 사람들의 속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각설하고, 당시 조정은 농민들의 집단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농민들의 세 감면 요청이 있은지 보름만에 조병갑을 인근 익산군수로 발령냅니다.
    이에 반발한 농민들이 상급기관인 전라감영으로 찾아갔다는데 당시 전라감사는‘악수’를 둡니다. 조병갑을 1894년 1월9일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한 겁니다. 그해 2월20일 동학접주(지역 지도자) 전봉준은 창의격문을 발송하고 3월23일 고부관아를 점령합니다. 이어 흥덕-함평-무장-영광-장성 등에서 잇따라 관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호남의 거점인 전주성마저 손에 넣은 뒤 관군과 세차례 접전합니다.
    전봉준의 생가 앞에는 무슨 용도인지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가사를 그린 트레일러가 서있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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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크게 되지못하면 멸족(滅族)되는게 낫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
    제는 청(淸)나라 군사(1894년 5월4일)와 일본군(같은 해 5월6일)이 본격 개입했다는거지요. 일본군은 그해 8월 평양전투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치면서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은 전국에서 궐기합니다. 동학혁명군과 일본군은 공주에서 회전(會戰)을 벌이는데 안타깝게도 동학혁명군이 패합니다. 논산-전주 전투에서도 지면서 동학혁명군의 3대 지도자였던 김개남이 12월3일,전봉준-손화중은 다음해 3월30일 교수형을 당하지요. 그렇다면 전봉준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전봉준의 생가는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습니다. 바로 뒤가 서해안고속도로이며 고창고인돌 휴게소 뒤쪽으로 난 길에서 차로 5분거리에 있습니다. 생가 터는 볼만한게 없습니다.
    전봉준 생가 앞에 놓인 노래 가사비. 전봉준은 키가 작아 별명이 '녹두'였다고 한다.

    초가 한채와 마구간-헛간으로 쓰이던 다른 한채,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가 새겨진 돌비석과 전봉준의 약력이 적힌 입간판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민주를 떠들던 10년 정권동안 왜 동학혁명운동이 푸대접받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고창 공음면이라는 곳에서는 동학농민운동 무장 기포지라는 곳이 있는데 이 역시 초라한 정자 한채 옆에 돌비석이 서있을뿐입니다. 마침 그 옆에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과 격문(檄文)이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고창군 공음면의 동학혁명 기포지에 서있는 기념비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혹은 승록)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냈으며 집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전봉준은 아주 높은 직위는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글을 깨우친 ‘시민계급’쯤이라고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부친이 탐관오리 조병갑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곤장을 맞고 한달만에 죽습니다. 이때부터 가세(家勢)가 기울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이었지요. 그때부터 전봉준은 “크게 되지못하면 멸족(滅族)되는게 낫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회 불만세력이 된 겁니다. 태인 산외로 동곡마을에 자리한 전봉준은 세마지가 전답에서 농사를 짓는 한편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 일로 생계를 잇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해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동학접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수 조병갑을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거지요. 전봉준의 사후 숱한 전설이 생기는데 대표적인 두가지를 소개합니다. 먼저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고창 흥덕 소요산 암자에서 꾸었다는 꿈입니다.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두번째로, 전봉준은 풍수를 볼 줄 알아 동학농민혁명 지관(地官)을 가장해 전라도 땅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비기(秘記)를 얻었으며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에서 천하의 명당을 발견했다고합니다. 이른바 기러기가 고운 모래밭에 내려앉는다는‘평사낙안(平沙落雁)’의 길지라고 합니다. 문제의 그 비기는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끈 손화중의 부하가 선운산 선운사의 석불(石佛)의 배꼽에서 얻은 것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선운사 일주문. 선운사는 동학농민혁명과도 연관이 깊다.

    “선운사 도솔암 남쪽 수십보되는 곳에 50여척 되는 층암절벽이 있고 그 절벽 바위 전면에 큰 불상하나가 새겨져있다. 그 석불은 검당선사의 진상(眞像·참모습)인데 배꼽 속에 비결이 들어있다. 그 비결이 햇빛을 보는 날 한양은 몰락한다….” 전봉준에게는 ‘녹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키가 작아 그렇게 불렸다는데,지금 고창의 상징은 녹두아닌 청보리입니다. 고창군 공음면이 앞서 쓴 것처럼 동학혁명 기포지(起布地)인데 지금은 벌써 12회를 맞는 전국 청보리밭 축제로 유명하지요. 학원농장은 진의종(陳懿鍾) 전 국무총리의 아내 이학 여사가 잡목 무성한 야산 30만평을 사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땅을 아들 진영호(67)씨가 1992년 이어 받아 청보리를 심으면서 일약 유명해졌지요. 지금 그곳은 온통 푸른색으로 변했습니다.
    지금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에서는 청보리밭 축제가 한창이다.

    서울 농대를 나온 진씨는 금호에서 20년을 일했습니다. 원래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를 따라 고향이 ‘전북’이 됐다고 합니다. 학창시절 방학 때면 이 농장에 내려왔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이 농장을 맡아서 해보겠느냐”고 물었답니다. 어머니의 꿈은 영화에 나오는 외국의 농장처럼 이곳을 만드는 것이었다지요. 그래서 진씨도 대학에서 전공을 농업으로 택했습니다. 1971년 졸업 후 그는 1년반가량 농장에서 일했는데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환경이 열악했던 탓이지요. 당시 고창에 있는 경운기를 모두 합쳐봐야 10대,고장이라도 나면 광주로 가야했는데 당시 고창과 광주를 오가는 차가 하루 4편 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래서야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그는 기업에 취직해 20년 청춘을 훌쩍 보냈습니다. 임원까지 지내다 다시 돌아온 농장에서 그는 ‘경관(景觀)농업’이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그새 농장 규모는 원래의 절반정도인 15만평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심어 유명해진 청보리밭 축제는 돈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청보리밭에 들어가는 입장료를 받는 것고 아니고 주차료를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의 수입은 작은 식당에서 파는 음식이나 커피 등 음료수 매출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축제기간 중에 인근 마을 부녀회에서 별도의 음식을 팝니다. 그렇다면 그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무료봉사’하는 셈인데 그것이 참으로 절묘하다고봅니다. 만일 땅 15만평으로 부(富)를 축적하는데 열을 올렸더라면 국무총리를 지낸 아버지의 후광(後光)을 이용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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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읍성 바로 앞에서‘한국의 셰익스피어’를 만나다
    고창읍성의 정문을 옆에서 본 장면이다.
    ‘제2의 조병갑’이란 혹평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을 택함으로써 돈은 없지만 명성을 얻습니다. 봄에 청보리, 여름에 해바라기 가을에 메밀이 연출하는 장관(壯觀)을 공짜로 제공하는 것이 주민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한해 이 축제들을 보러 연간 80만~100만명 가까운 인파가 고창으로 찾아온다는데 그들이 이곳저곳에서 돈을 쓰고 갈 수밖에 없으니 고창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거지요. 그러니 그야말로 진영호씨는 현대판 기인(奇人)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창의 청보리밭 한켠은 붉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황토입니다. 황토는 건강에 좋다는데 청결(淸潔)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구두는 망가지기 십상이고 등산화를 신어도 끈적거리는 황토가 며칠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혁명을 꿈꿨던 농민 지도자 전봉준과 21세기에 발상의 전환을 이룬 청보리밭 주인 진영호의 삶을 돌아보고 내친 김에 고창군 중심부 고창읍성(邑城)으로 향했습니다. 고창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성이라고 합니다. 성곽 길이가 1700여m에 높이 4~6m인 이 성은 서해안을 자주 침략한 왜구(倭寇) 때문에 지어졌다지요. 임진왜란 때 성곽을 제외한 시설이 불타 무너졌는데 동헌-객사 등 옛 건물들이 복원됐습니다. 성곽에선 고창의 전경(全景)이 한눈에 보입니다.
    고창읍성의 또다른 문이다. 등양루는 이곳에 올라 해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창읍성에는 성밟기와 관련된 노래가 전해집니다. 한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바퀴돌면 무병장수하며 제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데 과연 성의 입구에 성밟기를 하던 아낙네들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이런게 읍성 구경의 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고창읍성 바로 앞에서 저는 ‘한국의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조선말기 판소리를 정리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1812~1884)입니다. ‘한국의 셰익스피어’라는 말은 고창군에서 붙인 것인데 꽤나 절묘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윌리엄 세익스피어는 ‘희곡’을 바탕으로 오늘날 세계인의 언어가 된 영어의 모습을 만들었지요. 그전까지 영국의 상류층은 자신들을 지배하던 프랑스 귀족들의 문화를 모방하는데 열을 올렸으며 서민문화는 사실상 없었습니다.
    고창읍성 앞에 세워진 성밟기 놀이를 상징하는 동상이다

    한국 판소리의 오늘날 모습을 만든 신재효의 부친 신광흡은 경기도 고양군 태생입니다. 아전 출신인 신광흡은 나이들어 전북 고창에 정착했는데 신재효가 태어난 것은 1812년 이었습니다. 아들 신재효 역시 아버지의 직업을 이었습니다. 중앙과 지방 관아의 연락사무를 맡은 겁니다. 그래서인지 향리(鄕吏)나 서민과의 교유가 깊어 그가 죽었을 때 추모의 글을 적은 만장(輓章)의 수가 엄청났습니다. 그는 이방(吏房), 호장(戶長)을 지내다 1876년 일약 정3품으로 도약합니다. 기근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구제한 공이었는데 이어 호조참판과 동지중추부사도 겸하게되지요. 하지만 그의 능력은 이방에서 참판이 된 신분상승에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양반이 즐기던 한시(漢詩) 아닌 판소리의 세계를 서민에게 열어준 것이지요. 우리 판소리는 직설적이고 박자가 빠른 동편제(東便制)와 유연하고 화려하면서도 박자가 느린 서편제(西便制)로 나뉩니다. 그는 이 두가지의 장점을 조화시켜 판소리의 제마사을 살려내는 한편 진채선 등 소리꾼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광대가’를 통해 인물-사설-득음-너름새라는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지요. 그로써 판소리는 상스럽다는 편견이 사라집니다. 만년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타령의 가사를 개작해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30여편의 단가(短歌)도 남겼는데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재산 모으는 법을 다룬 ‘치산가(治産歌)’서양의 침입을 걱정하는‘십보가(十步歌)’ 등인데 1866년 병인양요를 기해 만든 노래 ‘괘씸한 서양되놈’은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괘씸하다 서양되놈,무군무부(無君無父-왕도 인정치않고 아버지를 위해 제사를 지내지않는다는 뜻) 천주학을 네 나라나 할 것이지(중략) 남은 목숨 도생하려 바삐 도망친다…”는 가사입니다.
    고창읍성 바로 앞에 있는 동리 신재효의 고택.

    전라도의 척외(斥外)정신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런 신재효의 가옥이 고창읍성 바로 앞에 보존돼있고 바로 옆에는 판소리 박물관이 들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만 신재효 가옥에서 잠시 실망했습니다. 가옥을 관리하는 이가 없고 방에 가슴 섬찟한 인형들을 배치해놓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판소리를 배우던 아이들을 재현한 것 같은데 하필이면 인형들이 하나같이 귀신 같은 형상이어서 임산부가 봤다가는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왕 좋은 일 할 바에 사소한 부분도 더 신경썼으면 좋으련만 얼마를 아끼겠다고….
    신재효의 고택안에 서있는 동리가비. 동리는 신재효의 호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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