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56〉 캄보디아 ⑧

浮萍草 2015. 4. 13. 09:23
    크메르와의 대화
    구미래 | 동방대학원
    대학교 연구교수
    ""비록 야만인의 나라지만 군주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진 않는다.” 14세기 초 주달관이 기록한 크메르왕조 견문록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의 마지막을 장식한 말이다. 주변나라를 모두 오랑캐로 본 중국인의 관점을 담으면서 한편으로 크메르왕실의 권위가 꽤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듯하다. 밀림에 덮인 앙코르유적지를 세상에 알린 이가 프랑스 탐험가 앙리무오라면 앙코르시대의 유일한 기록자는 중국 상인 주달관(周達觀) 이다. 외국문물에 능통했던 그는 1296년 사신단의 수행자 자격으로 크메르왕조를 방문하여 1년간 보고 느낀 바를 차근차근 적어나갔다. 400~500년에 걸친 크메르왕조의 기록은 전쟁으로 소실되고 비문만 남았으나, 이방인 주달관의 기록은 중국 땅으로 건너가 고스란히 보관된 것이다. 19세기 초에 내용이 공개되면서 불가사의한 앙코르문명과 대화하려는 세계인들이 다투어 이를 번역하였다. 유적에 대한 묘사가 현재와 정확히 일치할 뿐더러 정치․경제에서부터 문화․풍토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이고 생생한 기록으로 평가받는 글이다. 상인의 신분이었지만 이국의 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적어나간 그의 습관이 함께 간 어느 외교관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700년을 훌쩍 뛰어넘어 14세기 크메르인들의 생활불교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집집마다 부처님을 받들어 불사를 행하였고 국왕은 스님들과 나랏일을 의논했으며 사원에서는 재주(齋主)의 집에서 가져온 재물로 매일 재를 올렸다. 또 출가자는 생선과 고기를 먹되 술은 마시지 않았으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에도 어육이 올랐다. 현재 탁발전통을 이어가는 남방불교국가들처럼 재가자가 출가자의 식생활을 맡았기에 승속의 음식이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신년이 되면 나라 안의 모든 불상을 모셔놓고 국왕이 함께 부처님을 씻는 영불수(迎佛水) 의식을 행하였다. 학자들은 바이욘사원에 16개의 법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관불(灌佛)이 이루어졌으리라 추정한다. 멀고 가까운 사원에서 왕궁으로 불상을 모셔오는 행렬과 법당마다 펼쳐지는 대규모 관불의식이 얼마나 장엄하고 환희로웠을 것인가. 수확철이면 새로 여문 벼이삭을 태워 부처님께 올리는데 이 의식을 보기 위해 마차와 코끼리를 타고 모여든 부녀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시신 앞에 깃발을 세우고 고악(鼓樂)을 울리며, 구운 쌀을 길에다 뿌렸다. 이는 곧 먼 길 떠나는 이를 위해 풍악을 곁들인 환송회를 치러주는 것이요, 망자의 저승길 양식이 아니겠는가. 야장(野葬)으로 장례를 치르는 이도 많았는데, 성밖에 시신을 두어 날짐승이나 들짐승이 깨끗이 먹으면 망자와 산자에게 복이 깃든다고 여겼다. 생전에 뭇 생명을 취하였으니 죽어서는 육신을 남김없이 자연에 보시하는 뜻이리라. 타인의 시선으로 써내려간〈진랍풍토기〉외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크메르인들은 놀랍게도 문자가 아닌 방식으로 방대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앙코르와트 제1회랑의 네 면을 감싸고 있는 세계 최장의 부조가 그것이다. 주로 전쟁과 신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하단엔 그들의 다채로운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520미터에 달하는 부조와 마주하면 크메르와의 가슴 설레는 대화는 화수분처럼 이어질 것이다
    ☞ 불교신문 Vol 3095        구미래 동방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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