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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가속되는 서양의 야만성

浮萍草 2015. 3. 12. 11:13
    유럽(Europe)의 나라들. EU에 가입한 국가 © 편집부
    12. 유럽지방의 급속한 퇴화 차대전이 끝나자 유럽인들은 많은 것이 변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전쟁에 패한 독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전쟁에 이겼다는 나라들도 타격이 크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에 소모된 막대한 비용과 막대한 인명손실은,설령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전부 받는다고 해도 회복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수많은 공장과 생산시설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장 굶주린 창자를 채우기도 힘든 상태였으므로 이긴 자와 진 자의 구별없이 유럽지방은 암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전 유럽지방을 황폐화시킨 일차대전으로 이익을 본 나라가 있다면 막대한 유럽의 전시(戰時) 물자들을 도맡아 팔아 먹다시피한 미합중국과 뒤끝에 가서 참전하여 독일이 점거하고 있던 산동반도를 탈취한 제국주의 일본과 북아프리카에 대한 진출이 가능해진 이태리 정도였고 하나 더 보탠다면 볼셰비키가 장악한 쏘비에트의 성립이었다. 그러나 유럽세계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식민지 여러 나라들의 활발한 독립운동이었다. 유럽지방의 번영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던 식민지의 양순한 민중은 더 이상 서양인들을 문명인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식민지 민중은 '자칭 문명인'들끼리 보다 많은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아귀다툼하는 생지옥을 목격하고서는 서양인들이란 야만인보다 훨씬 못한 괴물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식민지를 지배하던 정치적·문화적·윤리적 마취제들이 일시에 그 효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하여 민중의 세상을 건설한다는 쏘비에트의 선언은 식민지 민중해방투쟁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쏘비에트의 인민해방군인'적군(赤軍)'이 대한국의 광복투사들을 자유시에서 학살한 범죄적 사실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런 기회주의적인 쏘비에트 정부의 실제적 내막을 알 길이 없는 순진한 식민지 민중은 오로지]진정한 자유 쟁취'와'착취가 없는 민중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맨 손으로 해방투쟁의 전선에 뛰어 들었다. 인류최고의 문명을 간직한 채 식민지로 전락했던 대한국에서 삼일 독립만세운동으로 가장 먼저 해방투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고 이어서 대한국의 만세운동에 자극 받은 반식민지였던 지나지방의 5·4운동, 인도지방의 간디에 의한 무저항투쟁,라틴아메리카의 니카라과에서의 산디노 혁명세력 봉기,인도지나반도의 해방투쟁, 아프리카의 알제리아와 리비아 등지에서의 반제국주의투쟁 중동 아랍민족들의 민족주의 고양 심지어는 차후에 유럽지방의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에서도 파씨스트 정권에 대항하여 시민혁명이 발생하는 등으로 전 세계는 바야흐로 반제국주의적인 혁명의 분위기 속에 해방투쟁의 열기를 더해 갔다. 13. 대양주의 근세
    우리가 미주인디언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간과하기 쉬운 것은 대양주의 근세와 현대사일 것이다. 제임스 쿠크가 이끄는 영국의 해적선단이 18세기 중엽에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약탈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뉴질란드 열도는 세계사의 이면에 가려진 채 완전히 영국해적들의 독무대가 되어 버렸다. 유럽지방만큼이나 넓은 이들 큰 섬들에도 수천년이상 평화롭게 캥거루·코알라와 함께 살아온 주민들이 있었다. 별로 유럽의 '문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풍요한 자연환경에서 쾌적한 기후를 즐기며 태평스럽게 살아가던 수백만명 이상이나 되던 원주민들은 유럽지방 야만족들에 의하여 미주대륙의 인디언이나 인디오들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 갔다. 뉴질랜드 열도에 많이 살던 마오리 종족은 백인들의 눈에는 자기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아리안족'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관계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리족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 백인과 확실히 외형상 구별되는'태즈마니아'인이라고 불리운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사냥감이 되어 급속히 사라져 갔다. 영국해적들은 영국섬에서 지리상으로 가장 떨어진 그 외딴 섬들을 주로 극악한 죄수들의 유배지로 만들었고 그런 질 나쁜 백인들이 결국 호주대륙과 그에 딸린 섬 들의'개척'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의 권리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풍요로운 조상들의 땅에서 학살당하거나 학대당하여 쫓겨갈 곳은 결국 미주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사막이나 불모지 밖에는 없었다. 전세계적인 식민지 연합인 대영제국 중에서 그런대로 세계사적인 격변에 휘말리지 않고 백인들의 천국을 어거지로 만들어 온 호주와 뉴질랜드는,소위'백호주의'를 표방하고 어떠한 유색 인종의 거주도 허락하지 않는'인종차별의 천국'이기도 했다. 백인 침략자들이 이룩한 인류역사상 또 하나의 오점이 남태평양의 평화로운 땅과 바다에 남게 된 것이다. 평화로운 남태평양에 떠있는 수많은 낙원같은 섬들의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도 태즈마니아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퇴폐한 유럽세계의 난잡한 남·녀 관계에 의하여 창궐한 매독 따위의 유명한 성병들은,해적들의 약탈과 강간에 의하여 곧 전 섬주민들에게 번져 갔고 그러한 사태는 외부와 격리되어 질병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던 섬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인 해독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이 대대로 누려 왔던 수천년래의 진정한 지상천국은 깨어지고 태평양 열도는 성병천국으로 급변해 갔다. 단지 남태평양의 무더운 날씨탓에 거의 벌거숭이로 지내던 이 순진무구한 원주민들이 유럽지방의 문명인처럼 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던 유럽지방의 매독보균자들은,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주민들이'문명인'이 되기 위하여 거추장스런 서양식 옷을 걸치자,이번에는 자기들이'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나체 일광욕을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아전인수격인 그러한 서양 야만족들의 무책임하고 근거없는 자기 만족은 오늘날까지도'늑대의 논리'로서 지구상의 범인류적 공존에 지대한 해독을 끼쳐 오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바와 같다. 빠빠라기라고 불리운 그러한 백인들의 무분별한 성병 전파로 인하여 멸종직전에 이른 원주민들은 이번에는'타락한 원주민들의 불쌍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고 찾아 온 선교사들로부터'복음전파'를 얻어 듣게 되었고 서양인들이 전파하는 복음 속에 있는 천국이 사실은 서양인들이 쳐들어오기 전의 태평양 원주민들의 평화로운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는 점도 알게 되어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힘의 열세에 의하여 그들 또한 본의 아니게 식민지 노예로 전락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중의 힘이 각 섬에 분산되어 있던 남태평양의 수많은 식민지에서만은 서양 침략자들이 보다 더 오랫동안 민중혁명의 위험없이 마음껏 수탈할 수 있었다. 14. 독일지방의 재기
    전 세계에 침략 세력을 구축했던 서양 여러 강도나라들이 식민지의 해방투쟁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합중국에게 천문학적인 빚을 지게 된 유럽 각국은 폐허가 된 본국의 회복을 촉진하자면 식민지에 대한 더욱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단 불붙기 시작한 구식민지의 해방투쟁은 그처럼 보다 악랄해진 수탈에 의한 반발로 더욱 크게 번져 나갔으며 유럽 지방의 식민지 강탈국가들은 더욱 더 안간힘을 써서라도 강도적 수탈을 성취하려 했다. 그러한 악순환은 결국 피압박지역 민중의 숱한 희생을 요구하게 되었고 식민지 사회는 혼란으로 치달았다. 사태가 복잡하게 전개되어 가자 서양제국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직접 통치하는 대신 물러나는 척하면서 원주민 중에서 꼭둑각시 수령을 내 세워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 후 소위 간접통치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진실한 지도자가 아닌 괴뢰정권에 의한 식민지 민중수탈은 더욱 질이 좋지 않았고 이번에는 괴뢰정부와 민중간의 동족간 상쟁으로 그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정통성있는 정부'를 세우기 위한 더욱 가열한 항쟁과,그 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반복되었다. 간접통치 방식은 민중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데 혼란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제국주의자들은 그러한 혼란을 야기시켜 놓고서는 부패한 저들의 괴뢰정부를 통하여 실제적인 경제적 이익을 모두 챙겨 갔다. 서유럽지방은 그러한 여러가지 파행적인 온갖 퇴폐적인 방법을 통해서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변변한 식민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가 그나마 패전으로 인하여 연합국들에게 다 빼앗기게 된 독일의 실정은,식민지 사회에 못지 않은 혼란의 도가니 바로 그것이었다. 더구나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으므로 동정의 여지조차 없었다. 수십년을 굶으면서 벌어 갚아도 당해낼 수 없는 엄청난 배상금이 더욱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패전 후 카이제르에 의한 왕정체제가 무너지고 힌덴부르크 장군이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유럽 각국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민주적'인 나라가 되기를 강요했다. 그에 따라서 독일인들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완벽한 민주헌법'임을 자랑하는'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여 공화국으로서의 첫 선을 보였다. 서기 1920년에 성립된 국제 연맹은 그러한 독일공화국에 대하여 모든 군사적 장비나 수단을 보유할 수 없도록 감시했다. 그러나 식량마저 부족한 독일공화국의 내부에서는 쏘비에트식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고 이와는 달리 보다 강력한 아리안 족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지망생이었던 참전용사 아돌프 히틀러를 중심으로 '국가사회주의'(즉 나치스)의 세력이 독일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가며 성장했다. 대부분의 독일 국민은 프레드릭대왕 이래 무적 강군을 자랑하던 독일인으로서의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었던 게 사실이었고 빚더미에 깔린 채 유럽세계에서 삼등 국가로 전락한 독일을 곤경에서 구해줄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국은 온갖 민주적 방법들을 동원하여 난국을 수습하려 했으나 바로 그 민주헌법 덕분에 독일 전 국토는 파업과 선동적 데모로 지새우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사회주의 운동이 만연되어 가자,그나마 돈줄을 쥐고 있던 자본가 계층은 민중봉기에 의하여 자기들도 러시아의 왕족이나 귀족들처럼 숙청 당하는 최후를 맞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그러한 사회주의 운동을 잠재우면서도 강력한 독일을 재건하려면 히틀러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곧 알게 되었다. 나치스는 이미 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일종의 구사대(救社隊) 조직이나 별 다름없는 행동대(돌격대)를 동원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일차대전 중에 사회주의자들이 보여 준 반국가적 소요사태 등을 극도로 증오하였으므로 그리한 폭력적 방법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가질 수 없을 만큼 철저한 '국가사회주의자'인 히틀러는 덕분에 수차례 감옥행을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쏘비에트가 독일에 세워지기를 기대하지도 않고 독일이 빚더미에 깔려 질식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던 자본가들과 중산층 및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은근히 히틀러를 부추겼다. 히틀러는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하여 나치스적인 세계관을 확립했다. 독일 국민에게 아리안 종족의 우수성을 각성시키고 니체적인 힘의 철학과 초인정치를 강조하여 강력한 독일민족국가를 주장한 '나의 투쟁'은 한편으로는 유럽 지방과 독일사회의 정치 및 경제를 쥐고 있다고 판단된 유태인에 대한 가차없는 독설도 빼놓지 않았다. 쏘비에트 정부가 대부분 유태인 혁명가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었던 점은 특히 그의 반유태인적 인식을 높인 듯하고 연합국의 돈줄도 역시 유태인자본가들이 거머쥐고 있었던 점이 그의 적개심을 부채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20세기 초엽에 러시아 왕국의 수도사인 세르게이·닐스에 의하여 세상에 공표된 '시온의정서(Zion protocol ;시온議定書)'는 유태인들이 세계정복음모를 배후 에서 꿈꾸고 있다는 내용으로써 그 문서의 진실성 여부는 밝혀지지 않은 채로 유럽세계에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에서 발생한 유태인 장교간첩 음모사건,즉 드레퓌스 대위 사건에 자극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신문기자 테오도르 헤르쯜이 쓴'유태인 국가(Der Judenstaat)' 및 여러 관련저서들은 시오니즘 운동의 지침서가 되었고 그에 따라서 유태인들이 옛날에 살았던 팔레스타인에 유태인국가를 건설하자는 움직임도 구체화되어 갔다. 실제로 전 세계적 대자본가들이기도 한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이 정착할 땅을 서서히 구입하고 가난한 유태인들은 그 땅에서 유태인국가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유럽제국주의의 반식민지이기도 했던 아랍세계에서는 그러한 유태인들의 움직임을 눈앞에 보면서도 별다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일차 세계대전 중에 유태인들이 독일의 적국인 영국섬을 크게 도왔는데 전쟁도 채 끝나지 않은 서기 1917년에 영국섬 외무대신 발포어는 소위 '발포어 선언'을 통하여,"영국정부는 유태민족의 고국건설을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에 있어서는 큰 진전이었으나 히틀러가 볼 때는 발포어 선언이라는 것이 영국섬 통치배들과 유태인이 한 통속으로 독일의 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우기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주로 유태인 혁명가들에 의하여 러시아 사회주의 정권이 나타난 것도 히틀러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음에 틀림없고 그에게 있어서 유태인은 서양세계의 실제적 지배자로서 독일을 멸망시킨 철천지원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비교적 간단한 한가지 도식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아리안족이 유태인을 제압하는 수밖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유태인이 아닌 아리안족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첩경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이제 세계는 아리안족과 유태족의 생사를 건 숙명적인 대결의 장소가 될 것'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아리안족의 세계사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가까운 사명감에 불타서 곧 동지들을 찾아 나섰다. 일견 독일민족의 부흥을 외치는 위대한 애국자이기도 한 히틀러의 웅장한 연설들은 순식간에 숱한 지지자들을 불러 모아 나치스의 세력은 얼마 안되어 독일사회를 석권하게 되었다. 위대한 독일의 부흥을 부르짖는 히틀러에 동조하여 처음에는 자본가들이, 다음에는 보수적 정치가들이 다음에는 중산층들이 차례차례 나치스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고 이윽고 전 독일 국민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 아리안족은'대추장'이 된 히틀러를 내심으로는 기대에 찬 눈으로 주시했다. 히틀러는 익숙한 마술사와도 같은 솜씨로 재빨리 국력을 회복해 갔다. 총통이 된 히틀러의 교묘한 외교정책으로 전쟁배상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게 되었고,서기 1935년에는 국제동맹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자국방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국방력을 대폭 강화하기 시작했다. 나치스의 독일부흥정책에 별 이견이 없던 독일의 선진적인 우수한 과학자,기술자들은 무기의 개량에 박차를 가했고 숱한 최첨단의 무기들이 선을 보였다. 단시일 내에 유럽지방 최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다시 갖추어 가는 독일을 서양 각국은 두려운 눈으로 주시하게 되었고 특히 유태인들은 뭔가 심상찮은 운명이 다가 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곧 이어서 많은 유태인들이 자진해서 독일을 떠나거나 추방되어 쫓겨갔다. 그들의 재산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통째로 압수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유럽세계는 다시 한번 세계대전을 향하여 줄달음쳐가고 있었다.
    Greatc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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