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6] 정부 수립 위한 총선거

浮萍草 2015. 2. 6. 10:37
    南韓 단독 선거, 좌익의 수류탄 투척 등 방해에도 투표율 95%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 무장한 채 투표소 지켜 추천인 서명 위조 이유로 이승만 경쟁자는 낙마 당해 北, 투표일 밤 "斷電" 위협… 좌익 "부정선거"주장했지만 무소속 당선자가 42% 넘어
    1948년 5·10 총선거 당일, 유권자가 투표하는 모습(왼쪽). 전남 나주에서는 폭력 사태에 대비해 경찰관이 죽창을 걸어놓고 경비를 섰다.
    1948년 5월 10일 화창한 봄날, 한국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됐다. 188선거구 1만3000여 투표소에는 선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헌옷이나마 깨끗이 빨아 정갈하게 다려 입은 유권자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총선거를 위해 전날부터 주류 판매가 금지되었고 선거 당일은 상인들이 자진해서 철시(撤市)했다. 투표함을 중심으로 긴장한 표정의 선거위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과 도끼, 야구 방망이, 곤봉을 둘러멘 향보단(鄕保團)이 투표소 주위를 삼엄하게 경비했다. 당시 경찰력은 3만5000명. 투표소 경비를 위해 한 곳에 3명씩 보내기도 부족했다. 향보단은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하기 위해 경무부장 조병옥이 군정청 승인을 얻어 우익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준(準)경찰 기관이었다. 투표 열기는 뜨거웠다. 인천에서는 투표 시작 2시간 만에 등록 유권자의 3분의 1이 투표를 마쳤다. 전라북도에서는 5시간 만인 오후 12시에 투표율 80%를 보였다. 서울에서도 오후 3시 투표율이 85%를 넘겼다. 만삭 임신부,80대 노인도 태어나서 처음 갖는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로 나왔다. 소선거구제로 국회의원 200명을 뽑는 선거였지만 이승만과 신익희 등 거물급 정치인이 출마한 12개 선거구는 단독 후보로 무투표 당선이 확정되었다. 애초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 선거구에는 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전직 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이 후보로 등록했다. 추첨으로 기호 1번을 배정받은 최능진은 독립운동 경력과 친일 경찰 처벌 공약 등을 내세워 선거운동 초반 선전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이승만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최능진을 낙마시킬 구실을 찾았다. 결국 선거를 이틀 앞두고 선거위원회는 후보 등록 때 제출한 추천인 200명 중 27명의 서명이 위조되었다는 이유로 최능진의 후보 등록을 무효화했다.

    5·10 총선거는 국민이 직접 대표를 뽑아 정부 수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에 입각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거였다. 하지만 분단을 공식화하는 불행한 사건이기도 했다. 남로당을 필두로 좌익 세력은'남한 단독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선거사무소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끊고, 철도 시설을 파괴하는 등 폭력 투쟁에 나섰다. 40여 군소 정당과 무소속 후보가 난립했지만, 입후보자의 정치적 성향은 우익 일색이었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입후보자와는 달리 유권자는 성별,연령,계층을 초월해 선거에 참여했다. 투표에 참여하려면 4월 16일까지 선거인명부에 등록해야 했다. 선거위원회는 등록 결과 총유권자 877만여 명 중 805만여 명이 등록해서 등록률 91.8%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총유권자 숫자가 그보다 많은 983만여 명이라고 추산하여 79.7%가 등록한 것으로 보고했다. 4월 3일부터'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통일 국가 수립'을 기치로 봉기한 무장 시위대와 군경 사이에 교전이 지속되고 있었던 제주도에서도 유권자 등록률은 64.9 %에 이르렀다. 치안 당국은 선거가'대체로 큰 사고 없이'진행되었다고 평가했지만,남로당의 '단선 저지 투쟁'은 선거 당일까지 이어졌다. 오후 1시에는 영등포구 선거사무소에 괴한들이 침입해 선거위원의 복부를 단도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도주했다. 오후 4시에는 마포 공덕동 제7 선거사무소에 괴한들이 침입하여 수류탄을 투척해 부근에서 놀고 있던 아이 2명이 경상을 입었다. 5월 9~10일 이틀 동안에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좌익의 테러로 선거사무소 41개소,경찰관서 15개소,관공서 4개소가 피습됐다. 선거 시설 8개소,기관차 1량 철로 51곳 도로 및 교량 8곳이 파괴됐다. 남산·북악산 등 전국 86곳에서 봉화가 올랐다. 전화선 129곳, 전신선 141곳이 절단됐다. 경찰 4명,공무원 6명, 양민 9명이 피살되었고,폭도 27명이 숨졌다. 이렇듯 유혈 테러로 얼룩진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등록 유권자의 95.2%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오후 7시 투표가 끝나고 이틀 후에야 나올 선거 결과를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5월 10일 밤,평양방송은'남조선 전력 공급 문제'에 관한 성명을 북조선 인민 위원회 김두봉 부위원장 명의로 발표했다. "5월 14일까지 전력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를 평양에 파견할 것을 제안하고 불응할 시에는 남조선에 대한 전력 공급을 결정적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다." 남한 주민의 총선 참여 열기에 북한 당국은 단전(斷電) 위협으로 화답한 셈이었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은 5·10 총선거가 관권을 동원한 총체적 부정선거라고 선동했다. 하지만 5월 12일 오후 윤곽이 드러난 개표 결과 당선자 198명 중 무소속 당선자가 전체의 42.5%에 이르는 85명이었다.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여당 격이었던 한민당이 29명으로 두 당 당선자를 합쳐도 무소속 당선자보다 1명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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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26세에 출마했던 이철승 헌정회 원로회 의장
    "이승만 박사가 출마 독려… 우익 후보 난립해 낙선" "신탁통치 얘기에 청천벽력" 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反託 학생운동에 앞장
    이철승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은 “3·1운동이 제1의
    독립운동이라면 반탁 운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며
    마지막 독립운동은 통일”이라고 말했다.남강호 기자
    "실은 내가 건방진 놈이었지." 3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헌정회 사무실.이철승(93)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이 웃으며 말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출마를 결심하던 대목에 대해 인터뷰하던 중이었다. 당시 그는 만 26세였다. 이 의장은"겨우 피선거권이 생긴 나이에 어떻게 국사(國事)를 알겠어 아버님께서도]구상유취(口尙乳臭)한 네가 무슨 경륜이 있다고 출마하려고 하느냐. 네가 출마하면 난 산으로 가겠다'며 한사코 반대하셨어." 그해 3월 이승만 박사의 부름으로 이화장(梨花莊)에 간 것이 출마의 계기가 됐다.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반탁(反託)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던 그에게 이 박사는 총선거는 애국 운동이자 문맹 퇴치 계몽 운동이므로 젊은이들의 참여가 절실하다"며 참여를 독려했다. 무소속 이철승도 기호 3번으로 고향 전주에서 출마했다. 하지만 우익 후보 4명의 득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좌익 후보에게 900표 차이로 석패(惜敗)하고 말았다. 그는"우익이 난립하면 어떤 정치인이 나와도 좌익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1950년 2대 총선에서도 후보 27명이 난립하는 바람에 고배를 마셨다. '3수'끝에 1954년 3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그는 1985년 12대 총선까지 7선을 기록했다. 이 의장은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의 보병 연대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는 콩나물시루 같은 밀항선을 200여 명과 타고 여수를 통해 귀국했다. 당시 스물셋의 그를 광복 직후 격렬한 좌우 대립의 현장으로 불러낸 건,한반도 신탁통치안(案)을 발표한 그해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였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이철승은 겨울방학을 맞아 귀향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리와 대전 구간에서 열차 충돌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 명동 다방에서 운행 재개를 기다리던 그는 다음 날 신문 호외에서 '신탁통치'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이 의장은 "광복의 희열이 싹 가시는 듯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고 했다. 보성전문(현 고려대) 학생회 준비위원장이었던 그는 다음 날 곧바로 동료 학생들과 함께 반탁 전국학생총 연맹을 결성했다 경교장에서 반탁 학생들을 맞이한 김구 선생은"백만 원군을 얻은 것 같다"고 반가워하면서'반탁승리 (反託勝利)''진충보국(盡忠報國)'휘호 2점을 그에게 써줬다. 지금도 그는 이 휘호를 간직하고 있다.
    이 의장은"맨주먹으로 싸워서 대한민국 탄생의 산파(産婆)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우리 세대에게는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난 아직 94세밖에 먹지 않았다. 살아있는 동지들과 평양에 가서 냉면 먹고 막걸리 한잔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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