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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승만의 승부수

浮萍草 2015. 1. 30. 11:34
    이승만, 左右합작 결렬되자 반공·반탁 南鮮巡行(남선순행·전국 순회 강연)… 지지기반 다져
    이념 뛰어넘는 단결 호소, 독립촉성중앙協 결성… 반탁으로 우익세력 규합 美·蘇 간 냉전 시작되자 '남한 단독선거' 밀어붙여 반대하는 김구와 결별
     
    ▲ (左)1945년 10월 20일 ‘서울시민 미군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오른쪽) 박사와 아치볼드 아널드 미 군정장관.
    "지금까지는 소리가 너무 많은 탓으로 세계에서 조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소리를 하나로 하여 세계에 표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만듭시다." 1945년 10월 23일 서울 조선호텔.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귀국한 지 1주일 만에 전국 65개 정당과 단체 대표 200여명 앞에서 꺼내 든 화두는 대동단결이었다. 송진우·장덕수의 한민당,여운형·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등 좌우로 나뉘어 있던 광복 직후의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주창한 것이었다. 귀국 성명에서 "덮어놓고 뭉칩시다"라며 이념 차이를 뛰어넘는 단결을 호소했던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 노선을 구체화하기 위해 결성한 조직이'독립촉성중앙협의회' (독촉)였다. '독촉'은 좌우 합작과 지방 순회, 우익 통합 등 정치적 격변기마다 이승만이 승부수로 활용했던 조직이었다. 1945년 11월 2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렸던 독촉 회의부터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까지 한 달여간 독촉은 '좌우합작의 실험장'이었다. 그해 11월 중도파 단체인 선구회(先驅會)가 정당·언론사·문화단체·학교 등 105개 단체를 대상으로 대통령 후보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431표(44%)의 지지를 받아 1위에 올랐다〈표〉. 이승만은 10월 29일 박헌영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4시간 가까이 단독 회담을 가지며 '좌익 끌어안기'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박헌영의 대화록에 따르면, 이들은 친일파 숙청과 인공 존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좌우 통합 시도는 이승만의 인공 주석 취임 거절(11월 7일)과 조선공산당의 독촉 전형위원회 불참(11월 28일)으로 시종 불협화음을 빚었다. 이듬해 1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이 찬탁(贊託)으로 돌아서면서 좌우합작 노력은 결렬을 맞았다. 1946년 3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1차 미소 공동위원회도 반탁 세력의 임시정부 참여 문제로 공전(空轉)을 거듭했다. 격렬한 좌우 대립의 정국에서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석 달간 지방 순회를 떠났다. 충청·영남·호남 순으로 20여 차례 계속된 이승만의 반공(反共)·반탁(反託) 강연에는 총 70만여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1946년 5월 1차 미소 공동위가 무기 휴회된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구상을 처음으로 밝힌 이승만의 정읍발언(6월 3일)도 이때 나왔다. '남선순행(南鮮巡行)'으로 불리는 당시 지방 순회는"이승만의 정치적 기반 강화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작업"(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이었다. 전국적 명망과 상층부 중심의 조직을 갖고 있던 이승만이 대중의 지지라는'힘의 3박자'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곧바로 6월 10~1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9일 장호원에서 마지막 강연을 마친 뒤 불과 하루 뒤였다. 독촉국민회는 이승만의 독촉과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한 조직이었다. 이 대회에서 이승만은 총재에 추대되면서 우익 세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부총재는 김구였다. 11일 이승만의 연설은 사실상 승전가와 같았다. "항간에는 김구와 이승만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등 쓸데없는 말이 떠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 말고 당신들만 한 덩어리가 되면 독립은 꼭 된다."
    그해 12월 도미(渡美) 외교에 나선 이승만은 4개월간 미국에 머물며 미 의회·언론과 접촉했다. 때마침 1947년 3월 트루먼 미 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에서"지중해 지역에서 공산주의 침투에 방어선 역할을 하는 그리스·터키 양국에 4억달러의 차관을 부여하고 미국 군사 고문단의 양국 파견을 승인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트루먼 독트린'이었다. 아시아에서 한국이 공산주의 방어의 최전선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감안하면,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에 자연스럽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1947년 4월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만나고 중국 난징(南京)에서 장제스 (蔣介石)와 회담한 뒤 장제스가 제공한 특별 군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21일 이승만의 귀국 일성은 자신감으로 넘쳐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에 민주 정체(政體) 건설을 절대 지지하며 맥아더 장군은 나와의 두 시간 동안 담화에서'한인들의 자치·자주 능력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김구는 독촉국민회 부총재직 사표를 제출했다. 둘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 "이 박사 형님"과 "아우님"이라고 부르면서 공동보조를 취했다. 하지만 이들은 남한 단독 선거 실시를 둘러싼 견해차로 1947년 12월 최종 결별했다. "사람의 몸에 한편이 죽어가는 경우에는 살아 있는 편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은 편을 살리기를 꾀할 것"(1948년 3월 1일)이 이승만의 '현실주의'였다.
    반면 김구의'이상주의'"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 (1948년 2월 10일)는 것이었다. 불과 한 달 간격으로 발표된 성명이었지만, 둘 사이에 더 이상 접점은 없었다.
    Premium Chosun ☜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danp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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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취재 언론인 조용중
    "의원 구속하며 개헌, 美 반대 속 포로 석방… 이승만,격변기마다 승부수"
    조용중씨는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의
    공(功)과 이후 독재의 길로 간 과(過)를 냉정
    하게 평가하고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이승만은 냉혹한 승부사입니다. 좌익이든 민족진영이든 그에 대항할 사람이 없었어요."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연합통신 사장을 지낸 원로 언론인 조용중(85)씨는 이승만 정권 시기인 1953년부터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21일 만난 조씨는 지난해 말 암 수술을 받아 보행 보조기가 없으면 걷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조씨는 기자로서 대통령 이승만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국회의사당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비서에게 '저기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누구냐'고 하더니 기자들에게 손짓하며'이리 가까이 오라'고 했어요. 귀여운 손자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지요." 그러나 조씨는 이승만을 '인자한 웃음'으로만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는"이승만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후 대통령 누구와 비교해도 단연 최고"라고 했다. 조씨는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을 예로 들었다. 지난 2004년 조씨는 당시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책 '대통령의 무혈혁명'(나남)을 냈다. 부산 정치 파동은 이승만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을 전격 구속하고 직선제 개헌(발췌개헌)을 밀어붙인 사건이다. 당시 이승만은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지만 미국은 휴전에 반대하는 그를'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씨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이 국회에서는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무리한 개헌 시도를 한 것 으로 분석했다.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이라고 몰아세웠는데 전시였던 당시 국민에겐 이게 먹혀들었어요." 1953년 6월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해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것도 이승만의 승부사적인 결단이라고 했다. 공산군과 포로 교환을 통해 휴전을 추진하던 미국은 이승만의 포로 석방에 경악했다. 미국은 이후 이승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한미방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조씨는"반공포로 석방은 미국과 중국 등이 어떤 수를 노리고 있는지 내려다보는 안목과 배수의 진을 친 돌파력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면서"당시 야당은 '미국이 화낼 일을 왜 했느냐'고 이승만을 비판했지만 결국 이를 통해 한미방위조약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Chosun ☜     용인=이한수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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