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4] 재외 독립인사들의 귀환

浮萍草 2015. 1. 19. 10:46
    이승만·김구·김일성 앞다퉈 歸國… 한반도, 이념·문명 충돌 최전선으로
    '민족진영 영웅' 김구·이승만 "고려공산당과 연대 안된다" 김구, 臨政 때부터 반공노선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 예견한 '일본 내막기'로 美서 주목, 공산주의 맞서 가톨릭과 연대도
    소련 전폭 지지 받은 김일성 스탈린 비호 아래 9월 귀국, 박헌영 제치고 권력 잡아

    1945년 11월 귀국 도중 상해 비비행장에 내려 포즈를 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둘째 줄 왼쪽 셋째가 김구 선생이며,두 사람 건너 중절모 쓰고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이시영 선생이다.김구 선생 앞에 있는 소년은 작은할아버지인 이시영 선생을 마중 나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다. /주완중 기자
    1945년 소련군이 진주한 평양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웅'은 김일성이었다. 한때 민족 지도자 조만식의 명성을 이용하기도 했지만,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이었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에 상륙했다. 10월 16일에 귀국하는 이승만,11월 23일에 귀국하는 김구에 비해 김일성은 귀국도 빨랐다. 그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미국이나 중국이 이승만과 김구를 후원했던 것보다 일관되고 전폭적인 후원을 소련으로부터 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의 더 큰'영웅'스탈린 대원수(大元帥)의 눈에 비친 김일성은 확신에 찬 공산주의 게릴라 지도자였고,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우호적 관계에 있을 때부터 소련군의 명령 계통을 따랐던 소련군 대위였다. 김일성보다 선배였던 많은 한인 공산주의자는 스탈린의 대숙청 과정에서 사라졌고,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일대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들 중에는 허가이(許哥而)와 같이 평양 정권 수립에 투입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1937년 강제 이주 이후의 지정학적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1947년 7월 서재필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
    에서 기다리는 정계 지도자들.앞줄 가운데 이승만
    (중절모를 쓰고 정면을 응시)과 김규식(그 오른쪽)
    선생이 담소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의 목소리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중국인민지원군이 6·25전쟁에 개입하면서 커졌다. 하지만 당시에는 스탈린의 비호를 받는 김일성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해외파 공산주의자들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 간 갈등이 더 치열했는데,스탈린은 박헌영 대신 김일성을 최종 낙점했다. 유라시아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 공산당으로 이어지는 국제공산주의연대에 맞섰던 민족 진영'영웅'은 이승만과 김구였다. 김구의 반공사상은 확고했다. 그는'1920년에 창당된 상해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코민테른과 연대하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제안을 받고,"제3국제당의 지도나 명령을 받는 것은 임시정부 헌장에 어긋난다"고 반발했다. 광복 이전까지 김구는 반일·반공 노선을 견지했고, 중화민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귀국을 앞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서 독립운동가 손두환(孫斗煥)은 "이 정부를 조선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내란을 일으키자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나는 조선에도 정권이 있다면 그대로 복종할 뿐입니다. 언제 국내 인민의 정권을 받았소, 잘하려면 어서 사직들 하시오"라고 발언했다. 태평양전쟁 중 임시정부 내에 잠시 존재했던 '좌우 합작'의 이러한 분열상은 이미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에서 노정된 바 있었다. 분열의 사상적 쟁점은 결국 사회당마저도 공산당으로 개명할 것을 요구했던 레닌의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광복 직전 김구가 이끌던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반공 노선에 힘을 실어주었던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내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1923년 하와이에서 발행되던'태평양잡지'에'공산당 당부당(當不當)'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공산 주의 사상의 태생적 문제점들을 논박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한 인물 중에서 이승만만큼 국제적 지명도가 높았던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청년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미국에서 이승만과 경쟁했던 안창호는 1938년,소련에서 활동하던 이동휘는 1935년에 작고했다. 대한제국 시기 이승만을 독립협회로 이끌었던 서재필이 1946년에 이어 1947년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주선 으로 귀국했지만 이미 그의 나이 83세였고, 정치적 공백이 너무 길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공식적 관계를 유지하며 꾸준히 활동했고,1941년 여름 일본이 결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예견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여 미국 주류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1942년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태평양 건너편의 이승만과 일제강점 하의 한국민을 이어주었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 자유 프랑스의 드골이 런던에서 독일군 점령하의 프랑스로 송출되던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던 것과 흡사했다. 이승만을 뒷받침했던 또 하나의'숨은 손'은 개신교 세력이었다. 공산주의에 맞서 이승만은 가톨릭과도 연대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면(張勉)을 중용했다. 1945년 이승만의 귀국은 미국을 선두로 팽창하고 있던 대서양 문명의 최첨단을 상징했다. 그는 단순히 이념적 냉전의 최전선에 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문명 충돌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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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길 광복회 부회장
    "6000里(약 2400㎞) 걸어온 광복군 맞으며… 김구 주석 포함 臨政 각료들 통곡"
    "한반도 침투 준비 중 光復… 감격과 동시에 허망함 느껴"

    광복군 제2지대 출신인 김유길 광복회 부회장이 20일 경기도 군포 자택에서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 제막식'에 참석해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앨범을 보고 있다. /남강호 기자ㅣ
    유길(96) 광복회 부회장은 충칭(重慶)에서 김구 임시정부 주석을 처음 만났던 70년 전을 회고하다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1919년 평양 출생인 그는 일제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탈출을 감행한 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해 11월 교육을 마친 그는 장준하(전 사상계 발행인),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등 50여 명의 대원과 함께 임정이 있는 충칭을 향해 석 달간 6000리 길을 걸었다. "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김 부회장은 주먹을 꾹 쥐고 흔들며 당시 군가를 불렀다. 김구 주석은 장정(長程)을 마친 이들을 "숭엄한 조국의 혼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격찬하며 환영회를 열었다. 이날 연회에서 장준하가 답사에 나서자, 임정 각료들과 광복군 대원,교민 등 150여 명은 눈물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장로교 목사의 아들인 장준하는 성경을 즐겨 인용해서 '장 목사'로 불렸어요. 그가 임정 각료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당신의 발을 씻겨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김구 선생부터 '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시더니 다들 통곡하고 말았죠." 1945년 8월 김 부회장은 중국 시안(西安)의 미 전략정보국(OSS ·CIA의 전신)에서 한반도 침투 작전을 준비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사흘간 훈련을 중단하기에 작전 개시가 임박했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잠도 못 이뤘죠. 그런데 며칠 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는 바람에 감격과 허망함이 겹쳤어요."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전속부관을 지냈던 그는 1945년 12월 이 장군이 이승만 박사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을 들고 귀국했다. 이듬해 귀국한 이범석 장군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 부회장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정계에 투신하는 대신 수원과 부평 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6·25전쟁 동안 미군 통역으로 활동했던 그는 미국으로 유학 간 아들을 따라 1982년 도미(渡美)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소식에'고향 평양에 갈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품고 이듬해 귀국했죠. 일본 유학 3년, 중국에서 3년,미국 생활 14년까지 도합 20년간 해외에서 살았는데,두 시간 반이면 가는 평양만은 못 가네요. 어릴 적에 뛰놀던 대동강변이 아직 그리운데…. 구순 넘으면 자유롭게 왕래하게 해주는 특별법이라도 만들 수 없나요."
    Chosun ☜     김성현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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