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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建國 외교 막전막후

浮萍草 2015. 3. 14. 06:00
    유엔(1948년 파리 총회) '대한민국 승인' 기적 뒤엔… 이승만·張勉 '바티칸 공략 作戰'
    이승만, 바티칸 교황청 의식… 가톨릭 신자 張勉을 대표로 교황 비오12세, 韓 지원 앞장… 부주교는 UN총회 의장 설득 결국 한국만 승인·北은 부결, 6·25 때 유엔군 참전 토대돼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호주·캐나다·인도 세 나라와 시리아가 '한국 분단이 영속화된다'는 이유로 승인에 반대하고 있소. 이들을 막지 못하면 영연방(英聯邦)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중국도 승인을 주저하게 될 것이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1948년 7월 26일자 편지에서 꿰뚫어 보았듯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확고부동한 우방은 없었다. 미국도 대한민국 승인을 유보하고 있었다.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헌 의회에서 이승만은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당시 이 대통령의 눈에 비친 국제 정세는 그야말로'시계 제로'였다. 벼랑 끝에 선 이승만은 그 돌파구를 프랑스 파리 샤이요 궁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 총회에서 찾으려 했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받는다는 전략이었다. "대표단을 이끌고 갈 사람은 장면(張勉)이 될 공산이 가장 크오." 이 대통령은 내각 인선에 앞서 장면을 수석대표로 낙점했을 만큼 유엔 승인 획득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였다. 이 대통령은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그(장면)는 유엔 한국위원회가 가장 쉽사리 동의해 줄 인물이오. 또한 정당인이 아니며 어딜 가나 가톨릭교회의 후원이 있을 것"이라고 썼다. 파리 UN 총회 대표단은 수석 대표 장면,차석 장기영,고문 조병옥과 함께 전규홍·김우평·김활란·정일형·모윤숙·김진구로 구성됐다. 당시 이승만의 '외교적 방점'은 가톨릭교회에 찍혀 있었다.
    광복 이후 가톨릭 교단을 대표해 정계에 진출한 장면을 통해서 바티칸 교황청의 외교적 지원을 기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9월 6일 장면 대표의 손에 쥐어진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1호에는 '바티칸 파견 대통령 특사'라고 명기돼 있었다. 대표단이 뉴욕에 내린 것은 9월 10일이었다. 이들이 선편(船便)으로 대서양을 건너 파리에 입성한 것은 총회 개막 불과 하루 전인 9월 20일이었다.
    1948년 12월 파리 유엔 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외교 대표단. 왼쪽부터 조병옥·정일형·모윤숙·김활란·장면·김진구·김우평·장기영.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제공

    장면의‘1호 외교관 여권’ -1948년 장면 당시
    수석 대표가 파리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발급받은‘대한민국외교관 여권 1호’의 앞면.
    영문으로‘바티칸 파견 대통령 특사’라고 명기
    되어 있다.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제공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3개월이란 짧은 총회 회기만이 아니었다. 한국은 당시 국제 무대에서 무명(無名)에 가까웠다. 12월 7일 초청안이 정식 통과될 때까지 대표단은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는 회기 최종 기한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에 대해 토의를 시작 했다.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도 극심했다. 아랍권 국가들은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뒤,1차 중동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아랍권 국가들은 친(親)서방 신생국인 대한민국의 승인을 내심 반기지 않았다. 게다가 1948년 10월 19일 터진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불안정한 정국과 국론 분열도 악영향을 끼쳤다. 10월 21일자 뉴욕 타임스는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 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만큼 당시 한국은'누란지위(累卵之危)'에 처해 있었다. 1 1월 13일 한국 대표단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소를 참배하며 결의를 다졌다. 12월 12일 장대비가 쏟아진 유엔총회의 마지막 날 오후,회원국 58개국 중 세 나라가 불참한 가운데 표결이 시행됐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물론 중국 공산화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공산권의 세력 확산을 막고 현상을 유지하고자 했던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바티칸의 도움도'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몬티니 바티칸 국무장관과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 대주교에게 한국 지원을 명령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면 대표는 파리 인근 성지 참배 중 호주 출신 오브라이언 부주교를 만나 한국 승인을 요청했다.
    오브라이언 부주교의 도움을 통해서 유엔 총회 의장인 호주 대표 에바트를 설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엔 승인 획득 이면에는 이승만의 외교 전략과 장면 수석 대표의 노력이 있었다. 같은 날 소련이 제출한 북한 승인 결의안은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 선언을 빌미로 '남북 분단의 주범'으로 몰렸었다. 하지만 냉전 붕괴 후 발굴된 새로운 사료는 오설(誤說)을 허물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먼저 북한에 정부를 세울 것을 지시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국민당군에 밀리자,이듬해 5월 스탈린은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해서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면,신생(新生) 대한민국이 4개월 만에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유엔 승인을 받은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특히 상해 임시정부가 치열하게 펼쳤던 승인 외교가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광복 후 연합국이 신탁통치안에 합의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의미는 더욱 컸다.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 투쟁'에서 북한을 꺾고 한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6·25 전쟁 때 유엔군 파병을 이끌어 내는 든든한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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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前총리 아들 장익 주교
    "初代 美대사 된 아버지(張勉), 車·사무실도 없이 가방 2개 들고 시작"
    유엔 총회 끝나자마자 발령 렌터카·택시로 '발품 외교'… 3개월새 33개국 승인 따내

    김성현 기자
    면 수석 대표는 1948년 파리 유엔 총회가 끝난 뒤 방미(訪美) 도중에 미 국무부 직원에게 전보 한 통을 받았다.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잠시 대기하고 있으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였다. 까닭을 알 길이 없어 어리둥절하던 그는 다음 날 숙소로 몰려든 기자들 질문에 또다시 놀랐다. "초대 주미(駐美) 대사로 발령받은 소감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제2공화국 당시 총리를 지낸 장면은 그렇게 고국 땅을 밟지도 못한 채 초대 주미 대사 임기를 시작했다. "방미(訪美) 당시 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던 건 가방 두 개가 전부였어요. 사무실도,승용차도 없는 상태에서 신발창이 닳도록 워싱턴 주재 각국 대사관을 찾아다녔죠." 장면 전 총리의 아들인 장익(82·전 천주교 춘천교구장) 주교는"부임 직후 아버지는 각국의 국가 승인을 얻어내는 일에 집중했다. 그 결과 한국은 불과 3개월 만에 33개국 승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장면 대사는 전용차가 없다 보니 시간당 5달러씩 하는 자동차를 빌려서 워싱턴 외교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각국의 관저를 나설 때쯤이면 세를 냈던 차량은 대여 시간이 끝났다는 핑계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비라도 내리면 장 대사는 비를 맞으며 택시를 잡았다. 장 주교는"그렇게 발품으로 얻은 각국의 승인은 6·25 당시 UN군 참전의 '외교적 발판'이 됐다"고 말했다. 장 주교는 미국 메리놀 대학과 벨기에 루뱅대,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신학대학원,로마 그레고리안대 철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는 교황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장 주교는 또 1968년부터 40여년간 비서 신부 등으로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을 보좌했다.
    아버지인 장면 전 총리와 그가 보좌했던 김 추기경은 사제(師弟) 관계다. 김 추기경이 동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교장이 장면 전 총리였다. 당시 일제(日帝)가 모든 학교에'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문제를 냈을 때 김추기경은]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므로 소감도 없다"고 썼다. 이 답안을 받아든 장면 교장은 남들 보는 앞에서 김 추기경의 따귀를 한 대 때렸지만 사건 직후 김 추기경에게 일본 유학을 추천했다. 학생을 벌주는 모양새를 취하면서,퇴학이나 폐교 같은 불상사를 막은 것이었다. 장 주교는"훗날 김 추기경께서는'교장 선생님이라면 속을 털어놓아도 될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썼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Premium Chosun ☜     춘천=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danp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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