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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격동의 롯데그룹(3)

浮萍草 2015. 2. 3. 10:14
    동생들과 숱하게 소송하고 싸운 신격호 롯데회장
    난 1996년 7월 롯데그룹 홍보 책임자였던 모 임원이 필자를 찾아와 하소연을 겸한 괴로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당시 롯데그룹 회장인 신격호 회장과 그의 막내 동생인 신준호 그룹 부회장 형제가 한창 재산 분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이 임원은 자신이 롯데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신 부회장의 배려 때문이었는데 그 분의 반대편에서 논리를 펴야하는 입장이라 난감하다는 취지였다. 
    이때부터 근 4개월 동안 신 회장 형제의 재산싸움은 연일 신문지상을 도배하며 일반인들을 식상케했다.
    문제의 발단은 1995년 6월 ‘부동산 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면서 그동안 명의 신탁했던 땅을 원래 주인인 신격호 회장으로 명의변경하면서 비롯되었다. 
    신격호 회장은 신준호 회장 명의로 신탁해 두었던 서울 양평동의 롯데제과 부지 3600평과 경남 김해시 진례면 임야 1만평 등 전국 7곳의 토지 37만평을 회사 명의로
     변경하려 했다. 
    일본에서 벌어들인 자본으로 부친과 동생들의 명의를 빌려 땅을 샀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 하기전이라 어쩔 수 없이 부친과 동생 명의를 빌려 땅을 샀다는 얘기였다. 
    반면 신준호 회장은 양평동 땅은 ‘아버지에게 직접 물려받은 땅’이라며 신격호 회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에 신격호 회장은 격노하였고 1996년 7월 신준호 회장을 상대로 서울지방법원에 ‘명의신탁 해지로 인한 소유권이전 등기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신격호 회장은 신준호 회장을 그룹의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킨다. 
    신준호 회장 역시 형과 정면으로 맞서며 여론전과 법적 공방을 벌였다. 
    4개월 가까이 간 법적 공방에서 신준호 회장은 완패하고 말았다. 
    1심 법원에서 신격호 회장의 자금으로 산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신준호 회장은 항소를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형으로부터 유제분 업체인‘롯데햄 우유’를 분가.’프르밀’이라는 브랜드로 독자 사업의 길로 나섰다.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가 설립되면서 롯데제과 전무로 입사한 신 부회장은 당시만해도 롯데그룹 내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형과 나이차가 많아 신 총괄회장측은 아들처럼 돌봤다고 전할 정도였다. 
    신 부회장은 롯데제과 대표,롯데칠성 대표,롯데냉장 대표,롯데물산 사장,롯데건설 사장,롯데햄우유 부회장,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등 그룹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오늘의 롯데그룹을 만드는 일등 공신이었다.
    신격호 롯데 회장의 형제 관계./조선 DB

    이 형제간 분쟁이 있은 한참 뒤에 신격호 회장 가족중 한 사람은 필자에게“양평동 땅은 신준호 회장 소유가 맞다”고 주장했다. 신 총괄회장의 아버지 신진수(1973년 작고)씨가 막내 아들을 위해 사준 땅이었다는 얘기다. 신 총괄회장의 부친은 부자이면서도 부자 티를 내지 말라고 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고향(경남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선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1963년 한일 국교 정상화전 신격호 회장이 바로 아래 동생인 신철호씨 명의로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땅을 매입했다고 신 총괄회장의 손을 들어 주면서 그 공방은 막을 내렸다. 신격호 회장은 그 보다 훨씬 전인 1966년 바로 밑에 동생인 신철호씨와 재산싸움을 한 적이 있다. 롯데제과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던 둘째 동생 신철호씨가 롯데 화학공사를 설립하기 위해 형 신격호씨와 셋째 동생 신춘호씨의 도장을 위조해 회사공금 4억 2천여 만원을 가로챘다고 고소하면서 분쟁을 벌였다. 이는 동생의 횡령사실을 법원에서 인정하면서 마무리됐지만 이후 신철호씨는 영영 롯데 근처에 발을 끊어야 했다. 다음이 그 유명한 신춘호 농심 회장과의 ‘라면전쟁’이다. 신춘호 회장은 1960년대 초 중반만 해도 형들에게 가려 롯데그룹 내에서 그리 큰 존재가 아니었다. 신격호 회장은 바로 밑 동생인 신철호 사장을 얼굴로 내세워 한국롯데를 이끌게 했다. 이때 신춘호 회장이 라면사업을 시작할 것을 신격호 회장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신 회장은 냉정히 거절했다. 한국인에게 라면이 안맞는다는 식습관과 이미 ‘삼양라면’이라는 브랜드가 독점하고 있어 힘들다는 논리로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신춘호 회장은 롯데공업사라는 별도 회사를 차려 라면 사업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형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1971년 스낵의 대명사로 불린 ‘새우깡’을 탄생시키면서 서서히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이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카피로 유명한 ‘농심라면’을 내놓아 대박을 쳤다. 그러나 신격호 회장은 그 모습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신춘호 회장에게 한국에서 라면사업이 되겠냐며 극구 반대했던 일과 롯데공업이 스낵 음료 등 사업영역을 확장하자 동생인 신춘호 회장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격호 회장은 급기야 신춘호 회장의 롯데공업에서 ‘롯데’라는 브랜드를 사용하지 못하게 ‘몽니’를 부렸다. 이에 신춘호 회장은 더 이상 롯데공업 사명을 사용치 않고 대박을 쳤던 농심라면을 떠올려 1978년 사명을 (주)농심으로 변경하며 롯데라는 울타리를 벗어 나왔다. 이때부터 신격호 회장과 신춘호 회장은 평행선을 그으며 사이는 멀어져만 갔다. 또한 신격호 회장은 나이차만 무려 24세가 되는 막내 여동생과도 얼굴을 붉힌 바 있다. 롯데그룹이 2007년 일본 JTB와 합작으로 ‘롯데JTB여행사’를 설립하면서 막내 여동생인 신정희씨와의 갈등으로 비화됐다. 동화면세점과 롯데관광을 운영하고 있던 신정희씨는 갑작스럽게 롯데그룹이 여행업계에 뛰어들면서 난감해지고 말았다. 롯데관광은 신격호 회장의 허락 아래 롯데라는 명칭과 롯데 심벌마크만 사용하고 있을 뿐 롯데그룹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회사였다. 그러나 롯데그룹이 새로운 여행 사업에 진출하면서 롯데관광이 사용하고 있는 롯데 심벌마크와 롯데라는 명칭 사용의 중지를 요구했다. 하지만 신정희씨는 이를 거부했고 신격호 회장은 서울지법에 롯데 심벌마크 명칭 사용을 중지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신정희씨는 “신격호 회장의 동의를 얻어 30년간 롯데마크와 이름을 사용해 왔다”고 주장하며“롯데그룹이 새로 관광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이라고 맞받아 쳤다. 결국 법원의 판결에 따라 현재 롯데관광은 롯데마크 사용은 중지하고 롯데라는 명칭만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롯데가의 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번에 신격호 총괄회장이 장남인 신동주 일본 롯데 부회장을 전격 해임함으로써 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에 신경을 쓰는 것도 이러한 가족간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일컫는 피터 드러커 박사는 ‘가족과 기업이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기업이 가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기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기업이 가족을 위해 일하는 순간 가족과 기업 둘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Premium Chosun        홍성추조선일보 객원기자 sch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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