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24 양녕대군, 17세부터 닥치는 대로 여인들에 '갑질 섹스' 행각으로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 당해

浮萍草 2015. 1. 19. 12:11
    1. 조선 태종은 재벌 창업가들 보다 몇 백배 힘들게 국가경영권을 획득
    종 이방원은 지금의 재벌 창업가들보다 수백 배의 뼈를 깎는 아픔을 안고 조선의 국가경영권을 확보하였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죽이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것을 뿌리치고 어린 두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뿐 아니라 방석을 지지하는 개국 공신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동복 형 방간도 귀양 보내면서 왕위 계승권을 어렵게 확보하였다. 
    왕이 된 후에는 경영권에 위협을 주는 세력들을 다 죽였다.
    태종이 왕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처남 민무구의 네 형제들(원경왕후의 친 동기들)의 세력이 커지자 모두 죽여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와 원수가 되었다. 
    원경왕후는 남편에게 친동기들 네 명이 모두 살해당하자 울화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태종의 국가경영권 확보와 유지는 지금 재벌들의 노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어렵게 확보한 국가경영권인 만큼 태종은 그것을 장남 양녕대군(이름: 제)에게 꼭 물려주고 싶었다.

    2. 양녕대군 세자 자리 유지위해 죽어가는 외삼촌들 외면하고 욕해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1394년 출생하여 11세 때인 1404년 세자에 책봉되었다. 양녕대군은 詩와 書에 능했다. 아래 그림 숭례문과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의 것이었으며 그는 13세 때인 1407년 중국에 하진표사로 파견되어 임무를 잘 마치고 돌아와 차기 대권계승자의 자질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 후 그는 부왕의 내정에도 참여하여 주요한 국무를 대신들과 무리 없이 의논도 하여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하여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부친이 왕이 되기 전 당시의 관습대로 외가인 원경왕후 민씨(민제의 딸)의 친정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기 때문에 외삼촌인 민무구 형제들과 친하였다. 민무구 형제들이 태종에 의해 죽게 되자 조카인 세자 양녕대군에게 목숨을 부탁하였으나 세자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냉정하게 거절함은 물론 외삼촌인 민씨 형제들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렇게 양녕대군은 왕위 계승권 보전을 위해 외삼촌들이 무참하게 죽는데 일조를 했다.

    3. 17세 때부터 마음에 드는 여인들 닥치는 대로 갑질 간통해
    양녕대군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사냥과 잡기에 소질이 있었다. 아래는 조선 시대 규장각에 있는 소현세자의 하루 일과를 표로 만든 것인데 보통 사람은 감당하기에 매우 엄격하고 고된 일과임을 알 수 있다.

    세자는 공부에 대한 평가도 받는데 평가 성적은 5등급으로 되어 있고 왕에게 보고된다. 절제된 생활을 싫어하고 잡기에 능한 양녕대군은 세자로서 지켜야 할 일과를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다. 절도가 부족한 그의 일상생활은 사부인 좌빈객 이래에 의해 부왕 태종에게 상세하게 보고되었고 부왕은 틈만 나면 세자를 나무랐으나 세자로서의 지위는 위험하지 않았다. 세자가 부왕으로부터 본격적인 질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여색을 밝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세자는 예쁜 여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누구의 여자인지 가리지 않고 탐하고 대궐 담을 넘어 사가에 침입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관계를 맺었다. 문제는 상대 여자들이 대부분 남편이 있는 유부녀여서 섹스에 응하려 하지 않자 국가 서열 제2인자인 세자라는 막강한 지위를 이용하여 강권으로 섹스를 한 것이다. 즉 요즘 말로 전형적인 갑질의 섹스 행각이었다. 4. 부왕 친형인 상왕의 첩과 친매형의 첩과도 성관계 맺어
    세자 양녕대군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나 고등학생 나이인 17세 때(1410년)에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장에서 본 봉지련이라는 기생에 반해 대궐로 끌어들여 주연을 베풀며 간통을 했다. 이에 태종이 동궁전의 환관들을 잡아가자 세자는 단식투쟁을 하며 부왕에게 저항해 풀어 주었다. 세자는 부왕의 부드러운 처사에 더 대담해져 창기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섹스 행각을 벌였다. 그것도 부족해 세자는 장안의 악공 및 한량들과 예쁜 기생들을 물색하고 다니다 1414년 초궁장이라는 기생을 만나 대궐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왕 친형인 상왕(태조의 차남인 2대 정종)의 기생 첩이었다. 상왕의 여인이라도 현재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세자가 달려드니 몸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초궁장이 백부의 기생 첩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어쨌든 자기 장남이 백부의 여인과 섹스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태종은 창피하기도 하지만 우선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었다. 태종은 초궁장을 대궐에서 내 쫓았다. 그 후 1416년 양녕대군은 친 매형 이백강(태종 장녀 정순공주의 남편)의 첩 칠점생을 노렸으나 동생 충녕대군(후에 세종)의 강력한 만류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대궐 밖에서 매형의 첩 칠점생과 통간하였고 다시 정종의 기생 첩 초궁장과 섹스를 했으나 자신에게 큰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양녕대군을 모시는 주변 사람들과 상대 여인들은 모두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리더 한 사람의 잘못이 그 부하들에게 고통과 수난을 초래하는 것은 옛날이나 요즘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의 경우나 흡사하다. 5. 대신 곽선의 첩 어리, 양녕대군 아이 낳아
    1417년 세자 양녕대군이 장안의 뛰어난 미색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어리와 정사를 나누면서부터 사건은 심각해져 갔다. 양녕대군의 여자 조달책인 악공 이오방이 前 중추 곽선의 첩 어리를 양녕대군에게 소개하려 하자 어리는 자기는 유부녀이며 몸에 병이 있다 하면서 강력하게 거절 하였다. 아래는 어리의 모습이다.
    곽선의 첩 어리(TV캡처

    이에 세자는 부하들을 시켜 어리를 대궐 밖에서 납치하여 성폭행한 후 세자궁으로 강제로 데려와 동거했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의 분노는 하늘을 찔러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내쫓으려 했으나 대신들이 만류하고 빈객(세자교육담당 정2품,장관급) 변계량이 대신하여 작성한 세자 반성문의 맹세가 지극하여 태종은 감동을 하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다. 그런데 세자는 맹세한 지 겨우 3개월도 안 되어 장인 김한로(광산군,찬성)의 노비를 통해 방유신의 손녀가 미녀라는 얘기를 듣고 방유신 집으로 가 강제로 그녀와 간통하였다. 그리고 다시 몰래 어리를 대궐로 불러들여 급기야 어리는 임신을 하였고 세자빈의 조모가 어리를 몰래 대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아이를 낳게 했다. 세자빈 조모는 손녀사위가 바람피워 생긴 아이를 챙겨야 하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으나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불안 공포에 떨기만 했다. 어리가 출산한 후 세자는 다시 어리를 대궐로 데려와 동거했다. 1418년 5월 태종이 이 사실을 알고 대로하여 세자를 개경(당시 태종은 개경 궁에 있었다)에서 한양 궁으로 내치고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쫓았고 세자 장인 김한로는 나주로 유배 보냈다. 세자빈은 섹스에 미친 남편을 김한로는 골동품 사위를 잘못 만나 생긴 고통이고 수난이었으나 하소연 한마디 할 수 없었다. 6. 양녕대군 부왕에게 “전하도 여색 즐기는데 나도 여색 즐겨야”
    사건이 이렇게 확대되자 양녕대군은 이제 세자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 부왕에게“전하는 여인들을 궁에 마음대로 들이는데 왜 내 계집은 내쫓습니까? 저는 앞으로도 여색을 즐기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읽은 태종은 하도 기가 막혀 더 이상 할 말을 잊었다. 세자는 전혀 후회와 반성하는 마음이 없었다. 태종은 세자가 부왕을 욕하면서 항명을 하는 중대사라 생각하며 세자를 폐위하기로 결심했다. 1418년 6월 태종은 대신들을 소집하여“여색에 빠져 그릇 행동하는 자에게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줄 수 없다” 하면서 세자를 폐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유정현 등 대신들이 순서를 따지지 말고 가장 어진 왕자로 세자를 다시 정하라 요구했으나 원경왕후가 극렬하게 반대하여 태종은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3남 충녕대군을 세자로 정하였다. 양녕대군은 14년간 세자 자리에 있었다. 아래 표는 세자시절의 양녕대군 갑질 여색 행각을 표로 요약한 것이다.

    7. 태종 양녕대군 세자에서 폐한 후 통곡해
    태종은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3남 충녕대군(이름: 도)을 세자로 새로 정하고 나서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었다. 그만큼 장남을 사랑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든 장남에게 국가 경영권을 넘기려 하였으나 장남의 자질 부족으로 국가를 위해 결국 포기하였다. 대신 세자의 장남인 장손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나이가 5세밖에 안 되어 세손 책봉 후 자신의 건강이 악화 될 경우 정국이 불안할 것 같아 결국 총명하고 품성이 어진 3남 충녕대군(당시 22세)에게 국가경영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새 세자는 세종이 되어 한글 창제 등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이루었다. 태종의 뼈아픈 눈물의 결단이 없었다면 주색잡기에 빠진 양녕대군이 왕이 되어 조선은 초기부터 썩어가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의 한글도 없었을 것이다. 양녕대군이 총명한 충녕대군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적 근거가 약하다. 양녕대군은 폐세자된 후 동생 세종의 배려 속에 전국을 돌며 기생들과 놀았다. 그는 수양대군(7대 세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되는데 적극 협조를 하여 세조로부터 극진한 대접과 보호를 받으며 살다가 1462년 69세에 죽었고 남긴 자녀는 총 26명에 달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자 이흔의 15대손이었고 연예인 이승기도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8. 조직의 경영권 승계에 대한 연구 시급해
    국가, 기업, 학교 등 모든 조직의 경영 후계자 결정은 조직의 의사결정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조직의 경영자가 조직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하기 때문이다. 조선 9대 성종은 태종과 달리 심리 상태가 불안하고 자질이 부족한 연산군에게 어미 없는 불쌍한 아들이라고 인정에 끌려 국가경영권을 물려주었다. 그 결과 연산군 시대 내내 피바람이 몰아쳐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국가는 피폐할 대로 피폐하였다. 부자 자녀는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약해져 부자가 3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옛날부터 내려온다. 고귀한 왕자로 성장한 세자가 자질 부족이 될까 우려되어 조선 왕조는 국가경영권을 물려받을 세자에게 매우 엄격하고 강도 높은 교육을 했다. 요즘 재벌기업과 기타 주요 조직 등의 창업 3세들도 귀하게 성장해 경영권 계승 자질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런 중요한 큰 조직들이 망하면 국가 발전과 존립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이제 한국의 재벌기업 등 대형 조직의 경영권 계승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여 유능한 인재가 조직 경영권을 승계하게 하는 제도나 문화가 형성되도록 해야 어려운 경제상황도 해결되고 더욱 부강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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