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26 조선은 과거합격자들 갑질 만행 천국, 황진이와 장녹수도 갑질 성관계로 출생

浮萍草 2015. 3. 1. 12:32
    1. 과거실시는 기득권자를 제거하려는 고려 4대 광종의 혁명적 사건
    려 태조 왕건은 개성의 호족출신으로 후백제의 견훤과 장기간의 전쟁에서 어렵게 승리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는 29명이나 되는 호족의 딸들과 정략적으로 결혼하여 29명의 부인들이 있게 되는데 그 많은 부인들과 함께 부부 생활하느라고 고충도 많았을 것이다. 왕건과 정략 결혼관계를 통하여 세력을 형성한 호족들은 새 왕조 고려에서 단단한 기득권 세력이 되어 왕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왕건의 뒤를 이은 2대 혜종(둘째 왕후 나주 오씨의 아들)과 3대 정종(셋째 왕후 충주 유씨의 큰 아들)이 죽은 뒤 정종의 동복동생인 4대 광종이 즉위를 했다.< 광종은 야심이 많고 총명하여 아버지 왕건도 생존 시 칭찬을 많이 하였다. 그는 왕이 된 후에 7년간은 호족들과 충돌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956년 기습적으로 노비안검법(호족들이 불법과 강제로 노비로 만든 자들을 양민으로 함)의 혁명적 개혁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권세를 약화시켰다. 왕의 자리와 목숨을 걸고 단행한 혁명적 개혁이었다. 노비안검법 실시 2년 뒤에 시행한 또 다른 혁명적 개혁 사건이 과거의 실시다. 광종 때 최초로 실시한 관료선발시험인 과거시험은 호족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대 사건이었다. 호족들의 아들들은 관료직을 세습하여 대대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과거시험 시행은 관료직의 세습권을 박탈하는 대사건으로 중세 때 전 세계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만 실시한 좋은 관료 선발제도였다.
    개혁 군주로 과거를 처음 실시한 고려 4대 광종

    2. 개혁 주역에 고려 인맥 없는 외국인 임명해 전격적으로 과거실시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인 958년(광종 9년)에 전격적으로 문신 관료 선발을 위한 과거시험을 단행했다. 광종은 개혁의 주역을 고려인들에서 선택하지 않고 중국인(후주) 쌍기를 선택하였다. 고려 지식인들은 호족과 귀족세력에 연결되어 있어서 개혁의 주역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해 고려에 전혀 인맥이 없는 중국 지식인 쌍기를 고용한 것이다. 쌍기는 중국 후주에서 과거시험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이라 아주 적격이었다. 지금의 정부는 물론 기업도 본 받아야 할 人事였다. 쌍기를 높은 관직인 한림학사 겸 지공거에 임명하는 것에 대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심했으나 광종은 강행하였다. 지공거는 지금의 사시,행시 등 고급공무원 임용고시 총책임자로 장관급인데 고려에 살아 보지도 않았던 중국인을 전격 임명하여 전권을 주었으니 당시는 물론 지금도 상상도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임명이었다. 광종은 그 후 쌍기의 부친 쌍철 등 여러 중국 지식인들을 고려에 귀화시켜 고려 조정을 개혁했다. 광종 때 과거시험에는“나라를 다스리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논제의 문제도 있었다. 이렇게 과거제도를 통해 국가를 개혁할 인재를 선발하려는 고려 초의 강한의지로 서희와 강감찬 같은 명신들이 배출되었다. 광종의 목적대로 과거 실시 이후 학문이 중흥되고 학교가 설립되어 유교적 기풍의 관료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학을 공부하여 忠과 孝 사상으로 무장된 관료들이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 이러한 변화와 개혁은 고려가 전제군주제의 왕권국가로 가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고 고려는 공부를 많이 하는 자들이 관료가 되는 국가가 되어 최충,이제현,이색 등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과거합격자 서희 동상(좌)과 강감찬 동상(우)

    3. 조선 창업은 이성계와 과거합격자들의 조인트 벤처이며 종교혁명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함경도 호족의 아들로 약 10 만 대군의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했을 때 단 2,000명의 병력으로 적장들을 죽이고 개경을 탈환한 공으로 27세에 전격적으로 동북면 병마사(군단장급)가 되었다. 과거합격증 없이 중앙에 진출한 시골 무장인 그는 출세를 위해 중앙의 인물들과 네트워크가 필요해 개경의 과거합격자 지식인들과 인맥을 맺으며 세력을 형성했다. 그 지식인들은 주로 성리학을 공부한 문신 관료들로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이성계는 군사력은 있었으나 새 나라를 창업할 이념과 철학이 부족해 성리학을 공부한 정도전,조준,배극렴,남재 등 24명의 과거에 합격한 신진사대부들을 참여시켜 건국이념과 통치철학을 만들었다. 이렇게 조선은 군사력의 소유자 이성계와 고려 말 과거합격자들인 신진사대부들과 합작해서 창건된 국가조직이어서 왕권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조선말 정조 사후 왕은 외척 세력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 수준 정도로 전락했다. 고려 말 사대부들 중 정몽주와 이숭인 등은 이성계의 건국에 반대해 죽었으나 정도전,하륜,윤소종,남재,조준,권근 등은 조선건국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고려의 과거합격자들이어서 조선은 고려의 과거제도를 보완 강화하여 받아들였다. 이들은 불교는 혹세무민하고 국가와 백성 경제에 해만 끼치는 종교이므로 타파해야 하고 유학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이성계도 이들과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배불숭유를 기본적인 국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국가와 왕실은 물론 전 백성이 약 1,000년 동안 믿어왔던 불교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유학사상의 통치 국가로 창설된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대대적인 종교혁명 국가였다. 이로써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공부하는 양인(良人)이 과거를 합격하여 출세를 하는 국가로 출발하였다. 4. 과거합격증은 갑질 허가증, 양반들 종년 겁탈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쉬워
    고려의 과거제도를 개선 강화하여 받아들인 조선은 개국 이후 500여 년 동안 유학사상의 문무 관료들을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했다. 조선은 양반인 동반(문신)과 서반(무신) 모두 과거를 통하여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성리학과 문사철을 중시하는 조선이기에 동반인 문신들이 권력을 독차지 했다. 물론 공신 자제 등이 과거에 합격 않고 음서로 임용은 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인사였다. 조선 초에는 양인도 과거를 보아 양반이 될 수 있었다. 과거합격 없이는 특별한 경우 아니면 양반이 될 수 없어 양반은 자기 실력으로 획득하는 계급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잦은 정변으로 공신들이 많이 배출되어 양반은 자녀들에게 세습되는 신분이 되었다. 이 양반이 세습된 후에도 과거합격을 하고 벼슬길로 나가야 떳떳한 양반 사대부가 될 수 있었으므로 과거합격은 신분유지와 상승에 매우 중요했다. 사(士)는 5품 이하 관료이고 대부(大夫)는 4품 이상 관료인데 당상관 정3품 통정대부이상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들 사대부들의 특권에 대해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에“과거 문과에 합격해 사대부로 진출하면 온갖 재물이 다 생기니 과거합격증이 바로 돈 자루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양반들은 이웃집 소도 제집 소처럼 부릴 수 있고 동네 사람들을 붙잡아다 제집 밭일도 시킬 수 있었다. 또한 양반들의 종년 겁탈은 누운 소를 올라타는 것보다 쉽다고 했다.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와 천하 명기 황진이도 양반들의 갑질 성관계에 의해 태어난 불행한 여인들이었다. 이렇게 양반 사대부들은 섹스에 관해서도 갑질 허가증을 갖고 있었고 역모와 관련된 죄가 아니면 속전(贖錢)으로 처리되거나 가노(家奴)가 대신 받았고 병역 의무도 없었다. 요즘 같으면 재벌 가족이 죄를 지으면 부하 직원이 대신 교도소 가서 복역한다는 뜻이다.
    행차하는 양반에게 큰절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좌)과 신윤복이 그린)대낮에 기생 품고 노는 양반 그림(우)

    5. 과거합격 신고식에서는 합격자 얼굴에 똥과 미친 여자 오줌도 발라
    과거합격하면 그에 대한 신고식을 해야 하는데 거창하고 대단했다. 신고식은 갑질 허가증 취득에 대한 대가를 치루라는 뜻과 합격자의 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신고식은 면신례(免新禮) 또는 신래침학(新來侵虐)이라 했는데 삼정승, 육조판서의 고관대작부터 말단관리까지 집으로 초청하여 술과 뇌물로 대접하는데 약 1개월 소요되었다. 매일 거행되는 신고식에서 계속 따라 주는 벌주를 먹다가 견디지 못해 그렇게 원하던 벼슬도 못하고 죽은 한 맺힌 과거합격자도 있었다. 신고식에서 합격자 얼굴에 똥이나 미친 여자의 오줌을 바르는 등 각종 고통과 모멸을 가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뇌물을 주어야 했고 돈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뇌물을 만들어야 하므로 대부분 과거합격자들은 부채를 짊어져야만 했다. 이들은 관직에 나가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갑질을 해야만 부채도 갚을 수 있었고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 조선의 백성들은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고 국가 경제력과 국방력은 피폐해져 결국 조선은 멸망했다.
    이두호가 그린 조선시대 면신례(신고식)의 모습

    6. 과거합격 위해 땅굴 파서 답안지 넘겨주고 대리시험도 시켜
    갑질 허가 취득을 위한 과거합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온갖 부정행위를 다 저질렀다. 1) 대리로 시험 답안을 써주는 것< 2) 남의 답안 베끼기 3) 이미 낸 답안지를 다시 가져와 시험장 밖으로 보내 수정 작성해 다시 제출 4) 합격 답안지와 바꿔치기 5) 시험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답안 작성하여 보내기 6) 과거 합격을 위한 뇌물 제공: 이로 인해 뇌물 중개업도 성업 7) 콧속에 컨닝 페이퍼 숨기고 시험장에 들어가기 8) 붓대 끝에 컨닝 페이퍼 숨기고 시험장에 들어가기 9) 하인들이 시험장으로 들어가 책을 전달하는 것 10) 시험장 밖에서 답안을 작성해 땅굴을 파서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내기
    또한 응시자 수도 많아 답안지가 2천 장 이상 될 경우가 흔해 일몰 전에 전체 채점이 불가능해 일부만 채점되었다. 통상 먼저 제출한 답안지가 우선 채점되므로 합격 가능성이 높아 빨리 답안을 제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빨리 답안지를 내려고 몰려들어 밀치며 주먹질을 하여 넘어져 밟혀 죽은 응시자도 있었다. 권문세가 아들들은 힘 센 하인들을 시켜 시험장 맨 앞 좋은 자리를 미리 잡아 놓은 다음 글 잘하는 사람들을 몇 명 데리고 들어가 답안지를 상중하 3단으로 나누어 함께 작성해 답안지를 제일 빨리 제출했다. 권세 없고 가난한 아들들은 죽어라 공부하고 아무리 총명해도 도저히 합격할 수 없었다. 각종 부정행위들을 종합적으로 돕기 위한 전문팀들이 과거 시험장에 활보하였고 시험장 안과 밖은 싸움질하고 돌을 던지고 고성을 지르는 등 도떼기시장보다 더 혼잡했다. 과거는 국가 인재 선발이라는 주목적은 없어지고 권문세가 아들들에게 갑질 합격증 주기 위한 것으로 타락되어 조선은 급속히 망해 갔다.
    김홍도가 그린 조선 후기 혼잡스런 과거 시험장(좌), 1890년대 조선 서민 여성(우)

    7. 경제적 강자의 갑질은 경제적 약자로 하여금 좌파 세력을 찾게 해
    조선시대 관료들의 만행과 부정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198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다. 당시 고급 관료들의 권한은 막강했고 부정부패도 만연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고시에 합격하면 출세와 갑질 행위가 보장되어 동네에서 고시 합격자에게 아부하느라 잔치를 해주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지금 민주화가 이루어진 한국에서 공무원 갑질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경제 발전으로 기업 규모가 커지고 고소득자가 증가하면서 경제적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새로운 갑질이 우리 사회의 중요문제로 대두되었다. 경제적 강자의 약자에 대한 갑질이 성행하면 경제적 약자들의 수는 증가하면서 그들은 더욱 빈곤하게 되고 인권침해도 당해 베네수엘라 국민들처럼 그들을 구원해 주겠다는 좌파 세력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그 때부터 우리 미래는 암담해 질 수 밖에 없다. 이제 기득권자들은 약자들에 대한 갑질을 멈추고 함께 상생,번영하는 길을 택해 약자들이 좌파 세력을 선택하지 않도록 해야 한국의 미래가 밝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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