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22 기생 출신 거부 김만덕(上)

浮萍草 2015. 1. 5. 21:35
    기생 시절 네트워크를 활용해 1년만에 100억원 이상 번 미녀 재벌
    
    1. 장사로 번 거액의 전 재산을 바친 절세 미인 노블리스 오블리주
    미인 거부 김만덕.
    사진=김만덕 기념관
    한항공(주) 조양호 회장 장녀인 조현아씨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재벌 자녀들의 행동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부자이면 교만해지기 쉽고 스스로는 돈 한번 못 벌어 보고도 보통 사람들과 부모 조직의 구성원들을 우습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조선 영조와 정조 때 제주도에 고아 출신 기생이 남성만이 하는 객주를 여인의 몸으로 창업을 하여 큰돈을 번 절세미인 김만덕 거부가 있었다. 그녀는 고아시절에 겪은 고통을 생각하여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도왔다. 제주도에 흉년이 계속되어 많은 제주도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자 김만덕은 전 재산을 다 털어 제주도민들을 기아선상에서 구하였다. 그녀는 지금의 재벌급 부자였고 절세미인이었지만 겸손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 주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진정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김만덕은 부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배워야 할 한국의 대표적 여성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2. 상인의 딸로 태어나 12세에 고아가 된 후 기생의 수양딸 되어
    김만덕은 1739년 영조 15년에 중개상인 부친 김해 김씨 김응렬과 모친 고씨의 딸로 제주도 구좌읍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김만덕이 12세 때인 1750년에 전라도로 장사를 갔다가 폭풍을 만나 물귀신이 되었고 모친도 당시 돌던 전염병으로 그해 사망했다.
    김만덕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 외삼촌댁으로 가서 일을 하며 겨우 목숨을 이었는데 외삼촌이 죽자 외숙모에게 하루 도토리 한 알 정도의 밥을 얻어먹으면서 매일 중노동에 학대를 당하다가 우연히 부자 제주 기생 월중선에게 돈 몇 푼에 팔려갔다. 월중선은 한눈에 어린 김만덕의 짙은 쌍꺼풀눈과 훤칠한 미모,성품이 마음에 들어 기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월중선은 어린 김만덕의 미모는 물론 착하고 단정한 행실이 마음에 들어 수양딸로 생각하고 대해 주어 이때부터 김만덕은 하얀 쌀밥 세끼를 먹게 되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박연옥의 한국 미인도에 그려진 김만덕

    3. 고관들 만덕 보려고 제주목사 자원, 어사는 만덕 미모 때문에 왕명도 잊어
    김만덕의 수양모 월중선은 13세 만덕이 노래와 춤 등 기예에도 출중한 것을 보고 그녀를 제주 최고의 기생으로 키울 욕심이 발동하여 제주 관아에 관기로 적을 올렸다. 김만덕은 평민의 딸임에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생이 되었으나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에 따라 기생 수업을 열심히 받았다. 15세가 지나서는 노래, 악기, 춤, 예의범절 그리고 시와 그림 등 모든 면에서 제주 최고의 기생이 되었다. 그녀에 관한 소문은 육지에도 알려져 어떤 사대부는 김만덕을 보기 위해 육지의 높은 수령직 대신 제주목사로 좌천 발령을 원했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중앙정부의 감찰관이 자주 감찰하러 내려와 제주 목사에게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감찰관의 마음을 녹여 놓으면 제주 목사는 감찰도 잘 받고 승진의 기회도 생길 수 있었다. 배비장전에서 보듯이 제주도에는 관리들을 유혹하는 관기들이 많았는데 제주 목사는 행실이 단정한 김만덕을 선택하여 미인계로 활용하려고 기생으로보다는 예인 으로 우대하였다. 영조 때 왕의 밀명을 받은 한 안찰어사가 제주에 왔는데 한 달간 김만덕의 미모와 기예에 완전 빠져 왕명을 잊고 임무 수행을 못한 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떠나면서 “만덕아! 너는 황진이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아 내가 너한테 홀려 죄인이 되었다” 하면서 선물을 주고 이별을 아쉬워 했다. 그런 칭찬 속에서도 김만덕은 본래 양인의 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생 생활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제주판관 부인에게 귀중품 등을 바쳐 그 부인이 남편인 제주 판관을 움직이게 하여 10년 만에 기적에서 제명되는 판정을 받아 24세에 양인이 되었다.
    객주 김만덕과 몰려든 상인들./사진=김만덕 기념관

    4. 상인이 된 김만덕은 미모와 기예, 기생 네트워크를 사업 무기로 활용
    1762년 24세에 양인이 된 김만덕은 평소 잘 알고 있던 외가 친척 객주(조선시대의 종합 중개 상인) 고씨의 도움을 받아 제주 여인으로는 처음 객주를 창업했다. 예로부터 여성의 미모와 기예는 남성에게 강력한 무기였고 김만덕은 기생 생활을 통해 남성들 마음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쌓았다. 당시 객주는 모두 남자였다. 김만덕은 절세미인이 객주를 한다고 널리 광고를 하였다. 광고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미녀 객주가 개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인들은 빨리 달려가 그 미녀를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감찰하러 온 고관들을 녹여버린 김만덕이 아닌가? 그 김만덕이 상인들과 공물 수집 관리들을 녹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녀는 기생시절 사귀어 놓은 부자 상인들을 네트워크로 활용하여 고객들을 유치했다. 돈 많고 실력 있는 상인들을 미모의 선후배 기생들을 불러 환대하여 완전 사로잡았다. 제주도와 육지의 상인들 모두 김만덕과 미인 기생들에게 서비스 받기 위해 김만덕의 영업지로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김만덕과 대화만 해도 즐거운 고객 상인들은 기꺼이 정치와 경제, 물가 동향,물류 동향 등 각종 최신의 고급 정보를 다 제공해 주었고 그녀는 그 정보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김만덕은 불과 1년 만에 1,000냥(영조 때 경복궁 근처 고급 주택 가격 150냥 정도이므로 1,000 냥은 지금 100억이 넘는 큰 액수임)이상의 거금을 벌었다. 김만덕은 빌린 돈을 다 갚고 제주 특산물인 말린 미역 건어물 등을 쌀 때 대량 구매해서 저장해 놓았다가 성수기에 이윤을 붙여 팔아 많은 돈을 계속 벌었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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