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21 오산학교를 세운 뒤 교사와 학생들 밥 해주고 화장실 치우고 몸까지 표본으로 기증

浮萍草 2014. 12. 9. 19:16
    7. 조선말에 재벌 형성을 주장한 뉴 패러다임 개척의 선각자 이승훈
    초창기 오산학교 학생들의 체조 교육
    승훈은 19세기말에 외국 자본 세력이 들어와 조선의 금광 채굴권과 산림 채벌권을 획득하여 자원을 빼앗아 가고 철도와 전차 등을 부설하여 독점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고 조선에도 이들에 대항할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 지역별로 부자들의 자본을 모아 재벌을 형성하여 각 분야의 산업을 맡아 육성해야 한다고 부자 사업가들에게 주장했다. 즉 평안도 재벌은 철도와 항만 건설을,함경도 재벌은 광산업을,호남과 영남 재벌은 제조업을 각각 나누어서 담당해야 한다는 지역 재벌론을 역설하였다. 120년 전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의 이러한 획기적인 안은 호남재벌인 김연수만이 겨우 명맥을 이었다. 그 후 1961년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을 육성하여 한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겨우 3-4년의 서당 교육만 받은 이승훈이 120년 전에 이러한 패러다임을 가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실로 위대한 뉴패러다임의 개척자였다. 8. 일본과 전쟁하기 위한 작전 사령부 역할의 오산학교를 세워
    이승훈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나라가 점점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야 나라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제 그의 나이도 40이 넘었다. 사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 시작하면서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1907년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와 평양에서 수많은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 나 혼자만이 잘 살 수는 없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는데 이승훈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도산을 방문하고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과 교육에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합의하고 고향 평북 정주의 오산면에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우선 자신의 자금과 향교의 도움을 얻어 학교를 세웠다. 아래는 초창기 오산학교 학생들의 체조 교육 모습이다.
    오산고등보통학교 시설배치와 이광수,함석헌,
    이중섭의 거주지
    이승훈의 설립목적은 학습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 오산학교는 일본과의 전쟁을 위한 작전본부의 역할을 하는 학교로 설립되어 사관학교,인문학교,민족지도자 양성학교 등의 복합 목적을 가진 학교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인문학, 수학,역사·지리,경제,법률 등을 가르치는 한편,체조와 군사 교육을 훈련시켰다. 대석학 단재 신채호,춘원 이광수,한뫼 이윤재,횡보 염상섭,안서 김억 등이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인문학을 가르쳤다. 고당 조만식이 9년 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법률경제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이 학교를 이끌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는 일본과 전쟁을 수행할 작전본부라 생각하고 학생들을 교육 이 학교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왔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일제 형무소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도 오산학교 졸업생이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이 1919년 3·1 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형무소에 있는 동안 일제 헌병들에 의해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조만식과 현상윤(광복 후 고려대 초대 총장) 등의 노력으로 학교가 재건되었다. 출옥한 이승훈은 평북 갑부 오치은 등의 지원을 받아 기숙사,병원,교사 사택까지 건설하여 현대식 학교로 만들었다. 기숙사에는 교장 조만식이 학생들과 함께 거주하며 돌보아 학교 분위기는 따뜻하고 포근한 하나의 가정이었다. 1926년 오산학교는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고 1930년 이승훈이 사망한 후 1934년에 각계의 후원과 협조를 받아 그림과 같이 본관,대강당,과학관,체육관,기숙사,수영장을 갖춘 초현대식 시설을 갖춘 명문 항일 독립운동 학교가 되었다. 광복 후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남하해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자리 잡고 오산중·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9. 교사들 밥 해주고 학생들의 대변을 직접 치우는 설립자 이승훈
    105인 사건으로 압송되어가는 애국지사들

    이승훈은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 집의 쌀을 갖고 왔고 학교 지붕에 비가 새면 자기 집 지붕의 기와를 뜯어 갖고 와 이었다. 요즘 같으면 부인에게 이혼 당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처음에 향교에서 토지와 자금을 보조 해주었는데 일제의 압력인지 향교에서 도로 달라고 하여 이승훈은 전 재산을 다 털어 향교에서 제공한 토지와 돈을 다 되돌려주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학교로 운영을 하였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청소하고 운동장에 잡초도 뽑으며 때로는 교실 뒤에 앉아 학생들과 함께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평북 정주는 겨울에 영하 30도 이하로 매우 추웠는데 학생들이 대변을 보면 똥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변소는 얼은 대변으로 산(山)이 만들어져 위는 산봉우리처럼 뾰족하였다. 학생들이 대변을 보기 위해 엉덩이를 내리고 앉으면 얼음 산봉우리에 항문이 찔려 대변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변소에서 탕탕 거리는 큰 소리가 들려 왔다. 학생들은 무슨 소리인가 하고 궁금하여 변소로 갔다. 이승훈 선생이 직접 도끼를 들고 땀을 흘리면서 얼음 대변을 깨부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대변을 치우는 설립자 이승훈 선생에게 완전 감동을 받았다. 학생들이“선생님! 똥 얼음이 선생님 입에 들어가요”라고 외치며 눈물을 줄줄 흘리자 이승훈은“자네들 똥인데 먹으면 좋지 않은가”하며 털털하게 웃었다. 학생들의 기쁨과 아픔이 바로 그의 기쁨이고 아픔이었다. 지금 한국에 학생들의 똥도 먹을 수 있는 이승훈 같은 교육자가 있다면 우리 교육이 이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0. 안악사건, 105인 사건, 3·1 독립만세 등 항일투쟁으로 계속 투옥
    안창호를 만난 후 이승훈은 신채호,박은식,이동녕,이회영 등이 주도하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합류하여 평북 총책이 되었다.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 이승훈은 독립군 무관학교 자금 모집으로 체포된 안명근 사건(안악사건)으로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독립군 기지 창건으로 양기탁,김구 등 애국지사들 105인이 기소된 105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승훈은 5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이승훈은 형무소에서 애국심은 더욱 더 강해졌고 1915년 52세의 나이에 평양 신학교를 1년간 수학한 후 길선주 목사와 김병조 목사 등 기독교 세력과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손병희와 최린 등 천도교인들과 한용운 등 불교인들도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어 이승훈은 그들과 연합하여 민족 전체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하였다. 기독교 독립운동 세력(16명),천도교 독립운동 세력(15명),불교 독립운동 세력(2명) 등의 민족 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가졌다. 그리고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승훈 등 민족 대표 33인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승훈은 3년 징역을 살면서 60에 가까운 노인이나 옥중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감방의 더러운 변기를 항상 혼자 도맡아 닦았다. 그는 1922년 7월에 출옥했다.
    좌측부터 오산학교의 교장과 교사를 지낸 조만식, 신채호, 이광수.

    11. 일제는 이승훈의 동상도 부수고 묘비마저 없애버려
    이승훈은 월남 이상재 등과 민족 교육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면서 오산학교 경영권을 교장 조만식에게 넘겨주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 하였다. 1924년 동아일보 사장을 잠시 역임한 뒤 이상재,김성수 등 민족지도자들과 자금을 모아 4년제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그것도 일제의 악랄한 탄압으로 수포로 돌아 갔다. 이렇게 민족의 독립과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그는 9년 가까운 옥살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30년 5월 67세에 운명하였다. 그는 죽은 후 자기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학생들 교육을 위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교에 걸어 두라고 유언했다. 이승훈 사후 이승훈의 시체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옮겨졌다. 유언대로 시체를 해부하여 뼈를 철제 표본하기 위해서였다. 해부를 하니 총독부가 철제 표본을 못하게 하여 뼈를 나무 상자에 넣어 오산으로 갖고 와 안장했다. 일제는 죽은 이승훈의 뼈가 학생들에게 줄 영향이 무서워 뼈 철제 표본을 못하게 한 것이었다. 일제는 그 후 오산학교에 있던 이승훈의 동상도 부수어 버리고 그의 묘비까지도 없애 버렸다. 조선총독부는 시체 이승훈도 무서워했다고 윤치호가 조롱했다. 아래는 이승훈의 초빙으로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당대의 대석학들인 고당 조만식,단재 신채호,춘원 이광수의 모습이다.

    12. 세계 모든 부자들을 뛰어넘는 동반성장 경영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고아가 된 이승훈은 고아의 한을 품기 보다는 정직과 신용을 기초로 민첩하게 사업기회를 포착하여 조선 말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 그는 백성을 굶게 하고 이민족에게 짓밟히게 하는 조선 왕조도 싫었고 양반도 싫어 조선 왕조에 충성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주변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한 없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는 양반과 쌍놈,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벌면서도 만민이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120년 전에 그는 국내의 자본들이 지역별로 합쳐 재벌을 형성해 외국 자본 세력과 대항해야 나라와 백성이 수탈당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혜안이 있었다.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를 만나 감동 받아 예수님을 믿고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05인 사건과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는 민족대표 33인의 하나가 되어 도합 9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교육이 나라 독립의 본원적인 힘이라고 생각한 그는 전 재산은 물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시체까지 학생들 교육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하며 운명하였다. 세계 어디에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학생들의 대변까지 치우며 시체까지 교육에 바치는 이승훈 같은 겸손한 부자 사업가는 없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승훈 같이 동반성장에 헌신할 거부 사업가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나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정치 세력과 노동계 세력에 물들어 가고 있는 한국 교육계야 말로 지금 당장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을 본받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승훈의 철학과 생애를 도표화 하니 아래 그림과 같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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